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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이란
먼저,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말은 정보기술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디지털로 표현하고 소통하는 시대에서 인문학적 지식이 더 의미 있게 연구되고 잘 활용되도록 도움을 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러한 디지털 인문학은 단순히 인문학 연구 자료를 디지털화 하거나, 연구 결과물을 디지털 형태로 간행하는 것을 넘어 정보기술의 환경에서 인문학 활동을 전개하고, 인문학적 지식을 재생산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미국의 MIT(메사추세츠 공대)에서 수행하는 'Visualizing Cultures'라는 프로젝트는 이미지가 이끄는 학술을 표방하는 디지털 환경의 인문 교육 교재 개발 사업이다. 역사적 사실에 관한 그림, 사진 등의 이미지 자료를 디지털 영상으로 제작하고, 영상 자료에 담긴 지식의 모티브를 찾아 학술적 설명을 부가하는 방법으로 시각적인 스토리텔링을 구현한다. 저작물은 모두 월드 와이드 웹을 통해 공개되고 MIT의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활용되며 이 컨퍼런스를 통해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담은 멀티미디어 데이터베이스 등 시각적인 자료를 제공한다.[1]
디지털 인문학의 필요성
인문학에서 고전문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해당 분야의 연구자료를 모두 파악해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만큼, 그 자료의 양이 방대해졌다. 디지털 인문학은 이러한 점에서 연구자들의 시공간적 제약을 덜어준다. 뿐만 아니라, 최근엔 인문학 연구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등 새로운 연구의 방향도 제시해준다. 또, 디지털 인문학을 통해 대중들은 기존에 학자들이 독점하던 전문적인 지식들에 대해 더 빠르고 쉽게 습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직접 생산할 수도 있게 되었다. 즉, 이 디지털 사회에서 지식의 공동 생산과 고동 이용 과정을 통해 사회의 협업을 보여줄 수 있고, 보다 효율적인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방대한 인문학적 자료를 정보 기술을 통해 함께 정리, 연구, 생산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인문학의 필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과제
그렇다면, 순수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디지털 인문학에서 앞으로 무엇을 담당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먼저, 디지털 인문학은 학제적인 연구가 요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전문헌 속 방대한 데이터를 잘 조합하고 편집해서 보다 잘 응용할 수 있는 디지털 콘텐츠를 생산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인문학 전공자로서 문화산업계의 지식 수요를 예측하기 위한 연구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인문학적 지식을 디지털 콘텐츠로 재생산하는 기술적인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인문학은 인문학과 문화산업계 모두에 선순환을 가져다 주는 만큼, 인문학의 가치 있는 연구와 사회적인 수요에 따른 콘텐츠의 생산 과정 모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각종 논문 사이트 등 디지털 인문학 자료들을 실질적으로 활용하는 학생으로서, 현재 존재하는 디지털 인문학 자료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대중들이 이용하는 과정에 오류 사항은 없는지도 관심 갖고 점검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창덕궁)
창덕궁의 이름
1405년 태종이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 지었다.[2] 또,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1903년 12월 30일에 창덕궁 후원을 관장하는 기구로 비원(祕苑)을 설치하고 난 뒤 비원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고종 광무 연간을 넘어 순종 융희 연간에 들어가면서부터 비원이라는 명칭은 창덕궁 뒤편의 원유 자체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일제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을 비원이라 하며 일반인들을 끌어 들여 관광지 놀이터로 삼았다. 해방 이후에도 몇십 년이 넘도록 지속되어 창경궁이라는 명칭 대신 비원만이 남았다. 현재는 창덕궁을 비원이라고 부르는 일이 많이 줄었지만, 비원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어른들 사이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3]
창덕궁의 역할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더 많이 쓰인 궁궐이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이궁으로, 조선 전기의 약 200년 동안 왕의 통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소실된 도성 내 궁궐 중 가장 먼저 중건되며 이후 약 250년 동안 조선 왕조의 정궁 역할을 했다.[4]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과 양궐 체제를 이루었고, 조선 후기에는 경희궁과 양궐 체제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兩闕體制)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 1868년(고종 6년)에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창덕궁이 정궁의 지위를 잃었다.
