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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왕조 왕실에서는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기존의 경복궁궁궐[1], 창덕궁궁궐[2]에다가 창경궁을 새로 만들었다. 창경궁이 있던 자리는 수강궁궁궐[1]이 있던 자리였는데, 대대적인 보수와 리뉴얼을 거쳐 지금의 창경궁이 되었다.
창경궁은 서울 5대궁 중 하나로 1418년 창덕궁의 뒤를 이어 건립된 조선왕조의 이궁 중 하나다.동궐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아울러 지칭하는 별칭이다. 다른 궁궐들과 다른 점은 창경궁은 남쪽 종묘에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에 북조남으로 가는 형식이 아니라 서쪽 동쪽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1418년 조선 세종인물이 왕위에 오르자 퇴위한 조선 태종을 봉양하기 위해 수강궁을 세운 것이 창경궁의 모태다. 1482년 조선 성종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와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인물를 봉양하기 위해 명정전문정전, 통명전을 세워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역사

창경궁 소설과 재건의 역사

1592년 임진왜란[3]사건이 일어나 창경궁은 다른 궁궐들과 마찬가지로 전소되었다가 1616년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1624년이괄의 난사건1830년대화재사건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창경궁의 전성기는 1830년대에 나타났다.
1910년 한국이 일제강점기[4]시기에 창경궁은 '창경원'[5]으로 격하되면서 건물 대부분이 헐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이 조성되면서 한때 시민들의 놀이공원이 되었다. 창경궁과 종묘가 일맥상통하는 땅도 잘려나가고 중간에 도로가 만들어져서 고대 궁궐건축의 완전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1984년에 정부는 창경궁 복구에 착수1986년 6월에 완공했다. 반면 동물원과 식물원, 각종 놀이 시설은 서울대공원으로 옮겼다.

역사 과정
시기 결국 사건
1592 전소 임진왜란
1616 창경궁 재건
1624/1830 소실 이괄의 난/화재
1910 창경원 일제강점기
1984 창경궁 복구 완공

궐내각사와 진전

외전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 이 문을 지나 옥천교[6]를 건너면 명정문에 이른다. 옥천교는 다른 궁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여 모든 궁궐의 다리 중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명정전

명정전은 다른 조선시대의 정전과 달리 남쪽이 아닌 동쪽을 향하고 있습니다.선왕이 묻힌 종묘는 남쪽에 있는데 유교의 관습상 종묘를 향해 문을 열 수 없기 때문이다.

선인문

담장을 따라 남쪽(홍화문에서 왼쪽)의 남쪽 십자각을 지나 선인문으로 향한다. 선인문은 관원 및 내시들이 출입하던 곳으로 성종 년간 창경궁 건립 당시 초창 된 곳으로 임진왜란사건때 소실되어 광해군인물 8년에 중건하고, 철종 8년(1857년)에 다시 소실, 고종인물 14년(1877)에 소실된 문을 복구하였다. ‘동궐도’에 보면 현재의 창경궁 동북쪽 궁장에 설치된 월근문과 같이 솟을지붕의. 외관을 갖추고 있었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월근문

선인문에서 홍화문을 거처 월근문으로 향한다. 이 문은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인물의 묘(廟)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 3)에 건립하였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월근문(月覲門)이라 이름하였다.

옥천교

홍화문을 들어서면 코 앞이 옥천교이다. 창경궁이 좁은 공간에 지은 궁궐임을 실감할 수 있다.

명정문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이 문은, 비교적 높은 계단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이며, 문 양쪽으로 행각이 연결돼 있다. 지금의 행각은 일제강점기에 창경원을 조성하면서 없앴던 것을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

관천대

문정전 앞쪽에 있으며, 천문을 관측하던 소간의를 설치했던 시설로 보인다. [2] 최근에는 시간을 측정하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를 설치했던 시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숙종인물14년(1688)에 조성했으며 원래 창덕궁 금마문 밖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높이 2.2m 가로 2.4m 세로 2.3m이며 주위로 돌난간을 돌렸다.

문정전

문정전은 명정전의 편전으로 왕께서 일상적으로 업무를 보시고 어전회의를 하시는 곳이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正殿)으로,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다. 인종이 1544년(중종인물 39)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영조인물 35)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또는 가례(嘉禮))가 치러지기도 했다.

숭문당

왕의 경연이 이루어졌던 숭문당은 명정전 뒤쪽 빈양문으로 가는 복도각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경사지를 이용하여 건물 남쪽에는 길게 생긴 주초석을 세워 바닥 높이를 맞추었다.

빈양문[3]

명정전에서 내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국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왕의 사적 생활공간인 내전으로 통하기 때문에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지금의 빈양문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던 것을 1984년 발굴을 통해 1986년 중건 공사 때 재건한 것이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보이는 전각이 함인정[7]이다.

내전

퉁명전

창경궁에서 가장 큰 내전이었는데, 창건 당시부터 대비의 거처였습니다.궁내 귀부인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곳에서 내궁 권력투쟁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사건과 전설이 많이 있었다.

풍기대

풍향풍속을 측정하는 도구로 쓰인다.

함인정

원래 이 자리에는 성종인물 15년(1484)에 세운 인양전(仁陽殿)이 외전에서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이 일대에는 내전의 전각이 즐비했으며 지금의 서쪽 담장 너머 낙선재 일원도 창경궁 영역에 포함되었다.

