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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디지털 인문학이란 정보통신기술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1]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용어가 아직 낯설게 느껴진다. 인문학은 디지털보단 아날로그를 연상시킨다. 인문학을 올바르고 심도있게 공부하고 싶다면 인터넷보다는 책을, 최근의 자료보다는 옛자료를 살펴야한다는 편견이 우리에게 아직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디지털 도서관, 디지털 아카이브 등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디지털 분야와 접목되었고 ’정보통신기술‘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화된 여러 자료들은 자료의 시각화, 자료의 생산과 공유 과정에서의 집단적인 참여, 해당 자료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다는 여러 이점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편견으로 인해 이러한 자료의 존재를 알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적은 것 같다. 사람들이 익숙해질 수 있도록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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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선호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 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덕종 비 소혜왕후(昭惠王后), 예종 비 안순왕후(安順王后)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1484년(성종 15) 창덕궁 이웃에 창경궁을 마련하였다. [2]. 창경궁은 다른 궁궐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독특한 점이 많다.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또한, 정문 홍화문에서 외전의 법전인 명정전 사이 중문이 하나 없다. 그 거리가 짧기 때문에 중문을 세울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3] 또한,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이곳에서는 왕실의 공식적인 의례인 조하 의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은 거의 치러지지 않았고 왕이나 왕비, 왕대비 및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활용되었다. 창경궁은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었다.[4]


궁중에 납품되던 물건들 ‘궁중건기’를 중심으로

건기[5]는 물품의 목록과 수량을 열기한 관문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국가의 잔치·제사·의식 등 길흉관계의 큰 행사와 탄일·명절·왕자녀의 경사 등이 있을 때 소요되는 물품의 목록과 수요를 적어 올리는 일종의 견적서이다. 물건뿐만이 아니라 인력(人力)을 필요로 하는 동원관계의 명세서도 포함된다. [6]디지털 장서각 이는 주로 궁중에서 많이 쓰였던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19년(순조 19) 세자가례[7]때부터 국권상실 직후까지 약 100년간의 것들이다. 그러나 그 쓰임의 역사는 오랜 것으로 추측된다. 예컨대 인조반정 이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계축일기』에도 “발기하여 갔다.”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건기는 국혼관계, 관례, 대왕대비 및 왕대비의 존호관계, 다례관계, 상격 관계, 평상시(왕의 탄일, 명절마다 새로 짓는 의복) 등 여러 종류가 존재한다. 그 중 임오가레관계[8]에 주목했다. 드물게 화려한 이 건기는 홍색·녹색·황색·연분홍색·청색의 5색 도련지를 한 장씩 이어 위에 금가루를 뿌리고 아름다운 궁체 한글과 한자로 내용을 적었다. [9][10] 건기 속에는 간택의 절차·복식·음식·예단·노리개·신하들의 진상관계와 가례시의 신랑·신부에 관계되는 것, 의대·금침·비녀·패물·주머니·단추·누비옷·흉배·그릇·병풍 등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한편, 한 번의 국혼에 이불이 560채, 베개만도 36개를 장만했다는 사실과 진주·마노·금·은 등 어마어마한 규모의 수입품이 모두 국고에서 지출되었음을 생각할 때, 임오가례 뒤 불과 반년도 못 가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절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궁중건기는 당시 궁중 의식은 물론 의류, 경제, 생활 연구에 있어서도 유용한 자료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의 개선점과 오류

첫번째 개선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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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통계’[11] 페이지 속 그래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두 그래프가 다루는 내용과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 없고 원그래프의 경우 글자가 겹쳐 난잡해 보인다. 하단 막대그래프의 경우 엉뚱하게도 단위가 명으로 뜨며, 막대 위에 커서를 가져다 댈 경우, 명 수는 다시 건 수로 뜬다. (125명 > 125건) 단순히 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해당 문서들을 정리한 페이지로 각각 이동할 수 있도록 연결해두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두번째 개선점
‘인물별 아카이브’[12]의 정보가 매우 빈약하다. 카테고리는 자음순으로 나열했는데 ㅊ을 제외한 격음(ㅋ,ㅌ,ㅍ)은 해당되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서에 속한다. 인원수도 적어 속한 사람이 한 명 이하인 카테고리가 여럿 존재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선별한 기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문제시된다. 단순히 모금에 동참한 사람들인지 운동을 주체적으로 이끈 사람들인지 홈페이지를 방문한 입장에서 조금도 알 수 없다.
세번째 개선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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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인물별 아카이브 속 인물별 설명에 이명, 훈장과 같은 불필요한 카테고리가 존재한다. 또한, 성격이라는 이름의 카테고리가 존재하는데 내용이 서예가, 천교도인, 해외동포, 을사5적 등으로 카테고리에 속하는 기준과 범위가 모호하다. 어째서 분류명이 ‘성격’인지도 의문이다.
네번째 개선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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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검색하기’[13] 중 연도를 입력하는 방식이 난해하다. 시작년도와 끝년도가 모두 특정 해가 아닌 기간으로 명시되어 있다. (start: xxxx-xxxx - end: xxxx-xxxx) 또한 검색하고자 하는 기간의 끝년도를 의미하는 end가 2018년 2026년으로 아예 고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검색 자체가 불가능하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1907년과 1908년의 문서를 찾기 위해 start: 1992-1900 – end: 2018-2026이라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기간을 설정해보았으나 검색결과는 물론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기간을 입력하고 apply를 누르자 이용자가 2022-2022라는 전혀 상관없는 기간을 설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섯번째 개선점
‘아카이브 검색하기’의 검색연도가 start와 end 모두 1892년에서 2026년까지로 국채보상운동과 전혀 상관없는 기간들이 함께 뜬다. 이는 실제 운동(1907-1908)은 물론이거니와 동일한 홈페이지 내에서 제시한 국채보상운동의 기간(1907-1910)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지도 않았던 1892년-1906년의 경우 아카이빙 할 문서 자체가 없음에도 기간에 포함된다는 점이 의문이다.


출처

  1. 디지털 인문학 입문
  2. 『성종실록』 15년 9월 27일
  3.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하』, 눌와, 2014.
  4. 국가문화유산포털
  5. '건기(件記)'는 이두(吏讀)로서 '발기'라고 읽는다.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순조19년 3월
  8. 디지털 장서각
  9. 임오가례시일기_1
  10. 임오가례시일기_2
  11.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_아카이브 통계
  12.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_인물별 아카이브
  13.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_아카이브 검색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