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M김지현18
목차
중간고사 문제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디지털’과 ‘인문학’의 조합이 생소하다 여겨지는 이유는 이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인문학’하면 책, 오래된 것, 아날로그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반면 디지털은 기계, 전산화 등을 연상시킨다. 때문에 두 단어의 결합이 어색하다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디지털 인문학이 활용된 사례는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인터넷 검색 한 번에 말로만 듣던 조선왕조실록의 한 페이지를 접하거나 직접 가서 보지 않고도 방안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재와 그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인문학과 디지털 기술이 융합된 결과이다. 이처럼 디지털인문학은 인문학과 정보기술이 융합된 방법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디지털 인문학의 근본적인 목적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디지털이 활용된 인문학적 연구는 ‘글’로 이루어진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수집, 저장한 뒤 연구 결과를 새로운 문서로 또 다시 저장, 이후 연구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인문학 자료의 디지털화 과정일 뿐 디지털 인문학과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김현·안승준·류인태에 따르면 디지털 인문학이란 단순히 인문학 자료를 디지털화 하거나 연구 결과물을 디지털 형태로 간행하기보다는, 정보 기술의 환경에서 보다 창조적인 인문학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1] 아날로그적인 자료를 컴퓨터를 통해 전산화하는 과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데이터를 서로 공유하여 다양한 곳에서 활용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려운 개념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사실 전문적으로 인문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만 국한되는 학문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연구한 자료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처럼 하나의 사이트에 공공의 목적으로 게시한 것은 디지털 인문학의 기본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이러한 데이터를 활용해 하나의 주제로 결집된 자료가 나무위키, 위키백과 등 일반인 누구나 언제든 수정 및 편집이 가능한 곳에 2차, 3차 게시물로 등록된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인문학은 참여적, 생산적인 태도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무궁무진한 활용 가능성을 가질 뿐 아니라 자료를 공유하고 사용하는 사람들 간에 소통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진다.
물론 하루에도 수천만 가지의 정보가 쏟아지는 현 시대에 잘못된 정보의 남발과 오용이 우려되고 특히 잘못된 정보가 확산될 경우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때문에 높은 위험성과 낮은 전문성 측면에서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경계하고 신뢰성 있는 정보를 선별하려 노력한다면 이는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 무엇보다 종래의 인쇄물로 향유되고 좁은 범위에서만 이용되던 인문학 자료가 디지털 아카이브에 축적되면서 소실되지 않고 영구히 보존될 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 및 개방되고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인문학 분야에 대한 연구가 지속·확대될 필요가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 창덕궁
이궁(離宮)을 창덕궁(昌德宮)이라 하였다. _ 『태종실록』10권 5년(1405) 10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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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 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 조선 왕조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로『태종실록』10권 5년(1405) 10월 25일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2]으로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는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크고 작은 화재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특히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서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3] 경복궁이 임진왜란 이후 고종 초년 중건될 때까지 270여 년이나 비어 있는 동안, 창덕궁은 법궁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창덕궁은 조선왕조 내내 가장 오래 존속되었고, 가장 오래 임금들이 임어하였던 궁궐이다.[4] 자연과 어우러지는 건축물들과 조경미가 뛰어난 후원이 있고 오랜 기간 왕궁으로 사용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왕실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5]
- 동궐도(국보 제249호)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건축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한 가로 576cm 세로 273cm 이며 순조 30년에 불타버린 환경전과 순조 34년에 중건된 통명전 경복전 건물은 없고 터만 그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제작 연대는 1826년 ~ 1828년 경으로 추정된다. 열여섯 폭의 비단에 먹과 채색 물감으로 당시 궁 안에 실재했던 누정, 다리, 담장은 물론 연못, 괴석 등의 조경과 궁궐외곽의 경관까지 세밀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화원들의 뛰어난 화공기법과 정밀성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동궐도는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궁궐 연구와 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6]
2. 주요 건물 및 관련 이야기[7]
- 돈화문과 인정전 : 정문 돈화문은 창덕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412년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1609년 광해군 때 복원하였다. 화려하게 단청된 이층 누각으로, 앞에 넓은 월대(月臺, 궁궐의 주요 건물 앞에 돌로 쌓은 널찍한 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는데, 왕의 행차 같은 의례가 있을 때 돈화문을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창덕궁의 정전(正殿)인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의 주요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1405년(태종 5년) 세워진 뒤 화재로 몇 차례 복원을 거쳤고 지금의 건물은 1804년 지은 것이다.
