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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이란 정보기술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문학의 주제를 계승하면서 연구 방법 면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연구, 그리고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시도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성격의 인문학 연구를 포함한다. 단순히 인문학의 연구 대상이 되는 자료를 디지털화 하거나, 연구 결과물을 디지털 형태로 간행하는 것보다는 정보 기술의 환경에서 보다 창조적인 인문학 활동을 전개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소통시킴으로써 보다 혁신적으로 인문 지식의 재생산을 촉진하는 노력이다.[1]
위 설명이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설명이다. 3주 정도 미디어 위키 작성 방법을 배우면서 새로움을 느꼈다. 미디어 위키는 디지털 인문학을 표현하는 수단 중에 하나일 뿐이고 또 다른 여러 수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러 방식 중 하나를 배우는데도 새로움을 느꼈다. 지금도 디지털 매체는 발전하고 있으니 현재 존재하는 수단 외에도 다른 방식이 나타날 것이다. 인문학의 한 축을 배워왔지만, ’인문학‘이라는 것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 ’디지털 인문학‘은 솔직하게 버거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 편, 누군가는 ’인문학‘이 모든 것의 토대라고 말하지만, 현재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 중 졸업 후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디지털 인문학은 이러한 걱정들을 다소 해소해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디지털과 인문학의 결합을 통해 ’옛 것‘이라는 다소 편견적인 인문학의 이미지도 조금은 벗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인문학은 계속해서 ’배움‘을 요구할 것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아있는 것을 연구하는 이가 많다. 또, 누군가에게 배우는 방식보다는 사유하는 방식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디지털 매체는 끊임없이 발전한다. 새로운 것이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고, 뒤처지지 않으려면 그것들을 계속해서 공부해야한다.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을 연구하고, 사유하고, 이를 남기기 위해 새로운 방식들을 계속해서 공부하는 것. 어쩌면 디지털 인문학은 디지털과 인문학을 합친 것이 아니라 ’인문학‘이 추구하는 것의 모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창경궁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으로, 1418년세종 즉위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었다.[4] 창경궁의 역사는 1482년성종 13년 창덕궁의 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대비전의 세 어른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폐허처럼 남아 있던 수강궁 수리를 명하면서 시작된다.[5] 이때의 확장공사는 1484년성종 15년에 명정전·문정전·통명전 등 주요 전각을 완공하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되었으며, 그에 즈음하여 이름도 창경궁으로 새로 지었다.[6] 이듬해 보완공사를 거쳐 궁궐다운 규모를 갖추게 된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기능을 일정 부분 보완하는 궁궐로서 자리잡게 된다. 즉, 창경궁은 궁궐로서 독립적인 규모를 갖추기는 했으나 당시에 왕이 기거하면서 정사를 보는 궁궐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창경궁은 이후 크고 작은 화재와 수리가 이어졌다. 그 역사는 아래 표와 같다.

창경궁의 소실과 재건
년도 내용
1418년(세종즉위년) 상왕전(태종)신궁으로 수강궁 영건
1483년(성종 14년) 수강궁터에 창경궁 영건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
1616년(광해군 8년) 명정전, 문정전, 환경전, 인양전, 공사청, 홍화문 등 중건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시 저승전 소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등 소실
1633년(인조 11년)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함인정 등 중건
1670년(현종 11년) 건극당 건립
1777년(정조 원년) 자경전 건립
1779년(정조 3년) 월근문 건립
1790년(정조 14년) 통명전 화재
1830년(순조 30년) 환경전 화재로 함인정, 경춘전, 숭문당, 영춘헌, 오행각, 빈양문 소실
1834년(순조 34년) 통명전, 경춘전, 환경전, 여휘당 등 중건
1857년(철종 8년) 선인문, 동북소, 부장청, 위장소, 주자소의 대청과판당 등 60여칸 화재
1877년(고종 14년) 창경궁 수리
1909년(순종 2년) 창경궁내 동ㆍ식물원 개설
[7]

창건 이후 소실과 복원을 반복하다가 1907년 순종의 즉위 이후 창경궁의 위상은 떨어지고만다. 순종은 즉위하자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 일을 계기로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을 헐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개원하였다. 심지어 1911년 궁궐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궁궐이 갖는 상징성을 격하시켰고, 궁을 개방하여 유원지로 이용되었다.
