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현18연습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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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화문
금천교
건명문
숭정문
숭정전

숭정문 안쪽에 회랑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외전 영역의 중심인 조정이며 이 조정의 중심이 되는 정전은 숭정전이다.숭정전은 신하들의 조회를 받는 정전[1]으로 기능과 용도가 예를 행하는 것으로 정해진 격이 높은 법전이었다.[2] 1720년(숙종 46) 경진에 경종이 숭정전에서 즉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3] 1910년 숭정전은 일제에 의해 경희궁에 경성중학교가 설립될 때도 남아있었으나 1926년 중구 필동 남산 기슭의(지금의 동국대학교 터) 조계사의 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전되었고, 1977년 동국대학교 만해광장터에 있던 것을 이전・복원하여 동국대학교 안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정각원(正覺院)이라는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정각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나 정면 내부 상단에는 ‘숭정전’이라는 현판이 남아 있고, 현재의 숭정전은 기단부가 훼손되어 원형이 남아있지 않으나 계단석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4] 숭정전은 경희궁에 있던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진 장엄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울시에서는 1985년부터 5차례의 발굴 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현재 경희궁에는 6년에 걸쳐 복원 작업이 이루어진 숭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경희궁 숭정전은 창경궁 명정전과 함께 특히 조선 중기 궁궐 건축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5]

자정전

숭정전의 뒤쪽에 위치하고 남쪽에는 자정문을 둔 자정전[6]흥정당과 함께 경덕궁의 두 개 중 외전 영역의 편전을 담당했다. 인조가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괄의 난으로 다시 창덕궁과 창경궁이 소실[7]되자 인조는 경덕궁을 사용하였는데, 1624년(인조 2)에는 경덕궁에 거처하는 동안 자정전을 편전으로 활발히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8] 자정전은 원래 임금이 국사를 논의하는 회의인 상참이나 경연을 열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고위 신료들을 만나는 편전으로 쓰였다. 그러다 숙종 대부터 어진이나 신주를 임시로 봉안하거나 승하한 임금의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으로 썼고, 이런저런 시험을 보거나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도 쓰였다.[9]

태녕전(태령전)

자정전 서편에 위치한 태녕전은 1744년에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으로 쓰기 위해 크게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10] 이를 선례로 정조는 1779년(정조 3) 영묘의 어진을 선원전으로 옮겨 봉안하고[11] 1781년(정조 5) 주합루에 정조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게 하였다.[12] 하지만 이후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고종 대 경복궁 중건 시기에 경희궁을 헐어 자재로 쓰면서 사라졌다.


개양문
흥원문

참고문헌

조선고적도보 10,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국립문화재연구원
  1. 서울학연구소, 『궁궐지 2』, 1994, 92p.
  2.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하』, 눌와, 2014, 455p.
  3. 경종실록 1권 즉위년(1720) 6월 13일
  4. "정각원으로 이름이 바뀐 숭정전", 서울역사박물관
  5. "경희궁 숭정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6. 서울학연구소, 『궁궐지 2』, 1994, 93p.
  7. 경복궁과 창덕궁·창경궁은 이미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이후 점차 복원되었다.
  8. 인조실록 4권 2년(1624) 2월 23일
  9.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하』, 눌와, 2014, 460p.
  10. 영조실록 60권 20년(1744) 8월 20일 갑자 두번째기사
  11. 정조실록 8권 3년(1779) 11월 25일 을사 첫번째기사
  12. 정조실록 12권 5년(1781) 9월 16일 을묘 두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