- 선정전과 희정당 : 선정전은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 다시 지어진 건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왕들이 신하들과 만나 나랏일을 논의하던 공식 집무실을 ‘편전’이라 하는데, 창덕궁 내 유일하게 지붕이 청색 기와로 되어 있다. 선정전의 ‘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으로 어진 정치를 베푼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선정전 동쪽에 위치한 희정당은 초기에는 왕의 침전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본래 이름이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년) ‘화평하고 느긋하여 잘 다스려지는 즐거운 정치’라는 의미인 ‘희정당(熙政堂)’으로 바꾸었다. 희정당은 1985년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었다.
- 대조전과 낙선재: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원래 왕비의 공간이었으나 왕자와 공주가 탄생하고 교육을 시키던 곳으로도 쓰였다. 1910년 8월 22일 대조전의 부속 전각인 ‘흥복헌’에서 조선조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한일병합’이 결정되었고, 519년 역사의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리게 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1926년 순종황제는 대조전의 흥복헌에서 승하했다. 대조전은 1917년 화재로 불탄 뒤,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와 다시 지으며 내부를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순정효황후 윤씨의 침대를 비롯한 근대 시기의 고가구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낙선재는 창덕궁의 동남쪽과 창경궁이 연결되는 곳에 자리 잡은 건물로 1847년(헌종 13년)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 낙선재(樂善齋)는 ‘선한 일을 즐겨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한 뒤 계후인 순정효황후(윤황후)가 1966년까지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고, 영친왕과 그의 아내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들도 낙선재 일곽에서 마지막까지 거주했다. 영친왕의 아들 이구의 장례식도 2005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 후원 :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1405년(태종 5년) 창덕궁을 창건할 때 조성하였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후원은 금원(禁苑) 또는 비원(秘苑)이라고 하였는데 ‘비원’은 일제 시기의 용어이다. 조선시대 궁궐의 조경 수법을 볼 수 있는 이곳은 현재도 옛 모습을 거의 잃지 않고 있으며, 100여 종 이상의 수종에 300년이 넘는 거목들과 연못·정자 등이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부용지의 전각 중 하나인 주합루는 역대 국왕들의 글과 어필을 보관하던 곳으로 정조는 관료들과 가끔 시짓기 시험을 열어, 제 시간에 시를 못 지으면 부용지 가운데의 작은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창덕궁 내 유일한 초가지붕인 청의정(淸義亭)은 1636년(인조 14년)에 세웠는데, 정자 앞에 벼를 심고, 수확 후에는 볏짚으로 정자의 지붕을 잇게 하였다. 이는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 조선총독부건물(1925년)
1910년, 9월 30일 칙령 제354호로 공포된 조선총독부 관제를 근거로[8]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으로부터 1945년의 광복 때까지 35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일본의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가 세워졌다.[9] 조선총독부는 처음에는 남산 왜성대(矮城臺)에 1907년 지은 통감부 청사를 청사로 사용 하였다.그러다가 사무 공간의 부족과 행정적 편의를 이유로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하고 그 터에 신청사를 건립하였다.[10] 원래는 동숭동 옛 서울대학교 자리와 현 시청 자리가 물망에 올랐지만. 초대 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경복궁 앞을 고집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궁궐인 경복궁을 훼손하고 그 궁궐의 정면을 막아서 고압적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웠다는 것은 조선인의 문화·역사·민족적 심리를 압도하고 일제의 우월성을 선전할 자리를 물색하며 일본이 한반도의 통치자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준공과 함께 광화문은 경복궁의 동쪽으로 이전되었고, 청사 앞에는 광장이 조성되었다.
