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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생각

디지털 인문학이란 정보통신기술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문학의 주제를 계승하면서 연구 방법 면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연구, 그리고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시도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성격의 인문학 연구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 디지털 인문학은 디지털로 표현하고 디지털로 소통하는 이 시대에 인문지식이 더욱 의미 있게 탐구되고 가치 있게 활용되려고 하는 노력을 통칭한다.[1]

디지털 인문학은 교직 이수 중인 나에게 상당히 중요한 화제이다. 특히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됨에 따라, 변화된 정보 양식과 디지털 중심의 정보 전달방식을 이해하는 방법에서 나아가 위키 문법과 C언어 등 정보통신기술을 실제로 활용해 구현하는 방법까지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정보통신기술의 활용 능력은 전공을 가리지 않으며, 모두에게 필수적이다. 그러나 사교육의 힘을 빌려가며 코딩 조기교육을 하는 이공계열 학생들과 인문계열 학생들이 C언어의 능숙도로 경쟁하기에는 사실상 어렵다. 자료를 디지털화하고, 연구 결과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디지털 인문학 교육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인문학은 시대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필요한 교양적 지식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소 등한시되고 있는 인문학에 관한 관심도를 높이고, 인문학 연구의 재생산 촉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디지털 인문학이다.

디지털 인문학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우선, 장래에 인문학 연구자가 되려고 하는 학생들이 경쟁력 있는 연구 역량을 갖출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인문학 기반의 문화콘텐츠 기획 및 저작 능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서 ‘나의 인문학’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줄 수 있다. 나의 인문학이란, 일상 속에서 인문적 교양을 증진시키며 스스로 즐기는 삶의 방식과 그럴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따라서, 디지털 인문학 교육은 인문계열 학생들에게 이공계열 학생들과는 또 다른 분야의 정보통신기술 활용 능력을 부여해줌으로써 사회 속에서 경쟁력을 가지게 하고, 전공 계열과 무관하게 개인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현대 사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된다. 더불어, 디지털 인문학은 앞으로의 사회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새로운 교육 방법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접근성이 좋아지면, 관심도 역시 그에 비례해 증가하기 마련이다. 즉, 디지털 인문학 교육을 통해 인문학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높여준다는 작지 않은 효과 또한 기대해 볼 수 있다.

경복궁

개요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도성의 대표적인 궁궐이다. 1395년태조 4 처음 건설되었고(『태조실록』 4년 10월 7일)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가(『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1865년고종 2의 공사를 통해 중건되었다(『고종실록』2년 4월 2일).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정면에 세워지면서 왕실 궁궐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조선물산공진회’ 등을 겪으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2011년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이름의 유래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그 경복궁에 대하여 말하였다.

신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것은 임금이 정사하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민(臣民)들이 다 조성(造成)한 바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성을 보이게 하고, 그 명칭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감동되게 하여야 합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래로 궁전의 이름을 혹 그대로 하기도 하고, 혹은 개혁하였으나, 그 존엄성을 보이고 감상을 일으키게 한 뜻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 만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여 먼저 종묘를 세우고, 다음에 궁궐을 경영하시더니, 다음 해 을미일에는 친히 곤복(袞服)과 면류관(冕旒冠)을 쓰시고 선대의 왕과 왕후를 신묘(新廟)에서 제향을 올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새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셨으니, 대개 신(神)의 혜택을 넓히시고 뒷사람에게 복록을 주심이옵니다. 술이 세 순배 되어서, 신 정도전에게 분부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 하셨으므로, 신이 분부를 받자와 삼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후략…….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0월 7일 정유 2번째기사

배칭의 특징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전체적인 배치는 고대 중국의 궁궐 배치 수법을 따르는 전형적인 형태로, 남·북 방향의 축선을 따라 주요한 문(門)과 전각이 배열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2]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편전인 사정전(思政殿), 침전인 강녕전(交泰殿)과 교태전(交泰殿)을 중심으로 광화문(光化門), 건춘문(建春文), 영추문(迎秋門), 신무문(神武門) 등 4개의 대문이 있고 경회루(慶會樓), 자경전(慈慶殿), 자미당(紫微堂) 등의 내전 전각과 자선당(資善堂), 비현각(丕顯閣) 등의 동궁 전각 등이 있으며, 전체 7,000여 칸에 이른다. 현재는 다수 소실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역사

태조 이후 이용되지 않던 경복궁은 세종 즉위 이후에야 다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태종은 한양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지만, 창덕궁을 건설하여 그곳에 주로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의 창덕궁 건설로 인해 조선은 두 개의 궁궐을 갖게 되었다. 이후 성종대의 창경궁, 광해군대의 인경궁과 경희궁, 고종대의 경운궁 등 여러 궁궐을 건설하면서 한양에는 다수의 궁궐이 존재하게 되었다.

