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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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張德秀)
대표명칭 장덕수
한자표기 張德秀
분야 정치
유형 정치인,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생년 1894년
몰년 1947년12월02일
본관 결성
설산(雪山)
출생지 황해도 재령
사망지 서울
배우자 박은혜
능묘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 570(망우동 산57-1)



정의

동아일보 초대 주필, 부사장을 역임한 언론인

내용

황해도 재령 출신.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진남포이사청과 평양부청의 급사로 근무였고, 1911년 조선총독부 판임관시험에 합격하였다. 1916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8년 여운형, 김규식 등과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였다. 같은 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국내에 들어오다 체포되어 전라도 하의도에 유배되었다.
1920년 김성수가 『동아일보』를 창간할 때 초대 주필이 되었고, 후에 부사장이 되었다. 1923년부터 미국 유학을 하는 동안 북미한국유학생총회에 가입하여 부회장 등을 맡아 활동하였고, 이승만 지지단체인 동지회에 가입하여 1927년부터 허정 등과 함께 『삼일신보』의 창간 및 발간을 위해 노력하는 등 이승만을 지지,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1936년 동아일보사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부사장에서 사임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에 연루된 후 일제가 사상전향공작을 위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간부를 지내면서 기관지 『사상보국』의 발간을 주도하였고,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준비위원, 1945년 국민의용대 경성부연합 간부를 역임하는 등 친일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송진우, 김성수 등과 한국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외교부장과 정치국장 등을 지내며 당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비상정치회의를 포함한 우파 정당과 주요 정치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서울 제기동 자택에서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과 배희범에게 피살당하였다. 묘는 부인 박은혜가 1963년 10월 30일 사망하자 한국전쟁 중 분실한 비석 다시 세워 합장하였다.

연보비

전면

雪山 장덕수 선생(1894~1947 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주지(主指)를 선명하노라」에서

후면

1894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강교리에서 출생
1916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졸업 후 상해 망명 독립운동 투신
1918 독립운동하다 체포되어 하의도에 거주 제한. 신한청년단 조직.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특사 파견
1920 동아일보 초대 주필 역임. 서울청년회 조직
1936 미국 컬럼비아대학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교소로 재직
1945 한국민주당 창당하고 외교부장, 정치부장 역임하며 민주국가수립을 위해 노력

지식 관계망


시각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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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재향, "장덕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