그 당시 이미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이 일반인에게 경매로 넘어가 해체되었지만 거대한 건물군의 해체가 쉽게 진행되지 않았는데, 이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된 것이 1915년 공진회였다. 공진회가 끝나고 바로 총독부 청사를 짓는 공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 때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뿐만 아니라 진입로인 광화문통에서 경복궁을 바라보았을 때에도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 경관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공진회의 전시관 제1호관과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의 위엄을 가리고 그 권위를 부정하려는 건축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11] 1929년 9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조선박람회는 총독부 신청사를 포함한 경복궁 일대에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다. 경복궁은 누구든 넘나들 수 있고 구경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총독부 청사 권역을 포함한 경복궁 남측 영역 및 광화문이 훼철되고, 두 차례의 박람회와 전차노선의 영향으로 궁장이 철거됨에 따라 경복궁 영역은 희미해졌다. 또한 경복궁 북측 영역은 박람회장의 확장과 총독부 관사 때문에 궁궐의 경계가 나누어지고 성격이 모호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제 경계가 허물어진 경복궁은 단돈 몇 전이면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변화되었다.[12]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조선총독부 청사를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이 건물은 캐피탈 홀(Capitol Hall)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이를 한국어로 변역해 ‘중앙청’ 이라고 불렀다.(제3공화국에 들어서 대통령 집무실을 없애고, 중앙행정부서가 종합청사와 과천정부청사 등으로 분산되어 행정부의 중심부라는 뜻에서의 중앙청 기능은 소멸되어 갔다.) 중앙청은 주요 행정부처가 자리를 잡아 중앙행정관청으로서 기능하여, 권부(權府)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종합청사가 세워지고 행정기관 일부가 과천 등으로 이전하면서 권부의 상징 이미지는 점차 퇴색되었다. 또한 일제 침략의 상징적 건물이기 때문에 주요 정부기관의 집무실로 사용할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중앙청 건물은 보수를 거쳐 1986년 6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는 1990년 경복궁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논의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하다가 1993년 8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이 민족 정기 회복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사업으로 건립하라고 지시했다.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중앙돔의 해체를 시작으로 70년간 우리 땅에 버티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는 철거에 들어갔다. 1996년 11월 13일 조선총독부 건물의 지상 부분 철거가 완료되었고, 1998년 8월 8일 독립기념관은 중앙돔과 건축부재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을 개원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13]
연도 | 쓰임 |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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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 조선총독부 | 남산 왜성대 |
1926년 | 조선총독부 | 경복궁 |
1945년 | 군정청(중앙청) | |
1986년 | 국립중앙박물관 | |
1996년 |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 사이트에 접속하면 스크롤을 내렸을 때 보이는 페이지와 맨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목록을 통해 어떤 내용이 어떻게 구분되어 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에서 ‘1907KOREA’와 ‘ebook 검색’이라는 배너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두 목록은 같은 내용이기 때문에 굳이 양쪽에서 내용을 구분해야 하나 싶은 의문점이 생긴다. 특히 오른쪽 상단의 클릭창을 따라 들어간 4가지 목록은 글씨체가 너무 커 전체적인 가독성이 떨어질뿐더러 처음 사이트에 접속한다면 이 목록과 메인페이지에 보이는 목록이 서로 다른 건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두 메뉴 중 하나를 삭제하되, 직관적인 그림 아이콘이 추가되어 있는 메인 페이지의 목록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이 훨씬 깔끔할 것이라 생각한다. 또는 메인 페이지의 메뉴는 유지하고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과 같이 메인 페이지 상단에 직렬로 된 메뉴를 추가하는 방향도 제안한다.