세종은 경복궁의 많은 부분을 새롭게 바꾸었다. 세종의 경복궁 공사는 단순히 노후하거나 좁은 건축물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해당 전각에서 행할 의식의 규범을 정비하는 일과 맞물려 있었다. 1427년세종 9 왕세자 혼례에 관한 의식을 정비한 것과 동궁의 건립, 1429년세종 11 매일 아침의 조회인 상참례를 정비한 것과 사정전의 정비, 1433년세종 15 문소전(文昭殿) 건립과 관련 의식의 제정, 1443년세종 25 계조당(繼照堂) 건립과 이후 왕세자 대리청정 의식의 성립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세종대의 경복궁 정비와 왕실 의식의 정립은 경복궁이 유교적 왕실 의례의 공간으로 재탄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종대에 변경되거나 새롭게 건축된 대표적인 전각은 사정전, 강녕전, 계조당, 문소전 등이며 함원전(咸元殿), 교태전, 자미당, 종회당(宗會堂), 송백당(松栢堂), 인지당(麟趾堂), 청연루(淸燕樓) 등도 세종대에 건립되었다. 궁궐 내에 간의대(簡儀臺), 보루각(報漏閣), 흠경각(欽敬閣) 등 천문 기기를 위한 전각이 마련된 것도 이때였다. 이후 성종대를 제외하면 조선왕실은 대체로 경복궁을 중심으로 궁궐을 사용하였다. 성종은 주로 창덕궁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창경궁을 건립하여 창덕궁에 부족한 내전 공간을 확충하였다.
1553년명종 8에는 중종대에 소실된 경복궁 동궁을 공사하던 중에 화재가 발생하여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 남기고 편전과 침전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명종실록』 8년 9월 14일). 복구된 경복궁은 다시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궁궐과 종묘와 같이 소실되었고, 이후 고종대에 중건되기까지 약 270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
고종대에 들어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신정왕후(神貞王后)는 1865년고종 2 4월 2일 전교로서 경복궁 중건을 명하였다. 중건의 명분은 왕실의 법궁을 회복한다는 것이었고, 더불어 고종이 경복궁 중건을 염원하였던 익종의 대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이 부각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한 것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권력이었다. 복구공사를 거쳐 경복궁은 법궁으로 재탄생하였으나, 1873년고종 10 12월과 1876년고종 13 11월 등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한 연이은 화재로 크게 손상되었고 고종도 종종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88년고종 25에 이르러서야 다시 대체적인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국권을 침탈당하면서 경복궁도 왕조의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미 1894년고종 31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로 국가의 존엄성을 상실했고,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는 물리적으로도 급격하게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15년의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박람회가 경복궁에서 개최되어 조선의 법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경복궁 정면에 들어서면서 궁궐의 권위와 조선왕실의 상징이 사라졌다.

스토리텔링 주제 : 세자시강원

개요

세자시강원은 1392년태조 1 7월 개국 직후 반포된 관제에서 세자관속(世子官屬)을 설치하여 세자를 위한 강학과 시위를 맡게 한 관청이다. 1418년태종 18에 세자익위사가 따로 설치되면서 세자에 대한 시강(侍講) 즉 서연은 세자관속에서 전담하게 되었다.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세자관속이 세자시강원으로 개편된 것이 틀림없으며, 1466년세조 12 6월 기록에 ‘시강원 필선’이라는 관사 및 직명이 처음 나타나 그 이후 계속 시강원에 관한 기록이 보이므로 세조 12년 6월 이전에 세자시강원으로 개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에서는 세자시강원의 업무를 ‘세자를 모시고 경서와 사서를 강(講)하고, 도의를 올바로 계도하는 일을 맡는다.’고 하였는바, 시강원의 설치 목적은 곧 세자의 교육 및 보도에 있었다

세자시강원 관원 구성

세자시강원은 1392년태조 1 7월 개국 직후 반포된 관제에서 세자관속(世子官屬)을 설치하여 세자를 위한 강학과 시위를 맡게한 관청이다.

