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동궁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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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동궁터
(竹洞宮址)
2018년 7월 촬영
표석명칭 죽동궁터
한자표기 竹洞宮址
영문명칭 Site of Jukdonggung Palace
설치연도 2016년
주소 인사동5길 38(관훈동 198-42)


표석 문안

Quote-left.png 죽동궁은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와 그 남편 김현근이 거주하던 곳이다. 이곳은 당시 김현근이 앓고 있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당들이 대나무 칼춤을 추며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고 해서 죽도궁(竹刀宮)으로 불리다가, 후에 죽동궁이 되었다. 고종 때에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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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편년자료 및 고전번역서

죽동궁(竹洞宮)은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와 그 남편 東寧尉 金賢根이 거주하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몇 차례 보이는 죽동궁 관련 기사는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거처를 지칭하는 것으로 현재의 죽동궁과는 다른 장소이다.

Quote-left.png 부마의 세 번째 간택을 행하여 진사 김한순의 아들 김현근으로 정하다

行駙馬三揀擇, 敎曰: "明溫公主駙馬定于進土金漢淳子賢根, 令該曹擧行, 金賢根, 東寧尉單付。" 命明溫公主吉禮, 以七月旬後擇入。

부마(駙馬)의 세 번째 간택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명온공주(明溫公主)의 부마를 진사 김한순(金漢淳)의 아들 김현근(金賢根)으로 정하였으니, 해당 조(曹)로 하여금 김현근을 동녕위(東寧尉)의 단망(單望)으로 하게 하라." 하고, 명온 공주의 길례(吉禮)의 날짜를 7월 초순 후로 가려서 올리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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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26 > 순조 23년(1823) > 6월 2일(기해)


Quote-left.png 왕세자를 명온 공주의 집에 가도록 하다

丁酉/命王世子, 往明溫公主第, 以公主新出閤也。

왕세자에게 명온 공주(明溫公主)의 집에 가도록 명하였는데, 공주가 새로 출합(出閤)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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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27 > 순조 24년(1824) > 9월 8일(정유)


Quote-left.png 명온 공주가 졸서하다

戊子/明溫公主卒逝。 敎曰: "病雖沈淹, 猶冀萬一之幸, 今聞長逝之報, 慟矣慟矣。 喪威之如是荐疊, 實非人理之所可堪, 慟矣慟矣。 卒明溫公主喪, 凡百擧行, 一依福溫喪例爲之, 東園副板一部輸送。" 又敎曰: "親臨主第矣, 該房知悉。"

명온공주(明溫公主)가 졸서하였다. 하교하기를, "병이 비록 짙고 오래 끌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만에 하나 다행하기를 바랐는데, 지금 길이 갔다는 기별을 듣게 되니, 서럽고 서럽도다. 상위(喪威)가 이토록 겹쳐 참으로 인정으로는 감내하지 못하겠으니, 서럽고 서럽도다. 졸서한 명온공주의 상(喪)에 온갖 상수(喪需)를 한결같이 복온공주(福溫公主) 상사(喪事)의 예대로 거행하고 동원부판(東園副板) 1부(部)를 실어보내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친히 공주의 집에 나갈 것이니, 해방(該房)에서는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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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32 > 순조 32년(1823) > 6월 13일(무자)


Quote-left.png 명온공주의 계후를 본가에 물어 성복 전에 정하여 올리라고 명하다

命明溫公主繼後, 問於本家成服前定入。

명온 공주의 계후(繼後)를 본가(本家)에 물어서 성복(成服) 전에 정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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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32권 > 순조 32년(1832) > 6월 13일(무자)


Quote-left.png 동녕위 김현근이 졸하다

東寧尉金賢根卒。 敎曰: "此都尉以純廟儀賓, 厚被四朝恩遇, 小心謹愼之爲畢生執守。 予亦有深知者矣。 邇來持制, 久未相見, 无妄一疾, 遽至長逝, 愴念往事, 曷以爲懷? 前東寧尉家, 遣中使護喪, 禮葬等節, 照例擧行。 東園副器一部輸送, 成服日, 遣承旨致祭, 祿俸限三年別給。" 仍敎曰: "前東寧尉, 上相贈職之典, 當日擧行。"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이 죽었다. 전교하기를, "이 도위(都尉)는 순묘(純廟)의 의빈(儀賓)으로서 네 조정에 걸쳐 은혜를 후하게 받았으며, 조심하고 삼가는 것으로 평생의 신조로 삼았음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자신을 지키고 나서지 않는 탓에 오랫동안 서로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한 번 병이 들어 문득 세상을 떠났으니, 지나간 일을 돌이켜봄에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전 동녕위의 집에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호상(護喪)을 보게 하고, 의절을 전례에 비추어 거행하라. 그리고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며, 3년간 녹봉을 별도로 지급하라."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전 동녕위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하는 의전을 당일로 거행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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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5 > 고종 5년(1868) > 8월 26일(경오)