관련 역사
연도 | 왕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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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년 | 태종 5년 | 조선의 이궁으로 건설 |
1406년 | 태종 6년 | 후원 조성 |
1411년 | 태종 11년 | 금천교 건립 |
1412년 | 태종 12년 | 돈화문 건립 |
1456년 | 세조 2년 | 사육신 사건 |
1461년 | 세조 7년 | 각 전당들에 이름을 지어 붙임 |
1462년 | 세조 8년 | 민가 73가구를 철거하여 후원 확장 |
1468년 | 예종 즉위 | 수강궁 중문에서 즉위 |
1494년 | 연산군 즉위 | 인정문에서 즉위, 후원을 꾸밈 |
연도 | 왕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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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 선조 25년 |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에서 피난길을 떠나 의주로 파천, 경복궁과 창덕궁 등 모든 궁궐이 소실됨 |
연도 | 왕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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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 광해군 2년 | 창덕궁 중건을 완료하여 정궁으로 삼음 |
1623년 | 광해군 15년 |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의 대부분 궁궐 전각들이 소실됨 |
1636년 | 인조 14년 | 옥류천 주변에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건설 |
1647년 | 인조 25년 | 인조반정으로 소실된 건물 중건(선정전,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등) |
1649년 | 효종 즉위 | 인정문에서 즉위 |
1659년 | 현종 즉위 | 인정문에서 즉위 |
1674년 | 숙종 즉위 | 인정문에서 즉위 |
연도 | 왕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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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년 | 숙종 30년 | 후원에 대보단 건설 |
1724년 | 영조 즉위 | 인정문에서 즉위 |
1749년 | 영조 25년 | 대보단 중수 |
1776년 | 정조 즉위 | 2층 누각을 세워 위층에는 주합루, 아래층에는 규장각이라 함 |
연도 | 왕조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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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 순조 즉위 | 인정문에서 즉위 |
1803년 | 순조 3년 | 인정전 소실 |
1804년 | 순조 4년 | 인정전 재건 |
1833년 | 순조 33년 | 대조전, 희정당 등 소실 |
1834년 | 순조 34년 | 대조전, 희정당 재건 |
1849년 | 철종 즉위 | 인정문에서 즉위 |
1863년 | 고종 즉위 | 인정문에서 즉위 |
1882년 | 고종 20년 | 창덕궁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남 |
1884년 | 고종 22년 | 창덕궁 관물헌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남 |
연도 | 왕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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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 - | 경술국치 |
1917년 | 순종 11년 | 대 화재로 침전 건물 소실 |
1920년 | 순종 14년 | 경복궁의 일부 건물을 옮겨 창덕궁 건물 재건 |
1926년 | 순종 20년 | 대조전에서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 |
1990년~1999년 | - | 대규모 복원 사업(돈화문 월대, 낙선재 일대, 진선문, 숙장문 등) |
1997년 | - |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
주요 건축물
먼저, 창덕궁의 주요 건축물로는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 인정전, 숙장문,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등이 있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이며 문이라는 기본적인 기능과 더불어 이곳이 궁궐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므로 화려하게 단청된 이층집으로 지어졌다. 남쪽으로 길게 뻗은 두 단의 월대(月臺)위에 서 있다. 문 좌우로 궁궐 문을 지키는 수문장청(守門將廳)을 두었으며 돈화문 월대 앞에는 임금이 가마를 탈 때 딛고 올랐던 노둣돌이 두 개 놓여있고, 가마를 올려 놓는 목마 두 개가 버티고 있었다. 계단을 밟고 월대에 오르면 임금의 길인 어도(御道)가 돈화문까지 한가운데로 뻗어있다. 돈화문은 종을 궁문에 달아 놓아 새벽에 종을 울려 신하들의 조회하는 일을 엄격히 했다.[5]
진선문은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마당을 감싸고 있는 서쪽 문인 중정문으로, 1405년(태조 5) 창덕궁 창건 때 건립되어 돈화문보다 건립 시기가 이르다. 또, 법전인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가기 위한 중문이며 인정문(仁政門), 숙장문(肅章門)을 포함한 행각으로 둘러싼 중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전의 조정 마당이 예제(禮制)의 중심 공간이라면 인정문 밖에 마련된 이 마당은 주된 행례의 행위를 위한 마당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정 마당이 신성성을 가진다면 이 마당은 추국(推鞫)하거나 벌주는 장소로, 그 외 국정을 처리하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6] 진선문 마당에는 내병조(內兵曹), 전설사(典設司), 상서원(尙瑞院), 호위청(扈衛廳) 등 문을 지키는 부서와 그 부속실들이 행각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진선문 앞에는 신문고를 달아 억울한 사연을 듣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또 왕이 죄인을 벌할 때도 이곳 진선문 안마당에서 친히 신문(訊問)하였다.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삼문, 내외5포로 구성된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어 3칸 중 가운데 칸은 15척, 좌우 협칸은 13척의 규모이고 문의 좌우에 행각이 연이어 놓여 있다.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 현종, 숙종, 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한 후 왕위에 올랐다. 이처럼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건물은 앞면 3칸과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 천장,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인정문은 정전 문루로서 창덕궁 인정전 영역의 입구를 구성하며, 오일조참(五日朝參)에서 왕의 어좌가 놓이는 자리였다. 조참 시에 문무백관은 인정문과 진선문 사이의 마당에 서며, 조참 이전의 문외위는 진선문 바깥에 구성된다. 조참 시에 왕은 선정전에서 의관을 갖추고 대기하다가 선정전 서쪽의 인화문(仁和門)을 통해 인정전 마당을 거쳐 인정문으로 나아갔다.[7]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법전)이며 '인정(仁政)'은 '어진 정치'라는 뜻을 갖는다. 법전은 왕의 즉위식, 결혼식, 세자 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 중요한 건물이다. 인정전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부르며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문무관으로 각각 18품계를 새겼다. 품계석의 동편에는 문관, 서편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서는데, 문관은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반, 무관은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반이라고 부른다.[8] 인정전 내부 정면에는 왕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또,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와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박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 변화가 일어났다.