좌사(左師)와 우사(右師)가 각 1명, 좌빈객(左賓客)과 우빈객(右賓客)이 각 1명, 좌보덕(左輔德)과 우보덕(右輔德)이 각 1명, 좌필선(左弼善)과 우필선(右弼善)이 각 1명, 좌문학(左文學)과 우문학(右文學)이 각 1명, 좌사경(左司經)과 우사경(右司經)이 각 1명, 좌정자(左正字)와 우정자(右正字)가 각 1명, 좌시직(左侍直)과 우시직(右侍直)이 각 1명이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세자시강원의 관원은 모두 문관을 썼다. 이는 시강원이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청이었기 때문이다. 세자시강원의 관원은 겸임관원과 전임관원으로 구분되었다.
겸임관원에는 영의정이 겸임하는 정1품의 사(師) 1명, 의정(議政)이 겸임하는 정1품의 부(傅) 1명, 의정부의 찬성(贊成)이 겸임하는 종1품의 이사(貳師) 1명, 정2품의 좌빈객과 우빈객 각 1명, 종2품의 좌부빈객과 우부빈객 각 1명 등 총 7명이 있었다. 이처럼 세자시강원의 겸임관원은 종2품 이상의 고위관료가 맡았다.

전임관원에는 종3품의 보덕 1명, 정4품의 필선 1명, 정5품의 문학 1명, 정6품의 사서 1명, 정7품의 설서 1명 등 5명이 있었다.

세자시강원의 담당 직무

조선시대 세자시강원의 겸임관료를 의정부와 육조의 2품 이상 관료가 맡았던 것은 세자의 교육 및 보도가 가장 중요한 국정 현안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전임관원을 둔 것은 세자에게 이론과 실제 그리고 이상과 현실을 균형 있게 교육하기 위함이었다. 겸임관원이 종2품 이상의 노성한 경험자들임에 비해, 전임관원은 대부분 이상을 중시하는 원칙주의자들이었다. 세자는 전임관원에게서 하루 세 차례 수업을 받았으며, 겸임관원에게서는 한 달에 두세 차례 정도의 교육을 받았다.

전임관원들은 품계로 구분될 뿐 특정한 전공과목이 따로 없었다. 그러므로 전임관원들은 교과과목으로 지정된 모든 과목을 교육할 수 있었다. 전임관원들은 순서를 정해 번갈아가면서 유교 경전과 역사책을 교육했다. 보통은 경전과 역사책을 같이 교육했다. 경전은 이론이라는 측면에서, 역사는 구체적인 사례와 실증이라는 면에서 교육했다.

경전과 역사책을 교육하다가 해당 책이 끝나면 다음 책으로 넘어갔는데, 이때 세자에게 어떤 책을 교육할지는 왕과 세자시강원의 관원들이 의논해 결정했다. 사서삼경과 같은 책은 한번 교육이 끝났어도 또다시 교육시키곤 했다. 유교 교양을 습득하는 데 필요한 경전과 역사책을 되풀이해서 교육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세자의 교육은 ‘서연진강의(書筵進講儀)’라고 하는 의식에 따라 진행되었다. 서연이 거행되는 방에 세자가 앉을 의자를 동쪽 벽 아래에 서쪽을 향하도록 설치했다. 서연관원의 의자는 서쪽 벽 아래에 동쪽을 향하도록 배치했는데, 북쪽이 상석이었다. 교육이 시작되기 전에 세자는 평상복 차림으로 먼저 방에 들어가 기다리다가 서연관들이 대문 밖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서서 기다리면 방 밖으로 나와 동쪽 계단을 통해 내려와 서쪽을 향해 섰다. 그러면 서연관들이 대문 안으로 들어와 서쪽 계단을 통해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섰다. 세자가 뒤따라 들어와 자기 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면 서연관들도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답배한 후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세자가 앉으면 앞에 책상을 놓았다.

교육은 수업할 부분을 서연관이 먼저 읽고 세자가 따라 읽은 후 서연관들이 내용을 해설해 주는 방식이었다. 설명 이후에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세자가 질문하고 서연관이 대답했다. 질의응답이 끝나면 학습한 내용을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어 외우도록 했다.
학습평가는 서연관들이 일정한 기간마다 왕에게 보고하는 서도(書徒)를 통해 이루어졌다. 서도는 세자의 학습 성취를 대략 세 단계로 나누었다. 이 서도를 통해 왕은 세자의 학업진도, 학업성취도 같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교과과정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세자는 특별하게 시한을 정하는 일이 없었다. 곧 어떤 책을 어느 기간까지 끝낸다고 하는 예상이 불가능했다. 그것은 다음 교과서로 어느 책이 선정될지도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책을 끝내는 데 들어가는 시간도 전적으로 그 책의 분량과 세자의 학습능력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세자가 교육받은 책의 종류와 그 책을 교육받는 데 들어간 시간은 세자마다 차이가 났다.

