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개 (銅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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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명칭 |
구리개 |
한자표기 |
銅峴 |
영문명칭 |
Gurigae Ridge |
설치연도 |
2016년 |
주소 |
남대문로 90(을지로2가 199-15) |
표석 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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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개는 조선시대에 이곳에 있었던 나지막한 고개이다. 흙빛이 구리색과 같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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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편년자료 및 고전번역서
九里介, 仇里介, 銅峴으로 표기되는 구리개는 지금의 을지로 입구 역을 조금 지나 을지로 2가에 이르는 구역을 가리킨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황토흙으로 된 이 고개는 땅이 몹시 질어서 먼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으므로 구리빛이 나는 고개, 구리고개 혹은 줄여서 구리개라 불렀다고 하나 관련하여 정확하게 유래를 설명해놓은 기록은 없다. 이 근처 마을은 고개 이름을 따서 동현동(銅峴洞)이라 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의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으로 조선시대 한양 서민들의 질병 구제를 담당했던 혜민서가 속해있던 구역이기도 하다. 때문에 약재상들이 구리개 일대에 모여 있었으며 이러한 모습은 춘향전에서 왈짜들이 춘향에게 먹일 약을 구리개 약방에 가서 지어오라고 하는 대화라든지, 지방의 선비나 외국인이 한양의 풍경을 묘사하는 글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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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동현으로 옮기고 숭례문을 닫게 하다 命徙市于銅峴, 閉崇禮門。 故事, 旱則徙市閉南大門, 時旱災未至太甚, 上刻意民事, 深恐傷農, 凡所以救旱之事, 靡不擧行。 명하여 저자[市]를 동현(銅峴)으로 옮기고 숭례문(崇禮門)을 닫게 하였다. 예전 일에 가물면 저자를 옮기고 남대문(南大門)을 닫았었는데, 이때에 한재(旱災)가 매우 심한 데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임금이 백성의 일에 마음을 졸이고 농사를 상하게 할까 깊이 두려워하여, 무릇 가뭄을 구하는 일이라면 거행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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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종실록 6권, 예종 1년(1469) 7월 13일 갑오 5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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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지자 남문을 열고 북문을 닫고 저자를 옮기다 開南門, 閉北門, 撤市還舊廛。 故事, 天旱則閉南門, 開北門, 移市銅峴, 雖得雨, 待秋復常。 至是因霖澇浹旬, 禮曹請撥例施行, 上從之。 남문을 열고 북문을 닫았다. 철시(撤市)하고 옛 시전(市廛)으로 돌아갔다. 고사에 날씨가 가물면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고, 저자를 동현(銅峴)으로 옮기고 비가 내리더라도 가을이 되어서야 평상시대로 돌아갔다. 이때에 이르러 열흘 동안 장마가 지자, 예조에서 전례를 끌어대어 시행하기를 청하자, 상이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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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조실록 48권, 인조 25년(1647) 6월 23일 임진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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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道重이 都城 內外의 僵屍를 摘奸한 결과를 보고하는 漢城府의 계 李德成, 以漢城府言啓曰, 本府參軍兪道重, 與五部官員, 今二月初三日至初五日, 都城內外僵屍, 眼同摘奸, 則東部字內金衆契, 有一屍, 昌善坊契, 有一屍, 西部字內阿峴近處, 有二屍, 文智兀近處, 有二屍, 南部字內靑寧尉契, 有三屍, 瓦有頭里契, 有一屍, 竹前洞契, 有一屍, 甫十外契, 有一屍, 仇里介契, 有一屍, 會賢洞契, 有一屍, 北部字內安國坊契, 有一屍, 中部字內古兵曹契, 有一屍, 鍾樓西邊契, 有一屍, 水標東邊契, 有一屍, 河順元契, 有一屍, 東部·南部·中部僵屍, 則埋置於水口門外送葬峴近處, 西部·北部僵屍, 則埋置於西小門外大峴近處之意, 敢啓。傳曰, 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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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376책 숙종 24년(1698) 2월 6일 신해 12/20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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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京詞 (생략)... 靈艸神根法製良。每經銅峴已知香。上頭詑與希材蓄。南士新來好異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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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암고(重菴稿)> 重菴稿册一 詩, 강이천(姜彝天, 1769-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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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자료