현재 창경궁에는 정문 영역의 홍화문과 옥천교가 있고, 외전 영역으로 동쪽의 명정문과 서쪽의 빈양문을 경계로 명정전·문정전·숭문당이 있으며, 내전 영역으로는 함인정·경춘전·환경전·통명전·양화당·영춘헌·집복헌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창덕궁에 속한 부용지 일대까지 아우르던 후원 영역에는 춘당지와 관덕정, 그리고 일제 때 세워진 식물원이 남아 있다.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은 사도세자의 비극이나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왕비 자리까지 올랐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장희빈 사건의 무대도 창경궁이었다.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조선박람회’

경복궁에서 1929년 가을에 개최되었던 조선박람회는 일본제국의 서양제국 따라 하기의 결정판이며, 위에서 열거했던 박람회를 통해 축적된 문화통치의 세련된 노하우가 총동원된 공간이었다. 일본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인 고다마 히데오, 두 사람은 마치 사전에 짠 각본처럼 한목소리로 제국과 식민지는 단순한 사회경제적 협력과 물질적인 발전에 만족하지 말고 같은 문화적⋅심성적인 세계관을 단련함으로써 근대화라는 더 높은 수준에 함께 도달해야 하는 공동운명체라고 못 받았다. 피식민지 조선인을 더 계몽된 조선인으로 개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 같은 조선인'으로 근본적으로 탈바꿈시키려는 것이 문화통치의 최종적인 목표였고 조선박람회는 그 결정적인 수단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던 것이다.[8] 당시 소위 양대 민족일간지였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조선인들에게는 실속이 없고 부정적인 영향만 남긴 마뜩잖은 공공 행사였다고 입을 모았다. “뎐당(典當)을 내어서라도 박람회 구경을 가라. 구경을못한 사람은 수치다”라는 식민지 공무원의 감언이설과 강제모집에 지방 사람은 “울면서 겨자 먹기로 부득이 승낙”하고 돈놀이 업자에게 여행비용을 빚졌다.[9] 또한, 그 구경꾼들이 숙박료와 기념품 구매 등으로 지출했던 돈은 영세한 조선 상인보다 “육백 배 우세”하게 일본 자본가의 주머니로 들어갔다.[10]
더욱 분명한 것은 많은 조선 지식인 눈에는 옛 왕궁인 경복궁을 무대로 삼아 휘황찬란하게 펼쳐진 박람회장은 ‘가짜 조선’이 창출되고 ‘진짜 조선’이 쫓겨나는 장소로 비쳤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 기자이자 소설가이면서 ‘30세 백수’로 자처했던 염상섭은 “조선박람회는 단지 이름 뿐이며, 그 내용물은 확실히 조선의 것, 조선사람의 솜씨는 아니다.”라고 갈파했다.[11]
박람회 기간을 ‘즉석 연애’ 상품을 팔 절호의 기회로 삼아서 등장한 이상한 명칭의 ‘직업녀성들’스틕껄, 마네킹껄, 키스껄 등을 소개하는 기사들도 눈길을 끌었다. 일부 박람회 여간수(女看手)들이 낮은 일당을 벌충하기 위해서 “일금 오십전에 키스를 팔다가 내여쫏긴 여자”에 관한 단신은 독자들의 천박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박람회 기간에서 첫선을 보인 ‘키스껄’은 “녀자들의 직업으로는 꾀 빗싼 직업”으로서 이 신종직업이 “장차로 번식될” 것이라는 부추김으로 황색 저널리즘의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12]. 조선박람회 입장료가 성인 30전이고,“아츰 아홉시부터 저녁에는 여섯시 일곱시에 나오게 되”는 “림시하는 일이라고 퍽 만히 준다는” 박람회 여간수 일당이 1원 내외인데, ‘키스껄’은 한 번 ‘봉사’로 50전을 받았다. [13]
이러한 조선박람회는 ‘식민지 근대성’의 필요성과 합법성을 조선인들에게 불어넣고 이들의 능동적인 협력을 끌어내려는 ‘근대의 자원병’을 환영하는 놀이동산이었다. 동시에 ‘근대’ 그 자체는 찬성하더라도 일본제국의 깃발 아래에서 행진하기를 거부하는 ‘반제국주의적 탈영병’의 운동장이기도 했다.[14]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1. 첫 화면에 나오는 자료가 어떤 내용인지 간략한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
    • 홈페이지의 첫 화면은 홈페이지를 방문한 이가 가장 열심히 보는 화면이다. 자료 사진과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글자 외에 모서리 부분에 이 자료를 왜 메인으로 걸었는지를 설명해준다면 본격적으로 국채보상운동 페이지를 둘러보기 전에 흥미를 끌 수 있을 것이다.
