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M손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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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인문학 위기를 헤쳐나갈 방안 중 하나이다. 인문학의 가장 큰 매력으로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이라 여긴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간다운 삶의 위기로 이어진다. 인문학 위기는 인문학적 체험의 둔감성에서 온다. 그리고 인문학 콘텐츠와 삶의 경험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치열한 고민과 토론 그리고 논쟁에 우리는 아테네 폴리스보다 빈번하지 못한 자세로 노출된다.인문학 콘텐츠로 가장 많이 권유되었던 것은, 고전 독서이다. 우리와 고전이 단순히 맞닿는 것만은 대안이 아니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개인만의 고민과 성찰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어야하고, 개인을 너머 타인과의 공유를 통해 문제의식 체감해야한다. 웬만한 고전에 대해서는 이미 안내서들이 많이 나와있다. 이때, 디지털 영역이 제시하는 가시화 혹 시각화를 통해 우리는 공감각적으로 고전을 대할 수도 있다. 또한, 시공간적 제약이 현실보다 덜하다는 점에서 타인과의 지식 교류가 원활한 상태는 인문학적 소양을 고양시키는 데 매우 바람직하다. 삶의 문제에 대해 학문적 연구뿐만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이란 경우에서도, 디지털 기술로 지적 유희의 장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가장 기대되는 점은, 후에 남게될 이 시대의 고전이 과연 디지털 영역에서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 라는 점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경복궁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다.[1]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다.
경복궁 복원 사업
ㅇ 목적[2]
- 일제점기 변형, 훼손된 경복궁을 원형복원,민족정기회복, 문화민족의 자긍심 고취
- 역사교육 및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 조성을 통한 올바른 전통계승
- 수도서울의 상징적 문화유산으로 조성,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 보존, 우리 문화의 역사성 및 우수성을 널리 알림
ㅇ 복원의 원칙
- 정전과 편전, 침전, 동궁을 갖춘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 보존, 세종 때의 우수한 과학 문화재 재현
ㅇ 복원 기준 시기
- 고종 때의 최종 경복궁 완공 시점인 1888년을 기준으로 함
ㅇ 복원 범위
- 복원정비 목표에 따라 경복궁 전체를 대상으로 함
- 고종 당시의 조선후기 궁중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 줌
- 건축물 뿐만 아니라 과학문화재나 궁중 생활풍속에 관계되는 것들도 복원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왕실 사람들의 편지
조선 후기 한글 편지에 나타난 왕실 여성의 삶과 문화 연구 결과[3] 중심으로
왕실에서도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글편지가 자주 오갔다. 출가하여 궁을 나온 공주는 한글편지로 왕실 어른들의 안부를 물었고, 편지를 받은 왕과 왕비는 다시 한글편지로 답신을 보내며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았다.
1980년대 후반 이후로 무덤 출토 국문편지들이나 왕실에서의 편지들이 소개되었고, 이에 대한 본격적인 해독과 주석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해독과 주석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 간의 대략적인 관계와 국어사적 측면에서의 한글 체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따라서 왕실 여성들에 의해 작성된 편지는 다소 한정된 분야에서 연구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국어사적인 관점에서 각 시대별 한글의 변천 과정과 특징을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서 연구되어 왔다. 각 음운 변화나 한글 체계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편지만큼 좋은 자료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편지를 통한 국어사적 연구는 그 자체로 한글의 변천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왕실에서의 한글 편지를 이러한 수준에서 이해하고 말기에는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매우 크다. 왕실 여성의 편지는 대체로 편지의 작성자와 대략적인 시기의 추정이 가능하다. 때문에 공식적인 기록이나 문집류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여성들의 삶이나 개인의 일상적 모습이 재구될 수 있다. 무엇보다 왕실 여성들이 개인적 심리와 정서를 직접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왕실 여성을 이해하는데 긴요한 자료가 된다.