명온공주와 동녕위 김현근 사후 죽동궁은 왕실의 소유가 된후, 명성황후의 오빠 민승호에게 하사되었다. 1874년 11월 28일 의문의 폭발 사고로 민승호와 아들, 어머니, 명성황후의 어머니가 화를 입었다.

Quote-left.png 전 판서 민승호가 졸하다

前判書閔升鎬卒。 【升鎬與其幼子, 方侍食於韓昌府夫人, 有人以外邑封物樣, 來納一座小函, 使之卽呈內室, 其人旋卽歸去。 升鎬見其函, 甚奇妙, 手自開鑰, 忽出轟然一大爆聲, 母子孫三人, 竝遇害。 竟未査得其函從何處而來云。】 敎曰: "此重臣, 重厚之姿, 純篤之行, 其忠勤何如? 倚毗何如? 而年來守制, 雖未能展施蘊抱, 予心眷注, 將欲大用。 意慮之外, 逝單遽徹, 驚衋之極, 夫何言哉? 卒判書閔升鎬喪, 東園副器一部輸送, 錢一千兩、米三十石、木布各五同、緞屬五端、全漆一斗, 令度支輸送, 遣中使護喪。 特贈左贊成, 不待諡狀議諡。 成服日, 遣承旨致祭。"

전 판서(判書) 민승호(閔升鎬)가 졸하였다. 【민승호가 어린 아들과 함께 한창 부부인(韓昌府夫人)을 모시고 식사하는데, 어떤 사람이 지방 고을에서 바치는 봉물(封物) 비슷한 자그마한 함 하나를 가지고 와서 바치면서 즉시 내실(內室)로 들이도록 하고서 그 사람은 돌아가 버렸다. 민승호가 그 함을 보니 매우 기묘하게 생겨서 직접 자물쇠를 여니 갑자기 굉음이 나면서 크게 폭발하여 어머니, 아들, 손자 세 사람이 모두 해를 당하였다. 그런데 그 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조사해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전교하기를, "이 중신이 중후한 자태와 순수하고 독실한 행실이 있었으니 얼마나 충실하였으며 내가 얼마나 의지했던가? 최근 몇 년간 거상(居喪)하느라 자기의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였으나 나는 관심을 두고 앞으로 크게 등용하려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갑자기 서거했다는 부고가 날아드니 극도로 놀랍고 슬픈 마음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고 판서 민승호의 상사에 동원부기(東園副器) 한 부(部)를 실어 보내고, 돈 1,000냥, 쌀 30석, 무명과 베를 각각 5동, 비단 등속 5단(端), 전칠(全漆) 1말을 호조에서 실어 보내도록 하며, 내시(內侍)를 보내어 호상(護喪)을 하게하고 특별히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하며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의정(議定)하며 성복일(成服日)에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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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11권 > 고종 11년(1874) > 11월 28일(정묘)


명성황후는 의문의 폭발사고로 화를 입은 민승호의 양자로 민태호의 아들인 민영익을 입적하여 친정의 대를 잇게 하였다.

Quote-left.png 민영익의 후사를 선정할 것을 명하다

詔曰: "前判書閔泳翊淹留外國, 已有年所。 且今銜命出使, 回還杳然。 況其年近四十而無嗣, 兩世國舅香火, 不可不念。 令掌禮院知委於在京該門長驪陽府院君直傍派中, 使之擇定立嗣, 禮斜成給。"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전 판사(前判事) 민영익(閔泳翊)이 외국에 머문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또 지금 명령을 받고 사신(使臣)으로 나가니 돌아올 기한이 아득하다. 더구나 그의 나이가 마흔에 가까운데 자식이 없으니 두 대의 국구(國舅)에 대한 제사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장례원(掌禮院)에서 서울에 있는 해당 가문의 문장(門長)에게 통지하여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의 직계와 방계 중에서 후사(後嗣)를 세워 예사(禮斜)를 만들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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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36 > 고종 34년(1897) > 12월 11일


