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U공진우
조선공진회 배경
공진회란?
사전적 의미에서 볼 때, 박람회란 “산업과 기예, 학술 등에 관한 활동의 성과를 생산품, 모형, 機構圖 등의 전시와 실연 등을 통해 일반인에게 알리는 행사”다. 이 정의에 따르면 박람회는 ‘생산품이나 모형을 전시하는 행사’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19~20세기 초 만국박람회는 그 규모가 예전에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스펙타클했고 전시된 물건도 가구⋅장신구⋅생활필수품 등을 비롯해 에디슨의 백열전구,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처럼 최첨단을 달리는 것들까지 망라했다.12) 박람회 전시장의 외형이나 시설물도 인상적이었다. 1851년 영국이 개최한 만국박람회는 하이드 파크에 건립된 수정궁(The Crystal Palace)에서 열렸는데, 벽과 지붕이 유리로 뒤덮혀 있었고 축구장 18개를 합쳐 놓은 것과 같은 규모였다.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장에는 잘 알려진 에펠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조선공진회 개요
조선공진회 전시품목
부서명 | 전시품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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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부(農業部) | 오곡(五穀), 연초, 인삼, 대마(大麻), 과실, 채소, 양잠, 가축, 비료, 농구, 농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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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식부(拓植部) | 이민 모집, 배치, 보호, 감독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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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업부(林業部) | 종자, 묘목, 목탄, 과실, 수액, 임산물 제조방법 및 성적, 조림, 삼림보호 방법 및 성적, 벌목, 운재(運材), 제재(製材), 저재(貯材)의 방법 및 성적, 임업용 기구·기계로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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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업부(鑛業部) | 광물 및 광산물, 석재(石材) 및 토석지질(土石地質)의 표본, 광업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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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부(水産部) | 수산물 제조법, 채취법, 어로 방법 및 장치, 어선과 기타 설비, 어구 원료 및 제작기구, 양어지(養漁地) 설비, 양식법, 수산물 제조, 번식보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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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부(工業部) | 분 항목이 가장 세분화되어 있다. 여기에는 직물류에 관한 사항, 자기류, 광물의 세공법, 종이류, 가죽제품, 인쇄 및 사진, 주정(酒精), 과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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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敎育部) | 학교 분포, 교사의 설비, 교과서 및 교수용구, 교수훈련의 방법 및 성적, 교육에 관한 조사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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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土木) 및 건축부(建築部) | 철로의 개설과 수축 계획 및 성적, 항만 수축 계획 및 성적, 수도·하수의 계획 및 성적, 철도시설의 계획 및 성적, 수륙운송(水陸運送) 방법 및 성적, 교통 및 항로표식에 관한 시설 및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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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經濟部) | 은행, 금융조합, 회사, 조합, 시장 등의 경영 방법 및 성적, 토지조사 계획 및 성적, 화폐, 도량형기 및 보급 성적, 각종 산업의 생산액 및 자본액, 무역, 재정 및 금융, 물가, 금리 등에 관한 것 등으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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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혜구제부(慈惠救濟部) | 의료기관의 분포, 병원 설비 및 의료용구, 소독소, 전염병 예방에 관한 시설 및 성적, 공중위생에 관한 시설 및 성적, 위생에 관한 조사와 통계, 자혜구제사업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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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警務) 및 사옥부(司獄部) | 경무에 관한 시설 및 성적, 민적(民籍), 감옥의 경리 및 성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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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및 고고자료부(考古資料部) | 미술품과 고고자료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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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된 품목들은 조선에서 생산된 물품 뿐만 아니라 일본의 생산품으로서 한국민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품목과 외국의 수입품 중에서 판로 확장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품목들이 추가로 전시되었다. 동시에 공진회에는 산업, 교육, 위생, 토목, 교통, 경제 등에 관한 시설 및 통계를 망라한다는 원칙 하에 전시되었다.
조선공진회와 경복궁
무력으로 조선을 점령한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선전활동의 수단으로 공진회·박람회 등의 전시행사들을 활용하였다. 이 중에서도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이하 조선공진회로 표기)는 최초의 공식 박람회로서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지 5년째 되는 해인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까지 약 50일간 개최되었고, 전시장소는 바로 조선왕조 통치의 핵심공간인 ‘경복궁’이었다. 일제는 조선물산공진회를 빌미로 근정전을 비롯한 궁궐의 주요 전각 몇 군데만 남기고 무수한 건물들을 헐어냈다. 이후 1926년도에는 건물들을 헐어낸 자리에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서게 된다.[2]
조선물산공진회는 조선 각도의 물산품을 전시하여 식민지배 하에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리는 목적과 더불어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조선을 일본에 홍보하여 일본 기업과 일본인들을 조선으로 유치하고자 하는 이른바 '식민(植民)'의 선전장 역할을 하였다. 공진회 규모는 5,226평으로서 주요 전시관은 제1진열관, 제2진열관, 미술관, 기계관, 근정전 회곽, 철도국 별관 등이 있었으며 전시물로는 각종 산업에 대한 물품을 망라하고 외국품도 조선의 산업상 필요하다 인정하는 물품을 출품하였는데 각 전시관을 통틀어 4,655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3]
일제는 경회루에 매점과 음식점을 만들고 경복궁 내에 가건물 축사를 지어 소, 닭, 돼지까지 전시하였으며 야간에도 관람객의 입장을 자유롭게 하여 경복궁을 하나의 유흥 장소로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일제는 대내외적으로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통성과 존엄성을 모두 짓밟은 것이다.
참고 문헌
- 이동훈,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와 1910년대 식민지 조선, 韓日民族問題硏究, 2021, 40(1): 55-86.
- 최병택,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물 선정 및 배치에 나타난 특징, 교육논총, 2019, 56(1): 136-156.
- 최병택,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 나타난 식민 권력의 이미지 구축 시도 - 미술관 전시를 중심으로, 탐라문화, 2020, 63(0) : 121-154.
참고 사이트
각주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물산공진회 항목 참조
- ↑ 이동훈,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와 1910년대 식민지 조선, 韓日民族問題硏究, 2021, 40(1): 55-86.
- ↑ 최병택,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물 선정 및 배치에 나타난 특징, 교육논총, 2019, 56(1): 136-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