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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동궁(竹洞宮)은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와 그 남편 東寧尉 金賢根이 거주하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몇 차례 보이는 죽동궁 관련 기사는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거처를 지칭하는 것으로 현재의 죽동궁과는 다른 장소이다. | 죽동궁(竹洞宮)은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와 그 남편 東寧尉 金賢根이 거주하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몇 차례 보이는 죽동궁 관련 기사는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거처를 지칭하는 것으로 현재의 죽동궁과는 다른 장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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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인 민영익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사랑의 독차지하여 그의 집인 죽동궁에는 그에게 추부하려는 무리가 모여들었다. 뒤날 급진 개화파의 수장인 김옥균, 홍영식(洪英植)을 비롯하여 이중칠(李重七), 조동희(趙同熙), 김흥균(金興均), 홍순형(洪淳馨), 심상훈(沈相薰), 어윤중(魚允中) 등 쟁쟁한 노론 가문의 후계자들이 그의 사랑방에 모여 서화를 연마하고 시사를 토론하며 국정을 논하였다.<ref>정옥자,『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현암사, 2002.</ref> | 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인 민영익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사랑의 독차지하여 그의 집인 죽동궁에는 그에게 추부하려는 무리가 모여들었다. 뒤날 급진 개화파의 수장인 김옥균, 홍영식(洪英植)을 비롯하여 이중칠(李重七), 조동희(趙同熙), 김흥균(金興均), 홍순형(洪淳馨), 심상훈(沈相薰), 어윤중(魚允中) 등 쟁쟁한 노론 가문의 후계자들이 그의 사랑방에 모여 서화를 연마하고 시사를 토론하며 국정을 논하였다.<ref>정옥자,『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현암사, 2002.</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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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년 경성부중부관훈동 토지조사목록에는 소유주가 민영익으로 되어있으나, 1914년 6월 10일 민영익 사망이후에 발행된 1917년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는 죽동궁의 주소인 관훈동 198번지는 3,168평에 소유주는 아들인 민정식으로 등재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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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죽동궁은 필지가 더욱 분할되어 현재는 센터마크호텔을 비롯한 다수의 건물이 들어서있다. 죽동궁 터 표석은 194-35 번지 모퉁이에 설치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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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7일 (수) 13:42 기준 최신판
죽동궁터 (竹洞宮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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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명칭 | 죽동궁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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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竹洞宮址 |
영문명칭 | Site of Jukdonggung Palace |
설치연도 | 2016년 |
주소 | 인사동5길 38(관훈동 198-42) |
표석 문안
죽동궁은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와 그 남편 김현근이 거주하던 곳이다. 이곳은 당시 김현근이 앓고 있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당들이 대나무 칼춤을 추며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고 해서 죽도궁(竹刀宮)으로 불리다가, 후에 죽동궁이 되었다. 고종 때에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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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편년자료 및 고전번역서
죽동궁(竹洞宮)은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와 그 남편 東寧尉 金賢根이 거주하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몇 차례 보이는 죽동궁 관련 기사는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거처를 지칭하는 것으로 현재의 죽동궁과는 다른 장소이다.
왕세자를 명온 공주의 집에 가도록 하다
丁酉/命王世子, 往明溫公主第, 以公主新出閤也。 왕세자에게 명온 공주(明溫公主)의 집에 가도록 명하였는데, 공주가 새로 출합(出閤)하였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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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27 > 순조 24년(1824) > 9월 8일(정유) |
명온공주의 계후를 본가에 물어 성복 전에 정하여 올리라고 명하다
命明溫公主繼後, 問於本家成服前定入。 명온 공주의 계후(繼後)를 본가(本家)에 물어서 성복(成服) 전에 정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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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32권 > 순조 32년(1832) > 6월 13일(무자) |
명온공주와 동녕위 김현근 사후 죽동궁은 왕실의 소유가 된후, 명성황후의 오빠 민승호에게 하사되었다. 1874년 11월 28일 의문의 폭발 사고로 민승호와 아들, 어머니, 명성황후의 어머니가 화를 입었다.
명성황후는 의문의 폭발사고로 화를 입은 민승호의 양자로 민태호의 아들인 민영익을 입적하여 친정의 대를 잇게 하였다.
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인 민영익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사랑의 독차지하여 그의 집인 죽동궁에는 그에게 추부하려는 무리가 모여들었다. 뒤날 급진 개화파의 수장인 김옥균, 홍영식(洪英植)을 비롯하여 이중칠(李重七), 조동희(趙同熙), 김흥균(金興均), 홍순형(洪淳馨), 심상훈(沈相薰), 어윤중(魚允中) 등 쟁쟁한 노론 가문의 후계자들이 그의 사랑방에 모여 서화를 연마하고 시사를 토론하며 국정을 논하였다.[1]
민영익 문하의 팔학사
민영익 문하에 드나들어 당시 팔학사(八學士)로 지칭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중칠(李重七)·조동희(趙同熙)·홍영식(洪英植)·김흥균(金興均)·홍순형(洪淳馨)·심상훈(沈相薰)·김옥균(金玉均)·어윤중(魚允中)이 그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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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현,『매천야록』 |
근현대 자료
매일신보는 1917년 7월 3일부터 7월 25일 동안 「疑雲에 包圍된 竹洞宮」이란 제목으로 20회에 걸쳐 민영익이 상해에서 사망한 후 죽동궁에서 벌어지는 재산상속을 둘러싼 동향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어 당시 세간의 죽동궁에 대한 관심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명성황후의 친정인 죽동궁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반영하듯 죽동궁의 새주인 민정식과 관련한 동정과 구설수에 대하여 당시 언론에서는 시시각각 기사화하고 있다. 다.
『이규태의 600년 서울』에는 죽동궁 명칭의 유래가 부마인 동녕위 김현근의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당들이 휘두른 대나무 칼이 부딪히는 소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이야기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며 다른 문헌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지도 및 도판자료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경성부 중부 관훈동(1912)
1912년 경성부중부관훈동 토지조사목록에는 소유주가 민영익으로 되어있으나, 1914년 6월 10일 민영익 사망이후에 발행된 1917년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는 죽동궁의 주소인 관훈동 198번지는 3,168평에 소유주는 아들인 민정식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1927년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는 필지가 분할되어 198-1번지는 2,739평에 소유자는 민정식으로, 198-2, 198-3번지는 의친왕 이강(李堈)의 소유로, 198-5번지는 민대식으로, 198-7번지는 감리교회조선선교부 소유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198-4, 198-6번지는 경성부 소유로 도로로 편입되어있다.
1929년 발행된 경성부지형명세도에서는 198번지가 198-1부터198-7까지로 분할되어 있다. 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198-1 번지가 민영익의 아들 민정식의 소유인 죽동궁으로 점선으로 표시된 것을 보아 도로는 이후에 신설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주 출입구는 동쪽 골목(오른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죽동궁은 필지가 더욱 분할되어 현재는 센터마크호텔을 비롯한 다수의 건물이 들어서있다. 죽동궁 터 표석은 194-35 번지 모퉁이에 설치되어 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 ↑ 정옥자,『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현암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