Quote-left.png 민정식을 여양과 여성 두 부원군의 종손으로 정하다

詔曰: "練祭時文、蔭、武曾經實職人中, 雖無實職, 入參哭班。" 又詔曰: "侍從官閔珽植, 使之承候。" 珽植因詔勅爲閔泳翊后, 驪陽、驪城兩府院君宗孫也。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연제(練祭) 때 문관(文官)과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 일찍이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은 비록 현재 실직이 없다 하더라도 곡(哭)하는 반열에 참석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시종관(侍從官) 민정식(閔珽植)이 문안하게 하라." 하였다. 정식(珽植)은 조칙으로 인하여 민영익(閔泳翊)의 후사가 되었는데, 여양(驪陽)과 여성(麗城) 두 부원군(府院君)의 종손(宗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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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37 > 고종 35년(1898년) > 1월 1일


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인 민영익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사랑의 독차지하여 그의 집인 죽동궁에는 그에게 추부하려는 무리가 모여들었다. 뒤날 급진 개화파의 수장인 김옥균, 홍영식(洪英植)을 비롯하여 이중칠(李重七), 조동희(趙同熙), 김흥균(金興均), 홍순형(洪淳馨), 심상훈(沈相薰), 어윤중(魚允中) 등 쟁쟁한 노론 가문의 후계자들이 그의 사랑방에 모여 서화를 연마하고 시사를 토론하며 국정을 논하였다.[1]

Quote-left.png 민영익 문하의 팔학사

민영익 문하에 드나들어 당시 팔학사(八學士)로 지칭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중칠(李重七)·조동희(趙同熙)·홍영식(洪英植)·김흥균(金興均)·홍순형(洪淳馨)·심상훈(沈相薰)·김옥균(金玉均)·어윤중(魚允中)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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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현,『매천야록』


근현대 자료

매일신보는 1917년 7월 3일부터 7월 25일 동안 「疑雲에 包圍된 竹洞宮」이란 제목으로 20회에 걸쳐 민영익이 상해에서 사망한 후 죽동궁에서 벌어지는 재산상속을 둘러싼 동향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어 당시 세간의 죽동궁에 대한 관심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명성황후의 친정인 죽동궁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반영하듯 죽동궁의 새주인 민정식과 관련한 동정과 구설수에 대하여 당시 언론에서는 시시각각 기사화하고 있다. 다.


Quote-left.png 大京城 市中의 建物 로맨스(8)

사동골목으로 한참 올라오면 동향한 큰소실대문은 예전 죽동궁(竹洞宮)이오 지금은 동일은행(東一銀行) 두취 민대식(閔大植)씨 집인데 예전이름이 그대로 나려와 주인이 밪구인 후에도 세상 사람들이 죽동궁(竹洞宮)으로 부른다. 이 죽동궁은 어떠한 력사를 가젓나 그 집도 역시 근본은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집이다.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이란 이가 순조대왕(純祖大王) 따님 명온공주(明溫公主)에게 장가를 들어 나라에서 그 집을 지어 부마궁으로 맨든 것인데 골목이름을 따라사 사동궁이라 할것이지만은 동녕위란 이가 사동이란 사자의 음이 죽을 사자 음과 가타여 실혀하는 ᄭᅡ닭으로 죽동궁이라 하얏다. 동녕위가 그 집에서 살 때에는 별조화 별풍화가 업시 호강만 하얏지마는 동녕위의 손자 김덕규(金德圭)때에 와서 명성황후(明聖王后)께압서 그집을 달라하사 당신 친정으로 하사하섯다. 려성부원군(驪城府院君) 집이 그리온 후에는 집이 큰이만큼 모든 풍파도 그집에서 큼직하게 일어낫섯다. 민영익(閔泳翊)이 민성호(閔性鎬)의 계자(系子)로 들어와 명성황후의 친족하가 되어 국가대소사를 모조리 처리하든 집도 이집이다. 민영익이 세도를 그러케 무시무시하게 하다가 갑신년에 귀가 떨어지고 상해(上海)로 나간후에는 그집이 밧갓주인은 업섯지마는 부인들이 세도를 하야 죽동대방마님이라면 벼슬깨나한 사람은 모르는 이가 업슬만큼 한판을 차렷섯다. 그럼으로 민씨의 쪼각세도군과 별입시(別入侍)군들의 그림자가 식전저녁으로 그집에 끈일사이가 업섯다. 매관매작하는 거건군들의 어음(於音)쪽도 그집만큼 심히 드나든 집이 업섯다. 그리든 집이 세월이 변하자 소조적막을 늦기기 시작하야 민영익의 립후(立後)로 여러 사람이 들락날락하다가 민영익이 상해에서 죽고 민정식(閔庭植)이가 그리온후에는 그집이 소송판싸홈판으로 되엇다가 숫한 그재산이 탕패하게 되어 민정식이 상해로 도망간후에는 민영익의 모아두엇든 서화골동품 경매가 한참 그집에서 되어 고물상으로 변한 일도 잇섯다. 그집이 일본사람 손을거쳐 지금 주인 민대식씨에게로 넘어 왓는데 민대식씨가 그집을 가질만큼된 부력(富力)도 그집으로 인하야 생겻고 지금 그집에서 살게되니 그것도 무슨 인연이랄가. 지금은 벼슬떼고 내는것은 업지마는 그대신 사음을 떼고내고 하는 일이 그집에서 제일만코 돈어드러 사음어드러 다니는 사람이 예전 벼슬구하러 드나들던 사람만 못지안? 그집의 특색은 문전이 제일 조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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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1932년 12월 25일 기사


