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M윤지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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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은 전통적인 인문학 연구과정에 정보기술이 합쳐져 오늘날 탄생한 인문학의 새로운 방법론이자 학문이고, 그렇기에 정보 시대의 인문학 연구 및 학습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과거에 비해 인문학계는 거대해졌고, 정보기술 역시 발달하는 상황 속에서 이들을 적절히 역어냈다고 생각하며 수많은 자료를 기록, 정리하는 것에 있어 꼭 발전되어야할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인문학을 위해서는 우선 인문학 지식이 필요하며 이를 홈페이지 등으로 나타내기 위한 설계의 과정을 거친 후 페이지를 구축하고 자료의 연결이나 접근성을 분석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구현된 인문학을 분석/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불어 시청각적 자료 등의 연결을 통해 인문학을 시각화 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아날로그 지식과 디지털 지식, 즉 서로 다른 지식 체계가 만나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각각의 지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긴밀한 협업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오늘날 다양한 교육을 통해 인문학과 디저털, 즉 두가지 지식 체계를 모두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이 점점 방대해지고 복잡해지는 인문학 속에서 개인의 힘으로는 다양한 학문과 다양한 자료를 처리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날로그 혹은 디지털 각각의 단일 학문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결국 오늘날 인문학도들과 디지털 영역의 전문가들은 인문학적 자료와 정보처리기술을 통해 개인이 아닌 단체로 머리를 맞대어 디지털 체계에서 인문학 자료를 정리하고 연구하고, 나아가 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디지털 인문학이 점차 필수적인 과목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디지털 공간 특성상 확인되지 않은 방대한 자료가 쏟아져 나올 수 있고, 인문학에 대한 전문적이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 또한 전달될 가능성이 있다. 디지털 인문학은 이런 점을 경계하여 전문성을 가지고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국, 경희국,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덕수궁(德壽宮)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국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중인 1592년선조 26에 선조가 피난지인 의주에서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원산대군의 사저와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時御所'로 정하여 '정릉동 행궁'으로 삼아 머물던 것으로부터 시작된다[1]. 이후 1611년광해군 3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2]. 궁궐의 모습을 갖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1623년인조 1에 인조가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한 이후[3]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1748년영조 24에는 영조가 인조의 즉위처를 확인하기 위해 경운궁에 임어하기도 했다[4]. 하지만 덕수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1893년고종 30에 고종이 즉조당에서 선조 환도 300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을 치렀다[5]. 1896년고종 33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한 이후[6], 1897년고종 34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게 되고[7],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8] 경운궁이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 대화재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을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9] 이후 고종의 호를 덕수德壽로 하였기 때문에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다[10].
고종 사후인 1921년에는 경운궁선원전璿源殿, 순종 비의 혼전인 의효전懿孝殿을 창덕궁으로 이건한 뒤, 궁역 서북부가 분할·매각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사무소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장으로 석조전石造殿이 사용되었으며, 1948년에는 정부 수립과 광복 3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이 거행되는 등 정치의 중심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통칭되며 시민공원으로 활용되거나 음악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석조전과 그 별관은 국립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이용되면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조선시대의 궁궐은 '법궁-이궁 양궐체제'로 운영이 되었다. 그럼 왜 조선왕조는 이런 양궐체제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을까? 궁궐은 따로따로 생기고 없어지고 한 것이 아니라 궁궐의 주인인 임금 한 사람의 쓸모와 의지에 따라 경영되었다. 임금이 어느 궁궐에 들어가 사는 것을 임어臨御라 하고, 기거하는 궁궐을 옮겨가는 것을 이어移御라 하며, 다시 원래의 궁궐로 돌아오는 것을 환어還御라고 한다.
이때 임금이 임어하는 공식 궁궐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는 궁궐을 법궁法宮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흔히 정궁正宮이라고 표현한다. 정궁이라는 말은 별궁이나 행궁에 대해서 임금이 정규적으로 임어하는 공식 궁궐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정규적으로 임어하는 궁궐 가운데서도 또 으뜸이 되는 궁궐을 조선시대에는 법궁이라한 것이다.
법궁은 당연히 왕실의 생활 공간뿐만 아니라 백관百官이 조회朝會를 열고, 빈객賓客을 맞는 등 공식 활동을 하는 제반 공간을 고루 갖추었다. 그런데 임금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려면 법궁 하나만 있어서는 곤란하였다. 왜냐하면, 화재가 나는 등의 뜻하지 않은 변고가 궁궐에 생기거나, 임금이 어떤 정치적인 특단의 조치를 취할 때, 아니면 왕실 가족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서, 혹은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서 옮기고 싶을 때 옮겨가서 상당한 기간 머물면서 활동할 다른 궁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임금이 이어할 목적으로 지은 또 다른 궁궐을 법궁과 구분하여 이궁離宮이라 하였다. 이궁은 법궁보다 격이 한 단계 낮기는 하지만, 법궁과 마찬가지로 임금의 공식 활동 공간으로 필요한 구성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 규모, 기능면에서 법궁에 뒤지지 않는 궁궐이었다. 이처럼 임금들은 법궁과 이궁 두 궁궐을 갖추어야 비로소 임금답게 활동할 수 있었다.
지금 서울에는 조선시대 궁궐이 다섯 곳 남아 있지만 이는 궁궐들이 번갈아 지어지고 없어지고 하다가 다섯이 된 것이지 다섯 궁궐이 동시에 쓰인 적은 없었다. 어느 한 시점에서 동시에 쓰인 궁궐은 법궁과 이궁 둘이었다. 법궁과 이궁은 고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란, 화재 등의 변고나 새 궁궐을 짓는 과정 등에서 법궁과 이궁이 바뀌기도 하였다. 또한 정치적 격변으로 임금이 다른 궁궐로 이어한 뒤에는 다시 특정 궁궐에 임어하지 않기도하는 등, 임금의 궁궐 이용에 변동이 생길 때마다 법궁과 이궁도 변화를 겪었다. 결국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서울의 다섯 궁궐의 역사는 영건營建과 훼손의 역사를 거친 결과이다.

