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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생각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 DH)이란 정보화 시대에 맞춰 인문학 자료들을 디지털 아카이빙하여 나타낸 학문을 의미한다. 이는 정보 기술(ICT: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하여 아카이빙하고자 하는 자료들을 체계화한 후, 보다 알아보기 쉽게 시각화하여 나타낸 것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알아보고자 하는 정보를 종이에서 찾지 않는다. 때문에 인문학 전문가들은 그들의 연구 성과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으로 인터넷을 매개체로 활용해야 한다.

인문학은 인간의 기본적인 소양을 기르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학문이다. 하지만 연구 분야가 발전되지 않고, 현재 상태에 머물러있고자 하는 특성이 강하며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정보화 시대의 발빠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튕겨나가곤 한다. 인문학은 더 이상 고전적인 학문에 머물러서는 안되기 때문에, 인문학 전문가들은 정보 기술 분야 또한 전문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희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조선의 왕들과 얽힌 역사

경희궁은 잔존하는 흔적이 많지 않다. 하지만, 애매한 위치를 가짐으로서 각 왕들과 얽힌 관계가 매우 복잡한데, 이를 토대로 경희궁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한다.


광해군
년도 사건
1617 6월 경덕궁(경희궁의 본래 이름) 짓기 시작
1619 8월 경덕궁의 마무리 단계, 이후 더디게 진척
1623 - 완공 단계, 광해군 왕위에서 쫓겨남



인조
년도 사건 의의
1624 1월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가 경덕궁으로 임어하여 9년을 살았음 경덕궁이 실질적 이궁의 지위를 가지게 된 계기

이후 인조 왕위 시기에 많은 궁들이 제 모습을 잃었다, 그나마 제 모습을 지킨 것이 경덕궁이다.

숙종
년도 사건 의의
1661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남 숙종에게 매우 의미가 깊은 궁
1720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

숙종은 9회 12년 반 정도 임어하였다.

영조
년도 사건
1760 2월 경덕궁의 이름이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시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 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바꿈

경희궁에 19년 가까이 임어하였으며, 경희궁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였다.

정조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였으며,
효종에서 철종까지 각 1회씩 1년 내외 임어하였다.

고종
년도 사건 의의
1865 9월 경희궁 차비문(差備門)밖 궐내각사 여러 곳의 문짝과 마룻장 등이 사라짐
1868 5월 경희궁 안 빈터를 용동궁(龍洞宮), 수진궁(壽進宮),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 네 궁방에 골고루 분배하여 개간하도록 허락 경희궁의 부지 분배, 일부 건물들이 터로만 남아 경희궁이 궁궐로서의 기능을 잃었음을 의미
1883 서양식 양잠 사업으로 인해 경희궁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조성하고자 함
1899 6월 독일의 하인리히 황자가 방한하여 경희궁에서 관병식을 행함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이후 대규모 행사는 주로 경희궁을 이용
1902 8월 경운궁-경희궁 통하는 다리 건설 시작하여 11월 완공

고종초년, 경복궁 중건으로 해당 궁이 자연스레 법궁으로 인식되면서, 법궁의 지위를 갖고 있던 동궐은 자연스레 이궁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이궁 노릇을 하던 경희궁은 더이상 궁궐로서 유지, 경영할 필요가 사라졌다. [1]

조선 이후

일제시대
년도 사건 결과
1905 11월 을사늑약 이후 대중 집회 장소로 사용
1910 경술국치 이후 총독부 소유로 넘어감 경희궁의 근본적인 변질의 계기
1910 전후 경성공립중학교가 경희궁 영역 침범 그 결과 1930년대 초 면적이 2/3정도로 현저히 줄어들음, 이후 남은 건물들 매각 처분



해방 뒤
년도 사건 결과 및 의의
1946 서울공립중학교
1951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로 분리
1971 평준화 정책으로 인해 서울고등학교만 남음
1980 서울고등학교 이전 이후 경희궁 중심 영역은 빈터로 남음
1986 서울특별시 소유가 됨
1988 흥화문 경희궁 터로 이전 경희궁에 다시 돌아온 첫 건물
~2000 경희궁의 복원 정비 추진 숭정전과 그 회랑, 자정전, 태녕전 등이 복원됨
2002 일부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어 개관

[2]

복원된 곳

  1. 정문 흥화문 : 경희궁 터로 돌아오긴 하였으나 제자리를 정확히 찾지 못하였다. 동향이 아닌 남향을 하고 있으며, 좌우에 궁성을 잇지 못하였다.
  2. 박물관 앞 금천교 : 위치와 크기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의미가 있다.
  3. 건명문 안 : 경희궁의 중문, 숭정문
  4. 조정과 숭정전 : 조정은 외전 영역의 중심이며, 이 조정의 중심이 되는 정전이 바로 숭정전이다.
  5. 자정전과 태녕전 [3]

궁궐의 식문화[4]

궁중의 주식류는 수라, 죽, 응이, 면, 만두류가 있으며, 궁중의 상차림에는 수라상(水刺床), 미음상, 반과상(盤果床) 등이 있다. 수라상은 반수라(飯水刺)와 죽수라(粥水刺)로 구분된다. 반수라는 밥을 위주로 반찬을 차리는 상으로, 시간에 따라 조수라(朝水刺), 주수라(晝水刺), 석수라(夕水刺)로 구분된다. 수라상은 원반, 곁반, 전골상의 3상으로 구성되고 조수라는 10시 지나서, 석수라는 저녁 5시경에 올리고,. 평일의 낮에는 주로 면상을 가볍게 올린다. 죽수라(粥水刺)는 주로 이른 아침에 죽, 미음 등의 유동식을 주식으로 올린다 반과상(盤果床)은 탕, 면, 적, 만두, 전유화, 어채 등의 음식과 강정, 정과, 강과, 율란, 조란 등이 올려진 상으로 주식이 면(麵) 또는 만두인 다과상이다. 시간에 따라 아침의 조다소반과(早茶小盤果), 오후의 주다소반과(晝茶小盤果), 늦은 오후의 야다소반과(夜茶小盤果), 늦은 밤의 만다소반과(晩茶小盤果)와 특별한 오후의 주다별반과(晝茶別盤果)가 있다.