숙장문은 창덕궁의 여러 문 중에서 따로 이름이 없는 것에 대해 서거정(徐居正)에게 이름을 짓게 했고, 이 중 창덕궁의 좌달문(左闥門)에 대해 숙장문이라고 이름 붙여지며 1475년(성종 6년)에 처음이 이름이 등장했다.[9] 측면 칸 2칸과 정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쪽에는 13칸의 행각이 있는데 이곳에 배설방(排設房)을 두었다.[10] 오늘날의 숙장문은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순종이 즉위한 후 1907년 인근에 창덕궁을 사용하면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숙장문과 진선문을 철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정전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며 '선정(宣政)'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을 갖는다. 선정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므로 다른 전각들과 달리 지붕이 청색 유리기와로 덮은 청기와이며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집이다. 1471년(성종 2년) 9월 12일에는 왕이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고 이틀 후 14일에 중전이 이 선정전에서 양로연을 행하기도 했다.[11] 지금의 선정전은 인조 25년(1647)에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에 세웠던 ‘인경궁(仁慶宮)’의 광정전을 헐어다가 중건한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목조 건물이다. 선정전에서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할 때 사관이 임금의 좌우에서 회의 내용을 기록한 것을 사초(史草)라고 하며 이 사초를 토대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한다.
희정당은 원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임금님의 집무실로 사용했다. 연산군 2년(1496)에 숭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12]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재건했으며 지금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1920년에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11칸과 옆면 4칸으로, 한식 건물에 서양식 실내 장식을 하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앞면 9칸과 옆면 3칸을 거실, 주위는 복도로 사용했다. 앞면 9칸 중 3칸은 응접실이며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마차나 자동차가 사용되면서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생겼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설비되는 등 서양식 구조도 채택되었다. 즉, 희정당은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되어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조전은 중전이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으로 여겨지는 건물이다. 대조전에서는 성종, 인조, 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했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와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재건했다. 1917년 화재를 당해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 '대조전'이라는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13] 수차례에 걸쳐 재건되었기에, 건물과 주변의 부속 건물들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현재 대조전은 36칸으로 앞면 9칸과 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중전, 대비의 평소 일과 루틴)
"중전의 인생은 화려하다기보다 살얼음판 같았다.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에서 그리고 가문과 왕실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 속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했다. 계유정난, 단종의 폐위, 두 차례의 반정 등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변수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장자가 아닌 차남이나 손자의 즉위, 여기에 더하여 후궁 소생의 왕들이 즉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의 세자빈과 같이 세자가 교체되는 바람에 대군 부인으로 강등된 사례도 있고, 인수대비로 널리 알려진 성종의 어머니는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자빈의 지위를 잃기도 했다."[14]
따라서 중전과 대비의 궁중 생활과 생활 공간을 알아봄으로써 그들의 평소 생활 모습에 대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궁중 생활
조선시대 중전들은 10대 초반이라는 매우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궁궐에 들어오며, 이때 친정에서 유모와 몸종 등 자신의 수발을 들어줄 개인 종을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이들은 훗날 중전이 정치적 존재로서 여러 가지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어려운 부탁을 하는 상대가 된다. 따라서 중전의 궁중 생활에서 궁궐 내 여성들, 즉 대비나 후궁, 궁녀들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대체로 조선시대의 중전들은 일반 사대부가와 민가 출신들로서 왕실 구성원이 되었으므로 궁중생활의 위계질서 속에서 처신하는 것이 중요했다. 왕실 여성에 대해서는 왕과 왕실어른에 대한 순종과 인내라는 유교적 덕목은 왕실의 구성원이 되는 순간부터 아이를 낳고 기르며 여생을 마칠 때까지 지켜야 하는 신조였다. 따라서 왕실 여성들이 거주하던 궁궐 내에서의 삶은 화려함이나 장엄함이라는 외관상의 이미지보다는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 중전, 세자빈, 후궁 등의 순으로 이어지는 왕실 여성의 상하 위계질서 속에서 이뤄졌다.
