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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소개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선조가 피난지인 의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에 머물면서 행궁으로 사용하던 곳을 1611년에(광해군 3) 광해군이 처음 경운궁이라 이름 붙였다[1]. 1623년(인조 1)에는 인조반정 뒤에 인조가 경운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하였으며[2], 이후 1748년(영조 24)에는 영조가 인조의 즉위처를 확인하기 위해 경운궁에 임어하기도 했다[3]. 고종 이전까지 명례궁(明禮宮)이 자리하기도 했다.
고종대 황폐한 이곳에 새롭게 궁궐을 조성했다. 1893년(고종 30)에는 고종이 즉조당에서 선조 환도 300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을 치렀다[4]. 1896년(고종 33)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는 을미사변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한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정궁으로 삼고자 경운궁 을 영건하였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경운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자 경운궁은 황궁(皇宮)으로 격상되었다. 1907년(융희 1) 고종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된 이후 고종의 호를 덕수(德壽)로 하였기 때문에 경운궁은 덕수궁(德壽宮)으로 불렸다. 속칭 정릉동 황궁(皇宮)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고종 사후인 1921년에는 경운궁선원전(璿源殿), 순종 비의 혼전인 의효전(懿孝殿)을 창덕궁으로 이건한 뒤, 궁역 서북부가 분할·매각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사무소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장으로 석조전(石造殿)이 사용되었으며, 1948년에는 정부 수립과 광복 3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이 거행되는 등 정치의 중심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통칭되며 시민공원으로 활용되거나 음악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석조전과 그 별관은 국립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이용되면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덕수궁의 역사

덕수궁 이름의 유래와 변천사

덕수궁과 왕조와의 관계

시대 이름
조선초중기 월산대군, 선조, 광해군, 인조
조선후기 숙종, 영조, 고종, 순종

덕수궁의 건물

각 건물의 이름 유래

각 건물의 역할과 의미

각 건물의 완공과 훼손, 복원의 시기

각 건물의 건축 방법 및 특징

덕수궁에서 일어난 사건

1. 아관파천(1896년)

1895년 10월 8일에 고종은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명성왕후를 시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4개월 후인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고종은 파천 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경운궁이 수리 중이라는 이유로 환궁 시기를 늦출 뿐만 아니라 경운궁 부근에 있는 구미 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고종은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2. 대한제국 선포(1897년)

아관파천 후 덕수궁으로 온 고종은 덕수궁 내에 마땅한 법전이 없어 즉조당을 덕수궁의 법전으로 삼고 이름을 태극전으로 개명하여 사용한다.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반포하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황제에 올랐다.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낸 고종은 태극전(즉조당)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다.

3. 을사늑약(1905년)

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며 ‘을사조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하였으며, 1906년 2월 1일에는 일본 통감부를 개설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첫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이는 외교권이 강탈되고 주권을 빼앗기는, 대한제국 패망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었다.

4. 고종황제 강제 퇴위(1907년)

1905년 중명전에서 고종의 긴말한 외교적 행위가 이루어졌다. 고종은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에 대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담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하여 회담 장소에 입장하지 못하였고, 일제는 이를 계기로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적으로 퇴위시킨다.

5. 고종황제 승하(1919년)

1919년 1월 12일 고종 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함녕전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하던 공간으로, 1897년(광무 1)에 건축되어 1904년(광무 8)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중건되었다. 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고 결국 그해 3.1 운동으로 이어졌다. 고종의 죽음은 한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6.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1946년)

미·소 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 독립정부의 수립과정으로서 임시 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설립된 공동위원회이다. 1946년 1월 16일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한 예비회담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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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광해군일기』3년 10월 11일
  2. 『인조실록』 1년 3월 13일
  3. 『영조실록』 24년 1월 27일
  4. 『고종실록』 30년 10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