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이 중간
onthedh
목차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이란 디지털 인문학이란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문학의 주제를 계승하면서 연구 방법 면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연구, 그리고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시도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성격의 인문학 연구를 포함한다.[1]
나에게 디지털 인문학은 이름조차 생소한 학문이었다. 막연하게 인문학과 디지털을 결합한 학문이라고 생각했지, 어떻게 결합되고 생성되며 어떤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러 차례 디지털 인문학 수업을 들으며 디지털 인문학이란 단순히 인문학 자료를 디지털화 하여 나타낸 것이 아니라 디지털 매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와 휴대폰만으로도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인문학적 지식이 재생산되는 것을 총칭하는 학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인문학은 한국 사회에서 이미 수차례 위기를 맞고 있다. 인문학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으며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바람직한 품성 함양하게 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이런 인문학은 지식과 정보의 발달로 인해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하지만 디지털 인문학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학문이었던 인문학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는 귀중한 도구이다. 시각화와 디지털 매체를 통한 손쉬운 접근이 디지털 인문학의 주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문화와 인문학적 지식을 시각화하여 알기 쉽게 전달함과 동시에 몇 번의 간단한 터치로 정보 습득이 가능하다는 점이 디지털 인문학의 강점이다. 국어국문학과 학생이자 인문학의 중요성을 주변에게 열심히 알리고 있는 나에게 디지털 인문학은 하나의 새로운 소통창구가 되었다.
나에게 디지털 인문학은 이름조차 생소한 학문이었다. 막연하게 인문학과 디지털을 결합한 학문이라고 생각했지, 어떻게 결합되고 생성되며 어떤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러 차례 디지털 인문학 수업을 들으며 디지털 인문학이란 단순히 인문학 자료를 디지털화 하여 나타낸 것이 아니라 디지털 매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와 휴대폰만으로도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인문학적 지식이 재생산되는 것을 총칭하는 학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인문학은 한국 사회에서 이미 수차례 위기를 맞고 있다. 인문학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으며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바람직한 품성 함양하게 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이런 인문학은 지식과 정보의 발달로 인해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하지만 디지털 인문학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학문이었던 인문학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는 귀중한 도구이다. 시각화와 디지털 매체를 통한 손쉬운 접근이 디지털 인문학의 주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문화와 인문학적 지식을 시각화하여 알기 쉽게 전달함과 동시에 몇 번의 간단한 터치로 정보 습득이 가능하다는 점이 디지털 인문학의 강점이다. 국어국문학과 학생이자 인문학의 중요성을 주변에게 열심히 알리고 있는 나에게 디지털 인문학은 하나의 새로운 소통창구가 되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2] 덕수궁에서 발생한 여러 역사적인 사건들은 발생 시기가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다. 덕수궁에서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황제에 자리에 올랐다. 여기에는 혼란스러웠던 국가 정세를 바로잡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 역시 덕수궁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고 여러 전각들이 다시 세워지게 되며 새로운 모습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구 근대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인 덕수궁은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통과 근대가 어우러진 독특한 궁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종의 그런 의지는 일제와 여러 세력에 의해 좌절 되었고 덕수궁 전각에는 여러 슬픈 사연이 자리 잡게 된다. 특히 1905년 중명전에서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며 을사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하였으며, 1906년 2월 1일에는 일본 통감부를 개설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첫 통감으로 부임하였다.[3] 이 사건들은 조선의 외교권이 강탈당하고 주권을 빼앗기게 되는 첫 시점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덕수궁을 우리는 길이 기억해야 한다.
년도 | 역사 | 관련 실록 |
---|---|---|
1608 광해 즉위 | 정릉동 행궁의 서청(즉조당 추정)에서 즉위 | 『광해군중초본』 광해즉위년 2월 2일[4] |
1611 광해 3 |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침 | 『광해군중초본』 광해3년 10월 11일[5] |
1623 인조 1 |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 | 『인조실록』 인조1년 3월 13일[6] |
1904 광무 8 | 경운궁 대화재 발생 | 『고종실록』고종 41년 4월 14일[7] |
1905 광무 9 | 수옥헌에서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체결 | 『고종실록』고종 42년 11월 17일[8] |
1906 광무 10 | 대안문 수리 후 대한문으로 개칭 | 『고종실록』고종 43년 4월 25일[9] |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덕수궁의 대안문은 1904년 일어났던 경운궁 화재시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경운궁 중건이 마무리되어가던 1906년 4월 25일, 고종은 대안문의 명칭을 대한문으로 변경하라는 제칙을 내린다.[10] 덕수궁 대안문은 어째서 대한문으로 변경되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당대 대중잡지에 실린 이야기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이 문은 고종이 새로 건축한 덕수궁의 정문이니 이름을 처음에는 대안문(大安門)으로 하얏다가 대안이란 안(安)자가 게집녀 자에 갓씨운 글자이고 그 대궐 짓자 양장하고 모자 쓴 녀자 배정자의 출입이 빈번하야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연하야 대한문으로 고치엇다."[11] 위의 내용은 일제강점기의 대중잡지인 <별건곤> 제65호에 실린 일화이다. 잡지에 실린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인 ‘다야마 사다코(배분남)’. 그녀는 일제 밀정자이자 매국노였다. 다음은 대중잡지 <삼천리> 제3권 제10호에 실린 글이다. "대궐의 정문은 처음에 敦禮門이라 하더니 뒤에 大安門으로 고치엇다가 安字된 것이 冠머리 아래 女字를 쓴 것이니 이것은 여자가 남자와 가튼 權利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인 즉 매우 재미업는 것이라 하야 남성의 字인 漢字로 변경하야 大漢門이라 한 것이다."[12]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변경되었던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덕수궁 정문 변경은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민감한 문제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여러 속설이 등장하게 되었지만 <대한문상량문>을 보면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이 억만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을 특별히 건다.”고 밝혀 여러 설들은 사실무근이 되었고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염원을 담아 덕수궁의 대안문은 '대한문(大漢門)'이 되었다.