  2.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가치라는 문구가 중심이 되는 것보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가 중점이 되는 문구가 필요하다.
    • 첫 화면, 스크롤을 내려 넘어온 다음 화면에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가치’라는 문구가 이목을 끈다. 하지만, 우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보고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알아보러 온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라는 명예보다는 우리 민족이 이끈 ‘국채보상운동'의 대단함이 중점이 되는 문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3. 콘텐츠 보기의 구조가 아쉽다.
    • 첫 번째 이야기를 본 후 다음 이야기를 보려면 스크롤을 다시 올려서 두 번째 이야기를 클릭해야한다. 이것보다는 가장 아래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UI를 넣어주는 것이 더 편리할 것이다.
  4. ebook 검색
    • ebook 검색에 들어가보고 어떤 검색어를 넣어도 검색 결과가 없다. 이는 ebook 자료 자체가 홈페이지에 없거나, 검색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자료가 없다면 채워야하고 작동하지 않는다면 수정이 필요하다.
  5. 전문검색에서 볼 수 있는 자료들 중에 원문보기, 해석 보기를 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 아직 만들어가는 중이라고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행이 된 자료들을 확실하게 올리거나 아직 해석을 못한 자료에는 미리 표시나 공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육영수. (2020). 일본제국의 국제·식민박람회 사용법 -1910년 일본-영국박람회와 1929년 조선박람회 사례를 중심으로-. 서양사론, 146(0), 122-153.
[네이버 지식백과] 창경궁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초판 2004., 5쇄 200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한미자, 김성철, 유홍준, 최세정, 정용기)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주석

  1. 김현.(2013).디지털 인문학.인문콘텐츠,(29),9-26.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4.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1월 3일 기유 4번째기사 / 완공된 상왕전의 신궁을 수강궁이라고 하다
  5. 성종실록 149권, 성종 13년 12월 28일 임진 2번째기사 / 사간 유자한 등이 《대전》에 관해 차자를 올리다
  6. 성종실록 172권, 성종 15년 11월 4일 정해 1번째기사 / 영중추부사 이극배가 창경궁 건립의 뜻을 써서 서(序)하도록 청하다
  7.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
  8. 강만길 외,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선인, 2004) 참조.
  9. 「고리여비 차용케하고 박람회관광단 강제모집」, 동아일보(1929. 11. 4)
    「뎐당(典當)을 내어서라도 박람회 구경을 가라」 조선일보(1929. 10. 12)
  10. 「전 조선 상대의 상업자 일본인이 육백배 우세」, 조선일보(1929. 10. 26)
  11. 육영수. (2020). 일본제국의 국제·식민박람회 사용법 -1910년 일본-영국박람회와 1929년 조선박람회 사례를 중심으로-. 서양사론, 146(0), 122-153.
  12. 「키쓰찔의 출현」, 조선일보(1929. 9. 22)
  13. 남촌(南村)을 차저 고용사리하는 이들(2): 시일짜른 박람회녀간수」,조선일보(1929. 9. 22).
  14. 육영수. (2020). 일본제국의 국제·식민박람회 사용법 -1910년 일본-영국박람회와 1929년 조선박람회 사례를 중심으로-. 서양사론, 146(0), 122-153.
  15.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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