중전은 외명부와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며, 내외명부의 인원들이 하극상을 벌이지 않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관리 및 감독하는 일을 했다. 예컨대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는 후궁을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아이를 양육하도록 허락하는 등 내외명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동시에 중전으로서 매년 50회가 넘는 국가 제사와 잔치를 직접 주관해야 했다. 중전이 주관한 행사로는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회례연, 80세 이상 노인 200명을 초청해 음식을 대접하는 양로연, 내외명부 여인들과 함께 뽕잎을 따는 침잠례 등의 국가행사이다.[15]
중전이 대비가 되면 정치적 세력이 가장 커지게 된다. 왕이 죽거나 정변이 일어나면 옥쇄는 임시적으로 대비의 소유가 된다.
정변에 성공하더라도 옥쇄를 대비에게 먼저 주고 승인을 받아야만 왕이 될 수 있었다. 대비는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도 했는데, 6명의 대비(정희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인순왕후 심씨, 정순왕후 김씨, 순원왕후 김씨, 신청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통해 나라를 다스렸기에 조선왕조 전체 기간 중 8분의 1이 수렴청정 기간이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대비의 수렴청정이 가능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여자가 왕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될 수 없는 여성이 어린 왕을 보호하고 조력함으로써 왕위 찬탈과 역성혁명을 방지하도록 한 것이다.[16]
생활 공간
중전이라는 말의 기원은 왕비의 거처인 교태전이 경복궁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따라서 왕비가 있는 곳을 중궁전, 왕비를 중전마마라고 부르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왕비가 거처하는 장소에 따라 왕비전, 중궁, 중전, 내전이라고 불렀기에[17] 중전에게 생활 공간은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중전은 궁궐의 중심부에서 생활했으나 왕과 중전의 생활공간은 격리되어 있어서 경복궁의 교태전은 국왕의 침전인 강녕전 뒤에 위치했으며, 창덕궁의 경우도 국왕의 침전인 희정당 뒤에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이 있었다. 중전의 생활공간에는 여러 명의 중전들이 함께 거처했으므로 여성들만의 독특한 공간을 유지했다.
조선시대 인조 이전에는 대부분의 대비가 왕부부와 함께 살지 않아, 중전이 궁중의 내치를 담당했으나, 인조 이후에는 인목대비를 시작으로 대비들이 모두 국왕과 궁궐에서 함께 살았다. 이처럼 궁궐에 대비나 대왕대비가 존재한 경우, 중전의 사생활도 그만큼 제약을 받았다. 예컨대 연산군의 생모폐비 윤씨의 사례는 대왕대비, 대비에게 착한 며느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경우, 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종비 윤씨가 폐위되는 과정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했지만,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을 때 살아있던 대왕대비 윤씨와 인수대비 한씨와의 불화와 갈등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조선 초기 중전의 생활공간은 궁궐에서 교외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태종비 원경왕후, 세종비 소헌왕후, 세조비 정희왕후를 비롯해 많은 중전들은 궁궐 내부에만 거처하지 않고 국왕과 함께 각종 행행에 나서거나 조상의 묘나 친가 등을 수시로 방문했고, 이때 중전의 행차도 국왕과 같은 규모로 이루어졌다. 또, 소헌왕후는 1446년 3월에 수양 대군 제택에서 서거했다. 중전이 궁궐 밖에서 죽었다는 것은 조선 초기 중전들의 궁궐 내 생활공간이 생각보다 넓은 영역까지 포함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정희왕후는 왕과 함께 교외로 나가 사냥에 참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의례적 변화에 의해 궁궐 내 활동 공간에도 변화가 있었다. 조선시대 중종대부터는 사림세력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면서 왕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이 점점 궁궐 내부로 축소되었다. 성종초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 예종비 안순왕후 한씨가 왕실에 어른으로 생존할 때는 궁궐 내 내명부 여성들의 거주공간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성종이 즉위하면서 세 명의 대비는 경복궁과 창덕궁에 시어소를 마련해 두 곳을 이어하면서 살았다. 정희왕후가 8년 동안의 수렴청정 끝에 자신의 전각을 성종에게 침전으로 내주며 수강궁으로 물러났고, 대비의 생활공간을 위한 창경궁을 영건한다. 이때 창경궁은 대비의 궁궐로, 내외명부들이 모여 연향을 치르고 대비전에 하례를 올리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18]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첫째
사이트에 들어가 상세보기 메뉴를 클릭하면 X, 국채보상운동, 검색, 아카이브 이용 방법 부분과 아카이브 검색, 의연금 검색, 콘텐츠 보기, 전문 검색 부분을 구분하는 선이 어긋나 있다. 왼쪽에 개인정보처리방침, 저작권 정책, 유관사이트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 부분과 동일한 크기로 칸을 나누면 사용자들이 사이트를 보다 편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아카이브 검색, 의연금 검색, 콘텐츠 보기, 전문 검색 부분의 글자 색이 연하게 느껴져 강한 색감을 주는 등 새로운 페이지로 연동된다는 표시를 명확하게 하면 좋을 것 같다.