"이 문은 고종이 새로 건축한 덕수궁의 정문이니 이름을 처음에는 대안문(大安門)으로 하얏다가 대안이란 안(安)자가 게집녀 자에 갓씨운 글자이고 그 대궐 짓자 양장하고 모자 쓴 녀자 배정자의 출입이 빈번하야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연하야 대한문으로 고치엇다."[11] 위의 내용은 일제강점기의 대중잡지인 <별건곤> 제65호에 실린 일화이다. 잡지에 실린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인 ‘다야마 사다코(배분남)’. 그녀는 일제 밀정자이자 매국노였다. 다음은 대중잡지 <삼천리> 제3권 제10호에 실린 글이다. "대궐의 정문은 처음에 敦禮門이라 하더니 뒤에 大安門으로 고치엇다가 安字된 것이 冠머리 아래 女字를 쓴 것이니 이것은 여자가 남자와 가튼 權利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인 즉 매우 재미업는 것이라 하야 남성의 字인 漢字로 변경하야 大漢門이라 한 것이다."[12]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변경되었던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덕수궁 정문 변경은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민감한 문제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여러 속설이 등장하게 되었지만 <대한문상량문>을 보면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이 억만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을 특별히 건다.”고 밝혀 여러 설들은 사실무근이 되었고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염원을 담아 덕수궁의 대안문은 '대한문(大漢門)'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 아카이브 검색창으로 들어가면 국채보상운동이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이 되기까지의 여러 자료를 볼 수 있다. 우선 국채보상운동이 진행되던 1907년부터의 신문 기사가 이미지로 나와 있는데 신문의 헤드라인만을 제목으로 두고 신문의 내용에 대한 설명은 없기 때문에 이 아카이브를 이용하는 대중들이 신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문 내용을 추가적으로 적어두거나 해당 신문 아카이빙 사이트로 넘어갈 수 있는 하이퍼링크를 연결하여야 한다.
- ebook 검색란은 존재하나 사용이 불가능하며 저자명, 출판사, 연도로만 검색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ebook 목록을 업데이트하거나 각 출판사의 ebook사이트로 연결할 수 있게 한다. 그 후 도서 이름으로도 검색 가능하도록 만든다. 추가적으로 ebook으로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책 도서 목록 또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이 문제에 대한 개선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아카이빙 된 여러 사진의 원본 이미지를 보기 위해 이미지를 클릭하면 한 번에 확대된 이미지가 나오지 않고 위변조 방지솔루션 설치 확인을 요구하는 페이지가 나오며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해야 원본이미지의 확인이 가능하다. 따라서 프로그램 다운로드 페이지를 나오지 않게 하거나 보안을 간단히 처리하여 정보 이용자들이 편리하게 원본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인다.
- 1907 KOREA 바로가기를 누르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진행되던 한국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모습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채 보상운동이 시작되었던 대구에 대한 설명을 하는 새로운 사이트로 연결된다. 1907 KOREA라는 이름으로 카테고리가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국채보상운동이 진행되던 1907년도의 한국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 새롭게 아카이빙하거나 1907 대구라는 이름으로 아예 카테고리명을 변경한 후 아카이브 이용 방법에 새로운 사이트로 연결됨을 알리는 것이 이 문제점에 대한 해결방안이 될 수 있다.
- follow us칸이 페이지 맨 하단에 위치하기 때문에 꼼꼼히 확인하지 않으면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여러 영상을 볼 수 없다. 또한 인스타그램 페이지는 삭제되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처음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페이지를 들어갈 때 이용자의 이목을 끌 수 있도록 영상물을 페이지에 올려두거나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아이콘의 크기를 키워 대중들이 파악하기 쉽게 하며 인스타그램 페이지를 새롭게 개설하여 홍보에 힘쓰도록 한다.
참고 문헌 및 사이트
김현, 김바로, 임영상『디지털 인문학 입문』
홍순민『우리 궁궐 이야기』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 관리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국가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각주
- ↑ 김현, 김바로, 임영상, 『디지털 인문학 입문』, HUEBOOKs, 2016, 17p
- ↑ 국가문화유산포탈 덕수궁 소개
-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50p
- ↑ 『광해군중초본』 광해즉위년(1608) 2월 2일
- ↑ 『광해군중초본』 3년(1611) 10월 11일
- ↑ 『인조실록』 1년(1623) 3월 13일
- ↑ 『고종실록』 41년(1904) 4월 14일
- ↑ 『고종실록』 42년(1905) 11월 17일
- ↑ 『고종실록』 43년(1906) 4월 25일
- ↑ 『고종실록』 43년(1906) 4월 25일
- ↑ <별건곤> 제65호(1933년 07년 01일)
- ↑ <삼천리> 제3권 제10호(1931년 10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