왕실 여성의 삶과 문화를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왕실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가졌던 고민의 생생한 증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어린 시절부터 평생토록 거주해야 했던 왕실에서의 삶과 그 삶을 보내기 위해 그녀들이 평생에 걸쳐 익혀야 했던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실 여성의 편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편지이기에, 편지를 보낸 개인만의 성향이 담겨져 있을 가능성 또한 높다. 따라서 왕실 여성의 삶으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오히려 왕실 여성의 개인적 삶에 대한 기록이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개인의 기록이기에 거짓과 왜곡 없이 왕실 여성의 실제적인 삶의 양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편지는 17세기부터 조선말기 까지의 한글편지이다. 우선 17세기의 한글편지로 壯烈王后 趙氏(인조계비, 1624~1688)가 숙명공주에게 쓴 <淑明宸翰帖> 2편,[4]숙휘공주에게 쓴 <淑徽宸翰帖> 2편을 살펴보았다. 또한 仁顯王后 閔氏(숙종계비, 1667~1701)의 편지와 仁宣王后(효종비, 1618~1674)가 딸들인 숙휘공주와 숙명공주에게 보낸 70여편을 살펴보았다. 18세기의 왕실 여성의 한글 편지로 貞純王后 金氏(영조계비, 1745~1805)가 祖考 편지에 답장한 자료와 敬懿王后 혜경궁 홍씨(莊祖 妃, 1735~1815)의 친필 편지를 살펴보았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19세기에 작성된 純元王后 金氏(순조비, 1789~1857)와 明成皇后 閔氏(고종비, 1851~1895)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들은 각각 70여점과 160여점의 편지를 남기고 있어, 조선 시대 왕후의 편지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았다. 이외에 純明孝皇后 閔氏(순종비, 1872~1904)가 세자비로 있던 시기에 조정대신인 金商悳에 보낸 편지 10점과 神貞王后 趙氏(익종비, 1808~1890), 哲仁王后 金氏(철종비, 1837~1878), 明成皇后(고종비, 1851~1895), 孝定王后(헌종의 계비, 1831~1903)의 편지들도 참고하였다.
이러한 편지의 연구를 통해, 왕실의 여성들은 ‘정보의 제공과 의견의 수렴’을 위해 편지를 활용하면서, 왕실과 조정의 인사, 경제, 군사 문제와 외교적인 사항을 편지를 통해 전달하고 있었다. 또한 ‘문제의 호소와 사건의 해결’을 위해 편지를 활용하고자 하였음도 드러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왕실 여성은 왕실 밖의 인물과 의견이 대립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기존의 역사적 해석과 다른 왕실 여성의 면모가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한글 편지에 나타난 애정의 양상을 중심으로, 왕실 여성과 일반 여성의 편지를 비교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왕실 여성들이 왕실 이라는 공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격정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 관련된 역사적 상황이 서술된 페이지 서식.
을사조약, 통감부, 일본의 화폐 개혁 등
- 국채보상운동 전개를 위한 취지문, 언론 기사물의 내용 직접 제시.
요약 및 정리본을 통한 내용 전달 대신 실제 자료에 기재된 것을 확대하여, 현대어로 풀이한다.
- 양기탁 국제 재판 공판 기록 시간순으로 나열.
양기탁 재판은 국채보상운동의 분위기를 억압했던 일제의 방해 공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것은 국채보상운동의 가치 타당성을 제시하는데 일조한다. 이런 측면에서 부각할 필요가 있는 사건이다.
- 서방세계로 알려지게 된 과정 서술.
영국 언론인, 해외 유학생, 해외 이주민이 발행하는 신문,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 등 구체적인 요인을 한 데에 모아 정리한다.
더불어, 외채로 시달리는 피신민지국 사정을 간략히 언급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세한 내막이 제시된 페이지 연결을 권장한다.
해외 정세에서 나타났던 비슷한 사건들을 한데 모아 봄으로써, 공통점뿐만아니라 차이점 또한 파악하여 국채보상운동이 책임의식에 기초한 경제모델이라는 것을 피력하도록 한다.
- 의문점 및 한계점에 대해 첨언이 이루어지는 소통의 장 마련.
서상돈 제창과, 평화 및 책임 의식을 찬양하나 이 부분 이외에 분석적인 평가나 성찰이 이루어지는 소통의 장이 부족하다.
예시
- 우리나라가 빌렸는지에 대한 진위여부
- 일제 방해공작의 예상은? - 애국언론 및 단체의 행위와 더불어서 서술
- 운동의 결과 의의 검토 : 미화 여부, 무지인가, 기만인가
- 사건의 내막과 전개과정을 통해 명명 또한 검토.
'보상'이란 키워드 사용이 적절한가?
- 가해자로서 피해자에게 물어야한다는 뜻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