『이규태의 600년 서울』에는 죽동궁 명칭의 유래가 부마인 동녕위 김현근의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당들이 휘두른 대나무 칼이 부딪히는 소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이야기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며 다른 문헌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Quote-left.png 관훈동 죽동궁, 대칼춤으로 순조의 부마 치료

3·1 운동의 발상지인 서울 관훈동 소재 기독교 태화관 앞길 건너 북쪽 일대가 관훈동 198번지로 그 많은 부분을 죽동궁(竹洞宮)이 차지하고 있었다. 죽동궁의 본명은 대나무로 만든 칼이란 뜻인 죽도궁(竹刀宮)이다. 그 이름이 붙은 것은 23대 임금 순조의 첫 공주인 명온 공주가 그곳에 시집가 살게 되면서부터였다. 부마는 안동 김씨 김현근으로 순조 왕비인 순원 왕후의 지친이다. 김현근은 불치의 정신병에 걸려 있었다. 심한 발작은 곧잘 횡포로 발전하여 동네를 소란케 했기로 부마라는 체통과 안동 김씨의 명예에 불안한 요인이 돼 있었다. 우리 토속적인 치료 방법으로는 경악법이라는 게 있었다. 환자를 놀라게 하거나 겁을 주어 환자 안에 든 귀신을 내쫓을 수 있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환자를 가운데 앉혀두고 무당들이 대칼(竹刀)을 들고 난무를 한다. 김현근의 이 궁터에서는 매일같이 이 칼춤 추는 죽도의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나왔기로 이 집을 죽도궁으로 속칭해 내렸던 것이다. 이 죽도궁은 다시 와전되어 죽동궁〈竹洞宮〉이 되었고 한말에는 민씨 세도의 핵심 인물인 민영익 대감이 이 집에서 살았던 것이다. 역대 공주가 산 집은 사유도 있었지만 왕가 소유의 경우가 많았으며 죽동궁도 왕가 소유였을 확률이 높다. 이 왕가 소유의 궁들은 왕비가 좌우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명성 황후 친정 조카인 민영익을 살게 하지 않았나 싶다. 민영익은 바로 명성 황후 오빠인 민승호의 아들로 명성 황후 친정의 사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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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규태의 600년 서울 』, 조선일보사, 1993.


지도 및 도판자료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경성부 중부 관훈동(1912)

1912년 경성부중부관훈동 토지조사목록에는 소유주가 민영익으로 되어있으나, 1914년 6월 10일 민영익 사망이후에 발행된 1917년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는 죽동궁의 주소인 관훈동 198번지는 3,168평에 소유주는 아들인 민정식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1927년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는 필지가 분할되어 198-1번지는 2,739평에 소유자는 민정식으로, 198-2, 198-3번지는 의친왕 이강(李堈)의 소유로, 198-5번지는 민대식으로, 198-7번지는 감리교회조선선교부 소유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198-4, 198-6번지는 경성부 소유로 도로로 편입되어있다.

1929년 발행된 경성부지형명세도에서는 198번지가 198-1부터198-7까지로 분할되어 있다. 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198-1 번지가 민영익의 아들 민정식의 소유인 죽동궁으로 점선으로 표시된 것을 보아 도로는 이후에 신설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주 출입구는 동쪽 골목(오른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죽동궁은 필지가 더욱 분할되어 현재는 센터마크호텔을 비롯한 다수의 건물이 들어서있다. 죽동궁 터 표석은 194-35 번지 모퉁이에 설치되어 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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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주석

  1. 정옥자,『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현암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