-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설명과 내용을 담는 데에 ‘콘텐츠 보기’라는 이름과 메뉴 상의 위치가 적합하지 않다. 국채보상운동은 사이트의 핵심이자 대주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을 메뉴의 가장 앞에 위치시키고 이후 관련 아카이브와 자료 검색창으로 연결되는 흐름이 자연스럽다. 한편 ‘콘텐츠 보기’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설명을 담기엔 비교적 모호하고 애매한 표현이기 때문에 ‘국채보상운동’ 혹은 ‘국채보상운동이란’과 같은 제목이 훨씬 직관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 콘텐츠보기’ 속 첫 번째 이야기와 다섯 번째 이야기(어린이용) 구분의 필요성이 떨어진다. 둘 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다루고 있으나 후자는 어린이 접속자의 눈높이에 맞춰 좀 더 쉬운 용어를 사용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차이점은 그 뿐, 굳이 같은 설명을 두 개로 나눌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의문점이 든다. 뿐만 아니라 두 설명 맨 아래 각각 퀴즈가 2개씩 있는데 이들 역시 뜬금없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따라서 용어나 내용은 ‘첫 번째 이야기’를 따르되 어린이용 설명 방식을 참고해 사이트 이용자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통일시키는 것을 제안한다.
- 사이트를 처음 이용하는 이용자들은 ‘아카이브 검색’과 ‘전문 검색’ 간 차이가 무엇인지 헷갈릴 수 있다. 전문 검색 상단에 위치한 설명을 보면 ‘아카이브 내용 전체를 인덱스화시켜 빠르고 정확하게 다종의 문서를 검색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결국 아카이브 검색과 같은 문서를 심지어 ‘형태, 분류, 연도, 원본소장처’에 따른 같은 방식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분이 모호하다. 전문 검색을 아카이브 검색과 통일시키거나 전문 검색을 아카이브 검색과 다른 방식으로 분류한다면 훨씬 그 구분에 목적이 두드러질 것이라 생각한다.
- 아카이브 검색과 전문 검색을 클릭하면 ‘NO IMAGE’라 적인 그림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자료가 문서, 문집의 형태거나 신문이지만 시각적 자료가 없는 경우 등이 포함되는데, 이를 모르고 사이트를 처음 이용하는 이용자에겐 상당수의 자료가 ‘NO IMAGE'라 적힌 것에 당황스러울 수 있다. 또한 자료를 구체적으로 접하기 위해 소장처를 알고 싶어도 ‘기타’라 적힌 문서의 경우 해당 자료의 원본을 어디서 어떻게 접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NO IMAGE’로 표현될 수 있음을 알리는 간략한 설명을 추가하고, 각 자료의 소장처를 명확히 밝히며 링크를 연결해 사용자가 즉각적으로 해당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게 안내해준다면 훨씬 원활한 자료 검색이 가능할 것이다.
참고 문헌 및 사이트
국가기록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김현·안승준·류인태,「데이터 기반 인문학 연구 방법의 모색: 문중 고문서 아카이브와 디지털 인문학의 만남」, 『횡단인문학 창간호』, 숙명인문학연구소, 2018.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역사박물관
송인호·김제정·최아신, 「일제강점기 박람회의 개최와 경복궁의 위상변동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와 1929년 조선박람회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55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4.
『영상역사관』, 한국정책방송원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창덕궁관리소,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홍순민,「일제의 식민 침탈과 경복궁 훼손」, 『문명연지』제5권 제1호, 2004.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하』, 눌와, 2014.
주석
- ↑ 김현·안승준·류인태,「데이터 기반 인문학 연구 방법의 모색: 문중 고문서 아카이브와 디지털 인문학의 만남」, 『횡단인문학 창간호』, 숙명인문학연구소, 2018, 19p.
- ↑ 『선조실록』26권 25년(1592) 4월 13일
-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하』, 눌와, 2014, 152p.
- ↑ 국가기록원
- ↑ 창덕궁관리소,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 ↑ 국가기록원과 국가문화유산포털의 설명 인용
- ↑ 『순종실록부록』 3년 9월 30일
- ↑ 『순종실록부록』 3년 8월 29일
-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홍순민,「일제의 식민 침탈과 경복궁 훼손」, 『문명연지』제5권 제1호, 2004.
- ↑ 송인호·김제정·최아신, 「일제강점기 박람회의 개최와 경복궁의 위상변동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와 1929년 조선박람회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55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4, 134p.
- ↑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