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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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경희궁의 침전으로, 왕과 왕비가 거주하는 내전 구역에 있었다.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먹고, 자고, 입고, 사람도 만나며 쉬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이 곳이 바로 그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다.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로 융복전 서쪽에 위치한 회상전(會祥殿)이 있다.

이 곳이 왕의 침전인지, 아니면 왕비가 머물렀는지 명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이는 같은 기능의 회상전도 마찬가지이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熙宮志)》에는 ‘융복전이 경희궁의 정침(正寢)이며 회상전은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라 적혀있는데, 《궁궐지(宮闕志)》에는 '회상전이 궁궐의 정전(正殿, 여기서는 내전의 정전을 의미한다.)이며 융복전은 단지 회상전 동쪽에 있는 건물'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회상전보다 동쪽에 위치한 점,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등에 왕과 왕비, 대비 등이 거처했단 기록이 전해지는 회상전과 달리, 융복전은 임금 외에 사용한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왕의 침전’으로 추정된다.

이름은 '복(福)이 융성(隆)한다'는 뜻이다.

역사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어졌으며 침전으로 기능을 처음 시작한 것은 1624년(인조 2년)부터이다. 현종 시기 승하한 인선왕후 장씨의 빈소로도 사용했으며, 숙종 시기 1693년(숙종 19년)에 수리한 것 이외엔 별 일 없이 19세기까지 제 기능을 했다. 숙종은 이 곳에서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펼치기도 하는 등 가장 많이 활용했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회상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경희궁 내전 일곽 대부분이 불 탈 때, 함께 소실되어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다. 순조가 승하한 이후 즉위한 왕들인 헌종과 철종은 경희궁보다는 창덕궁에 오래 머물면서 융복전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들의 90%를 헐어다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쓸 때, 철거되었다.

구조

서궐도 내전1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 내전 영역. 주황색 원이 융복전, 보라색 원이 회상전, 초록색 원이 집경당이다. 융복전의 옛 모습을 보려면 〈서궐도안〉과 《서궐영건도감의궤》(이후 편의상 의궤로 부름)를 보아야 하는데 서로 묘사한 외관이 약간 다르다. 〈서궐도안〉에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되어있지만, 《의궤》를 보면 정면이 6칸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경희궁 내전 건물 대부분이 1829년(순조 29년)에 소실되고 다시 지은 것으로, 〈서궐도안〉은 화재 이전, 《의궤》와 사진은 그 이후의 모습이 담겨있는 것이라 중건할 때 건물의 형태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의궤》와 사진을 보면 정면 가운데 2칸은 툇마루가 밖으로 돌출되게 하고 분합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했는데 〈서궐도안〉에는 돌출된 툇마루가 없고, 서쪽 가장자리 칸과 가운데 칸, 그리고 그 바로 동쪽 옆 칸으로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서궐도안〉에 따르면 겉면의 창은 (남쪽에서 바라볼 때) 왼쪽에서 2번째와 동쪽 면 제일 끝 칸에 두었고,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고 나머지 부분은 벽으로 막았으나 《의궤》에는 머름 위에 전면창호를 단 모습으로 나온다.

공통적인 부분은, 1층[1]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각 기둥을 세운 뒤, 쇠서[2]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짓고,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또 건물 앞면엔 돌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폭이 좁은 돌판을 얹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다. 넓은 월대를 정면에서 약간 서쪽으로 틀은 다음 놓아 침전의 위엄을 살림과 동시에 행사가 있을 때, 보다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계단은 월대의 동, 서, 남쪽에 각각 1개씩, 그리고 건물 정면의 동쪽 끄트머리에 5단의 계단을 하나 놓았다. 주변 행각과 담장에 다섯 개의 문을 달아 융복전 영역으로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동쪽은 금명문(金明門), 서쪽은 연경문(延慶門), 연경문의 서쪽에 청상문(淸商門), 그리고 남쪽은 일영문(日永門), 북쪽은 개경문(開慶門)이라 했다. 〈서궐도안〉 및 《서궐영건도감의궤》를 보면 지붕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 바로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형태인데, 융복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 왕과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3]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