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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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조직된 제4차 김홍집(金弘集)내각은 일세일원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군제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 세력은 친위대(親衛隊)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만회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희망에 따라 러시아 공사 베베르(Waeber)와 협의하여 보다 안전한 러시아 공관(공사관)으로 이동(파천)하였다.

이들은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50명과 포(砲) 1문을 서울로 이동하고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다. 일국의 왕과 왕세자가 자국의 왕궁에 있지 못하고 타국의 공관에 피신하여 타국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그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친일파 대신들인 김홍집(총리대신)·유길준(兪吉濬)·정병하(鄭秉夏 농상공부대신)·조희연(趙羲淵)·장박(張博)의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참담한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을 자극하는 방(榜)이 나붙고, 그 속에 고급 관료들을 거명하며 참수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순검들과 흥분한 군중들은 퇴청하던 김홍집·정병하를 체포하여 바로 타살하였고, 피신한 어윤중(魚允中 탁지부대신)은 다음날 지방에서 붙잡혀 살해되었다. 유길준·조희연·권형진(權瀅鎭)·우범선(禹範善) 등은 일본인의 보호하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한 동안 잠적했던 김윤식(金允植 외부대신)은 결국 체포되어 다음해에 제주도로 종신 유배당하였다.
이로써 친일내각은 몰락하고, 박정양(朴定陽)·이완용·조병직(趙秉稷)·이윤용(李允用)·윤용구(尹用求)·이재정(李在正) 등 친러 친미파 인사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에 힘쓰는 한편, 친일정권하에서 일본식으로 개혁하였던 ‘내각’제도를 구제(舊制)인 ‘의정부’제로 환원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공포가 도사린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一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조선 정부가 이와 같이 나약하여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이러한 시점을 계기로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종성(鐘城)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관파천 1년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士官)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가 구입되어 중앙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탁지부 고문으로 있던 러시아인 알렉세예프(K. Alexeev)는 탁지부대신처럼 행세하였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 -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