조선왕조 '법궁-이국 양궐체제'의 변천
출처 : 『홍순민의 한양읽기:궁궐』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순번 개선점 및 오류 개선 및 수정방안 참고 페이지
1 메인화면 바로가기 중 하나인 '1907 KOREA'를 클릭하여 이동한 '대구 1907' 페이지에서 다시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로 돌아올 수단이 없음.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국채보상운동로고를 클릭할 시 다른 페이지로 연결됨. '대구 1907' 페이지에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로 돌아올 수 있는 링크를 담은 로고 게시. 연결되는 다른 페이지에 대한 설명 필요 대구 1907 메인 페이지
2 의연금 검색 페이지에 들어가자마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역으로 검색하기', '인물로 검색하기' 두 가지인데, 둘 중 하나로 들어갈 시 처음 두 개의 선택지를 포함해 '직업으로 검색하기', '해외 의연금 검색하기' 그리고 '통계 확인하기' 총 5개의 선택지가 나타남. 의연금 검색 페이지에 들어가서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에 '직업으로 검색하기', '해외 의연금 검색하기', '통계 확인하기' 선택지 추가 의연금 검색 페이지
3 아카이브 검색 페이지 중 인물별 아카이브 부분에서 가나다 순으로는 나눠져 있지만 전체 인물을 한 눈에 볼 수 없다는 불편함이 있음. 또한 '카', '타', '파', '하', '기타' 부분에는 검색결과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버튼이 마련되어 있는 것에 이상함을 느낌. 전체 인물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체' 버튼 추가 및 검색결과가 존재하지 않는 버튼 비활성화 인물별 아카이브 검색 페이지
4 메인페이지에서 'ebook 검색하기'에 들어가도 이와 관련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고, 이로 인해 무엇을 어떻게 검색해야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어려움. 아카이브 이용 방법에도 이에 관련한 내용이 없고 또한 메인페이지 설명에서 'ebook 바로가기란'이 나와 있지 않음. 내용이 없는 'ebook 검색하기' 페이지 제거 혹은 관련 설명 추가하기 ebook 검색하기 페이지, 아카이브 이용 방법 페이지
5 아카이브 검색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 자료의 원본이미지를 보려하면 전자문서 보안 페이지가 뜨며 이후 수동으로 보안 프로그램을 깔라는 페이지로 넘어감. 보안 간소화 필요 아카이브 원본이미지 오류 예시
6 follow us '인스타그램'부분을 클릭하면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콘텐츠라고 표시된 인스타 페이지로 넘어감. 새로 인스타그램 페이지 개설 혹은 이동버튼 삭제 인스타그램 오류 페이지
7 전문 검색 페이지 등에 있는 '연도를 입력해주세요'란에 나오는 '시작, 끝, 적용, 취소'Start, End, Apply, Cancel' 부분을 굳이 영어로 나타낸 부분. 기본 영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이해가 어려운 이용자가 있을 수 있다 생각. 한글로 변경 아카이브 검색 페이지

참고문헌

김바로, 『시맨틱 데이터 아카이브의 구축과 활용』, 보고사, 2018.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궁궐』, 눌와, 2017.

참고사이트

위키실록사전_경운궁
문화재청_덕수궁이야기_덕수궁역사
조선왕조실록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각주

  1. 『선조실록』 26년 10월 2일
  2. 『광해군일기』 3년 10월 11일
  3. 『인조실록』 1년 3월 13일
  4. 『영조실록』 24년 1월 27일
  5. 『고종실록』 30년 10월 4일
  6. 『고종실록』 33년 2월 11일
  7. 『고종실록』 34년 2월 20일
  8. 『고종실록』 34년 10월 12일
  9. 『고종실록』 44년 7월 19일
  10. 『순종실록』 즉위년 8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