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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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 내정에 관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조선 침략을 위한 영향력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는데 명성황후가 이를 주도하였다.
이에 친일세력인 박영효는 1895년 7월 명성황후시해 음모를 계획하였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달아나고 친일파는 세력을 상실하였다. 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게다가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사건의 전개

일본에서는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安達]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명성황후 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安駉壽)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다 사망하였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에 묻었다.

을미사변 결과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여 친일파인 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정병하(鄭秉夏)·김종한·권형진(權瀅鎭) 등이 내각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의 전말이 외부에 알려졌다. 조선 국민의 대일 감정은 극도로 나빠져 제천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며 국제적으로도 거센 비난이 일어났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사건 처리 방안으로서 미우라 공사를 해임하고,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을미사변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었고,
이에 친일 내각은 실각하고 김홍집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친일파로 몰려 군중들에게 피살되었다. 조선은 러시아의 보호 속에서 자주권이 훼손되고 내정간섭을 받게되었으며, 내각은 친러파가 장악하면서 일본은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