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M맹영초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디지털 인문학은 컴퓨터로 인문 지식을 연구하는 것인데 신기한 연구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디지털 인문학은 전자정보에 대한 조사연구, 분석, 종합, 표현을 다루고 있다.미디어를 활용해 인문학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우리의 컴퓨팅에 대한 지식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 권의 어휘 분석을 통해 저자가 자주 쓰는 어휘와 인물별 중점 묘사를 몇 초 안에 볼 수 있고, 짧은 시간에 데이터를 통해 한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다.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지식 공유 수준을 높이기 위해 도서관, 박물관, 문화기관, 대학 연구기관 등이 인문 자료의 디지털화와 네트워킹에 나서고 있다.방대한 양의 인문 주제 웹사이트, 위키프로젝트 데이터베이스가 우리에게 공개된다.디지털 도서관의 콘텐츠는 물론 인문학자 간 지식 공유와 인문 지식 대중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창덕궁의 역사 및 변천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연못,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이다.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창덕궁은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시대의 궁궐이다. 1997년 조선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에 있다.[1] 창덕궁은 단순 역사성이나 정궁의 지위 유지 시기 면에서 경복궁보다 우월하다. 뿐만 아니라 원형 보존성도 이 같은 의견들을 크게 뒷받침한다. 경복궁 대부분의 전각들은 길어야 19세기에 지은 것이며, 그나마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대다수를 허물었다가 광복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새로 복원한 것이라 깔끔하다 못해 다소 인위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하지만 창덕궁 전각들은 인정전을 포함한 대부분이 원형이라서 무겁다 못해 매우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궁궐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기염을 토했다.[2] 창덕궁은 명낙궁이라고도 한다.낮은 산세를 따라 조성된 후원에는 다양한 나무와 숲길, 그리고 그 사이에 섞여있는 평천이 자연 그대로 남아있고 특히 필요한 곳에만 길을 닦고 연못을 만들고 누각을 만들었다.산맥이나 등진 산맥을 향해 굽이치는 산길을 걷다 보면 늘 어둑어둑하고 또 하나의 마을 같은 느낌을 주는데, 앞이 트인 곳에는 정자 누각과 연못이 있어 더욱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세자의 생활
창덕궁에는 비밀스런 공간이 있다. 창덕궁 후원으로, 흔히 ‘비원秘苑’이라 부르는 ‘왕의 정원’이다. 태종 때 만들어져 그 뒤 왕들이 조금씩 늘려 나갔다. 임진왜란 때 비원은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전각과 정자들이 거의 소실되었고 인조 때부터 다시 개수 증축되었다. 비원은 복합적인 기능을 수용했다. 단순히 ‘왕의 산책길’이 아닌,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사색에 잠기던 곳이었고, 때로는 신하들과 연회를 열고 활쏘기와 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1776년(정조 1년) 9월에 정조가 규장각 건물로 처음 지었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 척 신들을 견제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자신의 정책을 펼치기 위한 핵심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폭 개편 및 사실상 부활시키면서 건립한 건물이 바로 주합루이다.
역사의 변천
- 창건: 창덕궁은 명영락 3년(1405년, 조선 태종 5년)에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漢城, 지금의 서울) 북악산 동쪽 기슭에 경복궁(景福宮)을 제외한 이궁(離宮) 건물로 지어 동궐(東闕)이라 하였다.창덕궁은 조선왕조가 홍무 28년(1395년·조선 태조 4년)에 이어 두 번째로 세운 궁궐이다.조선 태종 즉위 당시 조선의 수도는 한성(지금의 서울)에서 개성으로 천도하였고, 명영락 2년(1404년) 10월 태종은 한성으로 환도하면서 새로운 이궁(離宮)을 건설하도록 하였다.이듬해인 1405년 10월에 이궁이 세워져 '창덕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영락 10년(1412년, 조선 태종 12년)에 돈화문을 짓고 각 사조방을 두었다.영락 16년(1418년, 조선 태종 18년)에 조계청을 짓고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을 서쪽으로 옮겨 면 3칸을 넓히고 면 5칸으로 확장하였다.영락 17년(1419년, 조선 세종 원년)에 인정전 남행랑을 세웠다.천순 5년(1461년, 조선 세조 7년)에 창덕궁 안의 주요 전각(殿閣)으로 명명되었고, 천순 7년(1463년, 조선 세조 9년)에 궁벽을 크게 확장하였다.성화 11년(1475년·조선 성종 6년)에 주요 궁문(宮門)이 명명됐다.
- 임진왜란은 이후 조선과 명나라 군대의 지원으로 종식되었고, 조선 선조가 한성으로 환도한 이후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중수하지 않고 월산대군 저택을 임시궁으로 삼아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이라 하였다.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궁궐의 중건은 계속 거론되었다.경복궁은 규모가 너무 커서(궁궐이 782칸) 재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궁궐 238칸) 창덕궁을 우선 중건합니다.만력 37년(1609년, 광해군 원년), 광해군은 창덕궁을 재건했다.그러나 이 신궁도 인조반정 때 불타버렸다.순치 4년(1647년, 조선 인조 25년)에 다시 창덕궁을 중건하였는데, 이를 위해 광해군이 인왕산 기슭에 지은 인경궁을 헐고 그 중 대다수를 창덕궁에 헐어 세웠다.
-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 따르면, 인조조가 창덕궁을 중건하면서 인경궁 광정전을 창덕궁 선정전으로, 인경궁 경수전, 홍정전을 창덕궁 대조전으로, 화정당과 희정당으로 이건하였다고 한다.또한 인경궁 경극당을 보경당으로, 청기와 집을 통명전으로, 무일당을 양화당으로, 경운당을 연희당으로, 헌잠당을 연경당으로, 수로당과 비변사를 경춘전으로, 경수전 후 행각을 함인정으로, 정순당을 징광루로, 인덕당을 태춘전으로 각각 이건하였다.
- 홍정문 남월랑을 헐고 인정전 동월랑을 건립하였다.또 인경궁의 다른 전각, 현관 등을 헐고 저승전(세자동궁, 영조연간에 불타고 다시 짓지 않음), 옥화당, 정연당, 소주방, 등촉방, 별감청 등을 지었다.해방 이후에는 개별전각을 수리하는 것으로 유지되다가 1996년부터 일제강점기에 변형된 인정전,선정전 일대를 복원했으며, 2000년부터는 규장각과 구선원전을 복원하면서 인정전 서쪽의 궐내각사를 복원하여 조선시대 창덕궁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