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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세자빈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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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세자빈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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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 소개===
 
===세자빈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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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4일 (일) 15:06 판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이란 디지털과 인문학의 융합을 통해 이뤄지는 인문학 연구와 인문 지식의 교육, 그리고 그 결과물이 디지털 시대의 우리 사회에서 더욱 가치 있게 활용되도록 하는 학문이다.[1] 처음에는 '디지털 기술'에 대해 데이터를 정리하고 저작물을 편집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디지털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기술의 확산에서 생겨나는 현상이 '인문학'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인문학과 디지털은 서로를 도구로 이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융합된 하나의 세계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순수 학문과 인문학 등 전통적 학과들이 진화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왔다. 디지털 인문학은 전통적 가치를 재평가하고 재해석하려는 노력으로써,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미디어와 문학·역사·철학 등 인문학과의 접목을 시도하는 등 인문학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다.우리가 '디지털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첫째, 인문학이 쓸모없어지는 시대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기회로써 디지털 시대에 부합하도록 숨을 불어 넣어주기 때문이다. 둘째, 디지털화된 자료를 통해, 인문학자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문화적 유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인문 지식이 한계의 벽을 넘어 공유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디지털 인문학은 다양한 관점의 멀티리터리시 함양을 통해 통합적 지식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이는 분과 학문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분과를 가로지르는 혁신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2] 이처럼, 디지털 인문학의 사회적 공헌은 여러 측면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앞으로의 디지털 인문학의 발자취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크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덕수궁의 역할과 의미

경운궁은 우리의 역사에서 임진왜란 직후와 19세기 말 조선이 세계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던 때로 크게 두 번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는 1592년(선조 25)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 밀려 14대 임금 선조가 한양에 다시 돌아왔을 때, 거처할 곳이 없어 머물렀던 월산대군의 사저가 정릉동 행궁의 위상을 갖게 된 때이다.[3]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국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때에 제국의 건설을 통해 난관을 극복하고자 했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번째는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고[4]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여[5] 궁궐 다운 전각들을 갖추게 된 때이다. 덕수궁에 우리나라 역사 최초로 제국의 궁궐로 지어지고 사용되었으며, 13년의 역사와 함께 우리 근대 역사의 심장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두 시기 모두 국가의 존폐가 기로에 서 있었던 시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임진왜란을 극복한 조선은 영·정조 시대를 열었고, 식민지로 전락했던 대한제국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극복하고 오늘날 세계에 우뚝 선 대한민국이 되었다. 경운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격변기의 현장이자, 국난 극복의 현장이었다.

덕수궁 이름의 변천사

1593년(선조 26) 선조가 한성으로 돌아와서 승하할 때까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거처지로 사용하였는데, 이 행궁은 지명인 '정릉동'에서 유래되어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불렸다.[6] 1611년(광해군 3)광해군이 창덕궁(昌德宮)으로 이거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지었다. 원래는 흥경궁(興慶宮)으로 하고자 했으나, 광해군이 “이것은 전대의 궁호이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합당한 궁호를 여러 개 써서 아뢰라.”라고 하였기에, 경운궁이라고 이름 지었다. [7] 고종 황제가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난 후, 일제에 의해 '덕수(德壽)'로 호가 바뀌며[8] '경운궁'의 궁호 또한 덕수궁(慶運宮)으로 바뀌게 되었다.[9]

덕수궁에서의 주요 사건

덕수궁은 아관파천, 대한제국 선포, 을사늑약과 같은 역사적 전환점의 사건들이 일어난 곳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반포하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황제에 올랐다.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낸 고종은 태극전(즉조당)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다. 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으며, 1906년 2월 1일에는 일본 통감부가 개설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첫 통감으로 부임하였다.[10] 외교권이 강탈되고 주권을 빼앗기는, 대한제국 패망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었다.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세자빈의 생활)

세자빈 소개

조선의 왕세자빈(王世子嬪)은 조선에서 왕세자의 정배(正配)에게 내린 작위로, 보통 빈궁(嬪宮)이라 부른다. 세자빈 간택이 확정되면 책봉의 가례를 거행하며, 임금의 교지가 전달되었다. 배위의 원칙에 입각하여, 세자빈의 경칭은 세자와 동일하게 저하(邸下)이다.[11] 따라서, 세자빈의 복장 또한 세자와 동일하게 곤룡포(사조룡보)가 가슴과 등, 양 어깨에 붙어있었다.

내명부에서의 위치

내명부(內命婦)는 조선시대 궁중에 있는 왕비와 후궁, 그리고 이들을 모시는 여자 관리(궁녀)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조선 초기에는 궁녀 조직을 내관(內官) 또는 여관(女官) 등으로 불렀으나, 성종 대에 와서 '내명부'라『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되었다. 내명부의 상대 개념으로서, 왕족과 관리의 아내를 일컫는 외명부(外命婦)가 있다. 임금의 딸인 공주와 옹주, 세자의 딸인 군주, 현주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내·외명부의 최고 권한은 원래는 중전(왕비)에게 있기 때문에 국왕도 내명부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 기능은 궁중에서 각각 맡겨진 직무에 따라 공적인 일부터 사사로운 시중까지 다양하게 국왕 및 왕실을 보필하였다.'내관'이란 왕을 직접 모시는 이들로, 흔히 후궁이라 불린다. 간택을 통해 입궁한 양반가나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 출신, 심지어 숙빈 최씨처럼 궁의 잡일을 하던 무수리였다가 빈의 자리까지 오르는 등 내관의 출신은 다양하였다.

왕비는 그 관직이 비(妃)이며 품계는 무품으로 정1품 빈보다 앞섰으나, 내명부에도 외명부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그 두 명부의 수장이었다. 또한 기본적으로 내관들 또한 임금에게 첩지를 하사받은 신하의 입장에 있다.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경우, 정비의 대리 역할을 했으나 황후가 아닌 황귀비로서 후궁의 지위를 가졌다. 또한 왕비는 남편인 왕이 일찍 자연사로 승하하고 그 자리에 후임 왕이 즉위할 경우 대비(大妃)가 되며 이는 위치상 왕의 어머니에 해당되기 때문에 왕비보다도 더 높은 위치이다. 다만 반정으로 왕이 승하할 경우 왕비는 오히려 폐서인이 된다. 대비가 생존해있을 경우 내명부와 외명부의 사실상의 수장은 왕비가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대비가 된다. 궁궐에는 왕과 왕비가 거쳐하는 궁전 외에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거처하는 궁전을 세자궁(世子宮)이라 하였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궁(東宮)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자궁에서 왕세자를 직접 모시는 내관은 따로 두었는데, 이들은 다른 내관들과 마찬가지로, 내명부 소속이나 동시에 세자궁 소속이었다. 왕세자빈의 품계는 무품으로, 내명부 정1품 빈(嬪)과는 다르다. 세자궁의 수장이며 차기 내명부의 수장이다.

세자와 세자빈 간의 규율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각주

  1. 김현 외 2인, 『디지털 인문학 입문』, HUEBOOKs, 2016
  2. 민춘기,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의 변화 가능성 모색」, 용봉인문논총, 2016
  3. 『선조실록』, 26년 10월 1일
  4. 『고종실록』, 34년 2월 18일
  5. 『고종실록』, 34년 10월 12일
  6.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고사본말
  7. 『광해군일기』, 3년 10월 11일
  8. 『고종실록』, 44년 7월 19일
  9. 『순종실록』, 즉위년 8월 2일
  10.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덕수궁 이야기
  11. 『고종실록』, 31년 12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