서연관

조선시대의 서연관은 왕세자의 교육을 맡은 세자시강원의 관원들이다.

당상관과 당하관 즉 낭청으로 구분되었다. 당상관은 모두 겸관이었는데, 1품관인 사(師)·부(傅)·이사(貳師)는 의정부의 삼정승 또는 찬성이 겸직하여 세자의 교육을 감독하였다. 2품관인 빈객(賓客)과 부빈객은 강의를 담당하였다. 당하관은 모두 녹관이었는데, 종3품 보덕, 정4품 필선, 정5품 문학, 정6품 사서, 정7품 설서 등 약 10명이 강의를 전담하였고, 필요하면 겸관을 두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정3품 찬선(贊善), 정4품 진선(進善) 등 7~8명을 증설하기도 하였다.

서연관에게는 세자를 미래의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항상 세자를 시종하면서 도의를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매일 세 차례씩 세자를 교육하였다. 서연관들도 대부분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가치관이나 세계관·국가관은 유교로 무장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그대로 세자에게 가르친 것이다. 서연관은 온종일 세자의 주변을 돌며 유교 이념을 반복 주입하였는데, 세자가 왕이 되었을 때 신하들과 유교 이념을 공유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연관은 문과 급제자 가운데 학문과 덕망이 뛰어난 사람들을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즉 서연관의 자격 조건은 학문이 뛰어나고 단정한 사람이어야 하며, 비록 서연관에 임명되었다고 하더라도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파직되었다. 다만 과거 합격자가 아닌 유학(幼學)이라도 대신이 추천하면 자의에 임명될 수 있었다. 서연관은 세자를 가까이에서 모셨으므로 왕이나 세자의 지우(知遇)를 받을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서연관은 강학과 보도(輔導)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강학에서는 세자가 의리를 깨닫고 윤리와 도덕을 함양하도록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효제충신지도(孝悌忠信之道)’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을 우선적으로 가르쳤다. 그와 더불어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대학연의(大學衍義)』·『상서(尙書)』·『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좌전(春秋左傳)』·『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가르쳤다. 대부분 유교 경전과 유교식으로 역사를 해석한 역사서들이었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개선점 및 오류 항목 5개

  1. 전체적인 가독성을 높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눈에 잘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부러 글씨 크기를 설정한 것으로 예상되는데, 오히려 큰 글씨 크기 때문에 한 줄에 들어와야 할 문장이 세분되어 단번에 파악하기 어렵다.
  2. ‘복제본 소장’이 되어있음에도 보이지 않는 이미지가 상당수이다.
  3. 페이지 크기에 비해 이미지의 크기가 너무 작다. 클릭하면 확대해 볼 수 있다고 하나, 다운이 아닌 단순 ‘크게보기’임에도 불구하고 추가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한다.
  4. ‘KIDS' 페이지에서, 어린이를 위한 페이지임에도 불구하고 단어 선택이 불친절한 점에 대한 개선이 필요해보인다. 단적으로, 국채 1,300만 원 보상 취지서 해설에 <신민이 된 자가 충의(忠義)를 숭상하면 그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편안하며, 충의(忠義)가 없으면 그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없어지는 것은 다만 고금의 역사가 아니더라도 분명하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라고 써있다. 과연 어린이들이 이 글을 읽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어린이를 위한 페이지인 만큼, 취지서의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눈높이를 맞추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5. 사이트 메인 페이지 셋째 쪽 ’아카이브로 보는 국채보상운동‘의 존재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아카이브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메인 페이지에 실었는지 모르겠으나, 최근 대부분의 홈페이지 이용자들이 페이지 이용 방법을 따로 숙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자칫 세번째 페이지에 올라와있는 자료를 아카이빙 된 자료의 전부로 착각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더보기‘를 클릭해 아카이빙 된 개별 자료 확인 후 <목록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했을 때 아카이빙 목록이 아닌 메인 페이지가 뜬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6. 화면 크기를 줄였을 때, 아래 사진과 같이 글자 배열이 고르지 못하고 칸을 넘어간다.
국채보상운동 01 .JPG

각주

  1. 김 현·임영상·김바로, 「디지털 인문학 입문」,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2018. 17쪽
  2. 한국문화대백과사전, 경복궁

참고문헌

  1. 김 현·임영상·김바로, 「디지털 인문학 입문」,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2018
  2. 조선왕조실록
  3. 실록위키 경복궁
  4.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경복궁, 네이버 지식백과
  5. 실록위키 세자시강원
  6. 실록위키 서연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자시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