둘째
의연금 검색을 클릭하면 '지역으로 검색하기'와 '인물로 검색하기'라는 두 가지 항목이 뜬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클릭하면 지역, 인물, 직업, 해외 의연금으로 검색하기와, 통계 확인하기라는 총 5가지의 분류가 나온다. 사용자가 지역과 인물 외에 다른 항목으로도 빠르게 검색할 수 있도록 이 5개의 항목이 모두 한 화면에 나오도록 배치하면 더 좋을 것 같다.
셋째
사이트의 제일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Follow us'항목에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아이콘을 클릭할 수 있는데, 인스타그램 아이콘을 클릭하면 링크가 잘못되었거나 페이지가 삭제되었다는 메시지가 보인다. 따라서 이 사이트에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다면 해당 아이콘을 제거하거나, 새로운 인스타그램 계정을 개설해야 할 것이다.
넷째
국채보상운동 메뉴 중 콘텐츠 보기가 있는데, 첫 번째 이야기로 최초의 국민모금운동, 국채보상운동부터 다섯 번째 이야기까지 볼 수 있다. 각 이야기로 들어가면 해당하는 세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본문이 양쪽 정렬로 정리된다면 사용자가 사이트를 이용하기에 앞서 가독성이 훨씬 높아질 것이라 예상한다. 일부만 정리되지 않은 것인 줄 알았는데 모든 이야기의 전문이 왼쪽 정렬로만 설정되어 각 줄의 오른쪽 부분이 깔끔하지 않아 보기 불편한 것 같다.
다섯째
사이트의 '1907 KOREA'라는 항목을 클릭해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다시 사이트의 홈으로 돌아오기가 번거롭다. 따라서 '1907 KOREA'라는 페이지 왼쪽 상단 아이콘에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페이지뿐만 아니라 원래 홈이었던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로 연결되는 바로가기 아이콘을 추가하면 더 좋을 것 같다.
여섯째
사이트의 'ebook 검색하기'라는 항목을 클릭해도 이에 관한 내용이 존재지 않고, 검색하는 방법을 한 번에 알기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내용이 없는 'ebook 검색하기' 페이지는 제거하거나 추가 설명을 통해 사용자들의 이용을 용이하게 해야 할 것 같다.
참고 문헌
- ↑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Visualizing Cultures
- ↑ 『태종실록』 5년 10월 25일
- ↑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하』, 눌와, 2017.
-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팀
- ↑ 『태종실록』 12년 9월 15일
- ↑ 『태종실록』 9년 10월 1일
- ↑ 『현종실록』 10년 1월 21일
- ↑ 『정조실록』 1년 9월 6일
- ↑ 『성종실록』 6년 8월 23일
- ↑ 서울학연구소, 『궁궐지』, 1994.
- ↑ 『성종실록』 2년 9월 12일
- ↑ 『연산군일기』 2년 12월 8일
- ↑ 『순종실록부록』 10년 11월 10일
- ↑ 신병주, 『왕비로 산다는 것』, 매일경제신문사, 2020
- ↑ 신명호, 『조선왕실 왕비와 후궁의 생활』. 국립고궁박물관 학술연구용역 보고서, 국립고궁박물관, 2013.
- ↑ 윤정란, 『조선 왕비 오백년사』, 이가출판사, 2008.
- ↑ 신명호, 『조선왕실 왕비와 후궁의 생활』. 국립고궁박물관 학술연구용역 보고서, 국립고궁박물관, 2013
- ↑ 신명호, 『조선왕실 왕비와 후궁의 생활』. 국립고궁박물관 학술연구용역 보고서, 국립고궁박물관,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