밥은 반수라상에서만 올렸다. 밥의 종류는 팥물밥(赤豆水和炊)백반(白飯)의 2종류였으며, 팥물밥과 백반 중 한 가지만을 올렸다.[5]

죽은 죽수라반과상에서 올렸다. 죽수라(粥水朿)상에 올린 죽은 모두 백미죽(白米粥)이었고, 주다소반과에서는 백자죽(柏子粥), 만다소반과에서는 백감죽(百甘粥)두죽(豆粥)을 올리고 있다. 이는 상차림에 따라 올리는 죽의 종류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죽은 쌀을 주재료로 하여 곡물, 견과류 등의 재료를 섞어 만드는 것으로 흰죽이 기본이었으며, 두죽은 콩이 아니라 팥으로 쑤는 팥죽이었다.[6]

미음

미음은 참(站)을 출발할 때행차 중에 쉬는 중로(中路)에서 올렸고, 소별미상에도 올렸다. 미음이란 쌀이나 곡류에 물을 많이 붓고 푹 끓여 체에 걸러 마실 수 있는 농도의 유동식으로 소화되기 쉬워 보양식, 치료식 등으로 이용되어 왔다. 궁중에서 미음은 여행길 또는 병이 생겼을 때 몸보신을 위해 올리는 음식으로 고음과 정과를 함께 올리는 것인데. 원행을묘정리의궤 에서도 동일하였다. 또한, 미음상은 혜경궁과 군주에게만 드렸고, 대전에게는 올리지 않았다.

궁중음식에서 이용된 미음의 종류에는 갱미음(粳米飮), 청량미음(靑粱米飮), 나미음(米飮), 목미음(木米飮), 홍합미음(紅蛤米飮), 청미음(淸米飮), 직미음(稷米飮), 속미음(粟米飮), 인삼속미음(人蔘粟米飮), 삼합미음(蔘蛤米飮) 등이 있다.
청량미음은 차조로, 황량미음은 메좁쌀로 만드는 것이며, 삼합미음은 찹쌀에 마른 해삼, 홍합, 쇠고기를 재료로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죽을 끓일 때의 물의 양은 쌀의 5∼6배이지만, 미음은 쌀의 10배 정도에 해당한다.[7]

수라상에 올린 면류

면은 반과상진찬, 소별미에서 올렸다. 또한, 면 대신에 야다소반과에서는 병갱(餠羹)을, 주다소반과에서는 만두탕을, 주다소반과에서는 분탕(粉湯)을 올렸다.

병갱은 떡국, 분탕은 녹말국수로 만든 장국에 해당한다.[8]

수라상에 올린 만두류

만두는 양만두, 어만두, 생치만두, 골만두, 채만두, 침채만두, 각색만두, 어만두탕, 생복만두탕의 9종이 기록되어 있다.

만두의 쓰임새를 볼 때, 야다소반과상의 채만두, 생치만두, 침채만두는 주식으로 사용되었고, 수라상에서 골만두는 갱 대신, 생복만두탕, 양만두는 조치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또 협반이나 원반에 올리는 음식의 하나로 올려지는 등 쓰임새가 다양함을 알 수 있었다.[9]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의 개선점 및 오류

시작 화면


시작 화면이 지나치게 무거워 스크롤이 원활하지 않아 튕겨져 나가기 쉽다. 때문에 아카이브 이용 시작부터 답답함을 느끼고 금방 사이트에서 나가버리는 이용자들이 많을 것이다.

콘텐츠 보기의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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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보기의 국채보상운동의 이야기 나누기가 일정하지 못하다, 아이들을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다섯 번째 이야기로 나누기보다 아이들을 위한 메뉴를 따로 지정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목록 보기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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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검색의 시작 화면이다.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는 자료가 다수임에도 이미지를 주로 내세운 목차 보기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는 이미지가 없다는 것에 강한 인상을 주어 자료 부족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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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통계의 표이다. 글과 표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문자가 서로 겹쳐 읽는 데에 어려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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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정치 않은 항목 기입으로 자료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목차의 세부 항목 표기 부족

국채보상운동의 목차란의 큰 범위에 마우스커서를 올려도 세부 항목이 표시되지 않아 각 목차의 표시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이는 사용자의 활용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료들의 접근성을 낮춰 효율성이 매우 떨어지게 된다.

각주

  1. 홍순민. (2017).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 홍순민 지음.
  2. 홍순민. (2017).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 홍순민 지음.
  3. 홍순민. (2017).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 홍순민 지음.
  4. 이승림, & 최영진. (2021). 궁중의 주식류에 관한 고찰. 식공간연구, 16(2), 1-23.
  5. 원행을묘정리의궤
  6. 원행을묘정리의궤
  7. 원행을묘정리의궤
  8. 원행을묘정리의궤
  9. 원행을묘정리의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