경춘전[4]

1484년(성종인물 15) 창건 당시에 건립된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때 건립되어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인물 34)에 중건한 것이 오늘날의 경춘전이다.

환경전

환경전은 창경궁의 내전(內殿) 건물 중 하나로 세자나 국왕이 생활하던 곳이며, 중종인물과 소현세자인물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성종 때(1484년)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16년(광해군인물 8)에 중건되었다가, 인조인물 2년(1624) 이괄의 난 때 불타버렸고 난이 평정되면서 곧바로 중건되었으나 1830년(순조인물 30)에 화재를 당한 후 1834년(순조인물 34)에 다시 중건되었다.

관련 스톨리텔링

고대 사건( ~1900년)

통명전과 장희빈

숙종인물 27년(1701년), 인현왕후인물 가 위독해지자 장희빈인물[8] 은 창경궁 취선당의 서전에 신당을 설치하고 무당을 청하여 인현왕후를 해치려 한 뒤 궁녀에게 인형, 참새, 쥐의 유골을 창경궁 통명전 앞뜰에 묻도록 지시하여 왕후를 저주하려 했다고 한다. 인현왕후 사후 숙빈 최씨인물 (崔氏)에 의해 고발되었다. 숙종은 직접 관련 궁녀를 심문하고, 그 뒤를 이어 이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저주사건의 주모자인 장희빈은 세자의 생모로 대신들의 반대로 즉사하지 않았으나 숙종은 결국 장희빈에게 음독 자결을 명했다.

근대 사건(1900~1945년)

대온실

1909년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대온실은 만들 때만 해도 동양 최대였다고는 하는데, 만들 당시 일제는 순종이 창덕궁을 옮긴 후 창경원으로 격하시켜, 놀이공원으로 만들면서 대온실을 건립한 것이다. 건설 목적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인물 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동물원과 함께 지어 왕의 권위를 격하시키고자 한 결과물이다. 8.15 광복사건[9] 이후에도 창경원로은 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계속 유원지로 남았고 식물원도 예전과 같이 기능했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사건[10]으로 창경원은 폐원했고, 대온실은 폭격으로 인해 일부 훼손되었다.

창경원

1909년에 일본인들이 우울함과 걱정 근심에 빠진 순종인물의 마음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궁궐에 동물을 들여왔는데,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궁궐 안 전각 일부를 철거하고는 일본식 정원과 건물을 세우고,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이 이뤄진 뒤인 1911년 창경궁의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창경궁은 1483년에 지어진 궁궐로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인물이 창덕궁 동쪽에 세웠다.1909년 11월 1일은 일본이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고 일반에 개방한 치욕의 날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은 일본 침략자에 의해 파괴가 심했다.일본은 제국의 쾌적한 시설을 빌미로 창경궁을 건설했다. 이로 인해 창경궁은 궁궐이 아닌 유원지로 바뀌어 버린다.
그러나 일본의 숨은 의도는 일본 제국의 권위를 상징하고 한국의 민족적 권리를 소멸시키려는 궁궐 파괴였다.
공사가 감행되는 동안 귀중한 문화재는 훼손되고 버려졌다. 창경궁의 화려하고 웅장했던 전각은 허물어졌고, 전각의 문이나 기와 등은 해체돼 경매에 부쳐졌다.
1983년 7월 1일부터 일반인 관람을 중단하고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마침내 그해 12월 30일에는 원래의 명칭인 창경궁으로 환원됐다.

창경궁 건설은 1908년 4월 친일 각료 이만용인물과 일본 동안부 이토인물의 지휘 아래 약 1년 6개월간 지속됐다. 일본은 먼저 창경궁에서 종묘까지 지형을 바꾸고, 지형이 바뀐 곳에 벚나무를 심은 것이 일본의 상징이다.공사 과정에서 한국의 소중한 문화재는 파괴되고 버려졌다.창경궁에서는 화려한 자수가 철거되었고, 제방의 문과 타일은 철거되어 경매에 부쳐졌다.

창경궁에서 관람할 때 고대 궁궐과는 다른 대온실의 건축양식을 보고 의아해 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창경원이 되었던 창경궁의 역사를 알고 다시 한번 창경궁을 찾게 되었는데, 처음 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필자도 일본에 침략당한 나라 출신이다. 저는 굴욕의 역사를 보여주는 건축물을 보면 감개무량하다.그러나 역사는 이미 과거이고, 이웃 나라에 대한 원한과 불만을 갖고 살아왔다기보다 착실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 과정
시기 결국 사건
1909 일본식 정원과 건물을 세웠다 일제강점기
1911 창경원 격하시켰다 일제강점기
1983 창경궁 정부는 복원공사
1984 창경궁 창경궁으로 환원됐다

참고문헌

각주

  1. 수강궁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머물던 궁이다(『세종실록』 즉위년 11월 3일). 태종 사후에는 왕실의 별궁으로 사용하였다.
  2. <서운관지> 에 “관천대는 천문 기상을 관측할 때 소간의를 그 위에 설치하므로 소간의대 라고도 한다” 는 기록이 있어 간의를 설치한 시설로 보고 있다.
  3.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밝음(양陽)은 국왕을 상징하기도 한다.
  4. 경춘전의 경춘(景春)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이다.
==창경궁 역사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