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 터
비변사 터 (備邊司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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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명칭 | 비변사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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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備邊司址 |
설치연도 | 1997년 |
주소 | 율곡로 96(와룡동 5-6) |
표석 문안
조선시대 외적의 방어와 국가 최고 정책을 논의하던 관아 터. 중종 때 창설되어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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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편년자료 및 고전번역서
성종 대 의정부, 병조 외에 국경 지방의 요직을 지낸 인물을 필요에 따라 참여시켜 군사에 관한 일을 논의하게 하였는데, 이들을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 혹은 지변재상(知邊宰相), 지변사(知邊事)라고 불렀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지변사재상을 소집하여 방어책을 논의하는 한편, 그동안 변칙적이며 편의적으로 유지해오던 지변사재상과의 합의 체제를 고쳐 임시적으로 비변사라는 비상시국에 대비하는 기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한동안 지변사재상, 지변재상이라는 명칭은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해당 명칭들은 비변사가 관제상의 상설 관아로 정제화되는 1555년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중종 12년(1517)이 되자 여진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사(築城司)를 설치, 이를 곧 비변사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520년에 폐사군(廢四郡) 지방에 여진이 칩입하자 다시 비변사를 설치하는 등 주로 외침을 당해 정토군(征討軍)을 편성할 때 비변사가 임시로 설치되었다.[1]
축성사를 고쳐 비변사라 하다
改築城司, 稱備邊司。 축성사(築城司)를 고쳐 비변사(備邊司)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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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권28 > 중종 12년 정축(1517) > 6월 27일(신미) |
1554년(명종 9) 후반부터 잦아진 변방의 외침이 이듬해 을묘왜변으로 이어지면서 독립된 합의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즉, 1554년부터 비변사 당상관들은 종래처럼 빈청(賓廳)에 모이지 않고 비변사에 모여 변방의 군사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여 처음으로 독립된 관청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을묘왜변이 일어나 그 활동이 잦아지는 것과 함께 청사도 따로 마련하고 관제상의 정식아문(正式衙門)이 되었다.[2]
비변사 설치 당시의 청사 위치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고 있는 사료가 없다. 다만 이후의 양상을 통해 임금이 기거하는 궁궐 가까이에 지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즉 비변사의 첫 청사는 경복궁 앞, 육조거리 근처에 위치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궁인 경복궁이 불타면서 이후의 임금들은 경복궁 동쪽 창덕궁, 창경궁과 서쪽 경희궁에서 정사를 돌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비변사도 두 궁궐 근처에 두 개의 청사를 지어 왕의 움직임에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비단 비변사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관상감(觀象監), 훈국신영(訓局新營) 등 타 관청들도 청사를 두 곳에 두고 있었던 것이 여러 지도에서 확인된다.
사료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나타난다.
1623년 인조반정,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경희궁이 임시 정궁으로 기능한다. 즉 당시 왕인 인조가 경희궁에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덕궁 앞 비변사 청사는 사용될 일이 없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성정각에서 약원 부제조 홍국영을 소견하였다.
予曰。 實錄廳處所。定以何處乎。左承旨 鄭民始曰。以慶熙宮前備邊司爲之云矣 내가 이르기를, “실록청의 처소는 어느 곳으로 정했는가?” 하니, 좌승지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경희궁(慶熙宮) 앞 비변사로 정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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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성록』 > 정조 2년 무술(1778) > 2월 19일(경술) |
정조 대에는 반대의 상황이 나타난다. 즉 정조가 창덕궁을 거처로 삼으면서 경의궁 앞 비변사 청사가 비게 되고, 사용처가 없어진 공간을 실록 편찬 장소로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비변사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전쟁 수행을 위한 최고 기관으로 활용되면서 그 중요성이 커졌다. 효종 대에 이르면 비변사는 군사 문제를 협의하는 관청이라는 명칭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비빈(妃嬪)의 간택까지도 처리하는 등 국정 전반을 관장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1864년(고종 1) 국가 기구의 재정비를 단행하면서 의정부와 비변사의 사무 한계를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비변사는 종전대로 외교·국방·치안 관계만을 관장하고, 나머지 사무는 모두 의정부에 넘기도록 하여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 격하시켰다. 또, 이듬해에는 비변사를 폐지하여 그 담당 업무를 의정부에 이관하였다.
위 사료를 통해 비변사 혁파 이후 그 관청(비국)을 조방(朝房)으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기요람』에 비변사 설치 및 조직 구성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비변사 관청이 두 곳에 위치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나온다.
비변사(備邊司)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밖에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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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증동국여지승람』권2 > 비고편-동국여지비고 권1 > 경도(京都) |
『한경지략』에도 역시 두 비변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근현대자료
1896년 11월 12일자 『독립신문』에는 ‘비변사골’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새문안 대궐 압 비변사골 리션여란 놈이 매일 슐을 대취 하고 동리로 다니면셔 야료를 하고 제 집 안에셔는 졔 어미를 때린다고 황덕쥰의 편지가 신문샤에 왓스니 이런 놈은 경무쳥에셔 잡지 아니 하는지 알슈 업더라 | ||
출처: 『독립신문』 > 1896년 11월 12일 > 경도(京都) |
‘새문안 대궐’이란 민간에서 경희궁을 이르던 말이다. 위 자료를 통해 비변사가 혁파된 이후에도 경희궁 앞 일대가 ‘비변사골’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세기 이후로는 왕들이 주로 창덕궁에 기거하였음에도, 경희궁 앞 비변사 청사의 존재감은 유지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지도 및 도판자료
18세기 중반(1753-64년경) 지도인 <도성대지도>에는 비변사의 위치가 두 곳으로 표시되어 있다.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앞으로 비변사(備邊司)라는 글자가 보인다. 같은 지도에서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앞에도 비변사가 표기되어 있다. 100여년 후인 19세기 중엽 발행된 수선전도에서 확인해 보아도 마찬가지로 두 위치 모두에 비변사가 표시되어 있다. 다만 비변사(備邊司)가 아니라 비국(備局)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는 관상감(觀象監)을 覌象, 훈국신영(訓局新營)을 訓營 등으로 표기하였다.
60여년 후 제작된 지도들에서 같은 위치를 확인해 보면 비변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한편 17세기에 그려진 <비변사문무낭관 계회도(備邊司文武郞官契會圖)>에서 창덕궁 돈화문 앞 비변사 건물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630년 비변사(備邊司) 비변랑(備邊郞) 선약해(宣若海, 1579-1643)가 국서를 가지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그의 공적을 치하하는 자리로 보인다.[3]
현재 표석이 있는 와룡동 5-6번지(창덕궁 앞)는 올바른 위치이다. 고지도에 표기된 바를 따르면,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일대(경희궁 앞)도 비변사 터로 확인된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 ↑ “비변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비변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열, "(77)매봉이 보이는 비변사에서 비상한 시국을 생각한다",
『김달진연구소』online , 열람일: 2018.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