<경성부사>에는 1914년 경성부 정·동의 명칭과 구역을 정하면서 황금정(黃金町)이라는 지명에 대해 옛 이름 구리개(銅峴)에서 구리를 황금으로 바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황금정은 1정목에서 7정목까지 있었으며 경성 내 금융업, 상업, 인쇄 회사가 몰려있는 대표적인 비즈니스 구역이기도 했다. 이를 반영하듯 20년대 이후의 소설에는 회사원이라 하면 황금정으로 출근하는 묘사가 실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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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部에서 銅峴과 安洞에 各各 官立小學校를 設置하고 8歲에서 15歲까지의 學童을 募集함을 廣告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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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시대사 4 建陽 元年(1896) 7月 3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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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淸川保 등이 발간 계획한『朝鮮타임스』의『漢城新聞』으로의 改稱, 초판 발행 준비 件 위 외에 한국인 2~3명이 발기인이 되어 京城 黃金町 1번지에서『朝鮮타임스』라는 한자신문을 발행하고자 계획 중이라는 취지를 이미 보고하였는데, 그 명칭을『漢城新聞』으로 변경하고 5월 5일경 첫 호를 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主義는 주로 상공업 발달을 도모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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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統監府文書 6권 憲機第八六四號 1909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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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藥業組合의 조직 京城에 있는 주요 한국인 藥種 업자 간에는 일찍이 영업의 통일을 꾀하고 경쟁적인 폐해를 피하기 위하여 동업조합 조직 의논이 있었지만 그간 여러 주장이 통합되지 못하여 덧없이 오늘에 이르렀는데, 근래 衆議가 일치하여 藥業總合社라는 명칭 아래로 동일 보조를 취하기로 하고 지난번 임시 사무소를 南部 太平坊 犂洞(銅峴) 18통 8호 현 德川郡守 柳基泳의 집에 설치했는데 그저께 19일부터(以下缺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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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統監府文書 6권 憲機第一八○一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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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長을 候爵 朴泳孝로 한 貴族들의 親族團體인 同族會 結成總會가 銅峴 大同俱樂部에서 開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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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每日申報 1911년 09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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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월요일》 화창한 날씨. 류상하(柳相夏)에게 편지 보냄. 새벽 5시에 일어났다. 6시 30분쯤 황금정(黃金町)에 가서 적십자사 회원들에게서 떨어져서 남쪽 편 보도에 자리를 잡았다. 오전 9시쯤 일본식 장례행렬이 통과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광무태황제의 유해가 담긴 관대(棺臺)를 향해 경건하게 모자를 벗었다. 대여(大轝)가 우리 옆을 지나갈 때 일본인들은 웃기도 하고 모자를 벗지 않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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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6 1919년(기미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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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囊으로부터 (생략)...親舊의 餞送을 爲하야 南大門驛을 가겟지오. 電車를 안이 탓슴닛가? 車內가 엇지 複雜하든지오. 그러나 나는 자리에 안졋던 터임니다. 구리개를 가닛가 더 複雜하야지며 2, 3人의 아씨님네가 오릅듸다. 그들이 모든 乘客틈에 끼여 서서 이리 빗슬 저리 빗슬하는 光景이 넘우나 딱합듸다. 그래 나는 선뜻이 일어서며 엇던 아씨님을 向하야 「이리 안즈십시오」하고 溫恭한 語調로 자리를 讓渡하얏슴니다. 그러닛가 그는 눈을 힐금하더니 아조 沒情하게 「괜챤소.」하고 샛득합듸다. 엇더케 未安하던지오...(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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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벽 제2호 1920년 0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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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수요일》 후덥지근함 오전 11시 50분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기차에 타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3시 30분 용산역에 내렸을 때,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종로행 전차를 탔다. 구리개(黃金町)에 도착했을 때, 전차가 종로까지 가지 않으니 내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종로까지 걸어가는 동안 누군가에게 전차 운행이 갑자기 중단된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3시 30분에 YMCA회관에서 미국인 일행 환영연회가 열리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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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6 1920년(경신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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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日夜 米議員團을 迎한 後 京城의 萬歲騷擾眞相, 뎡거장에셔 비롯하야 남문안 태평동 구리개 대한문압 송로통등 각처에서 수쳔의 군중 「독립만세」를 부르고 경관과 크게 격투하야 륙혈포를 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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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일보 1920년 08월 26일 3면1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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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玄黃 (생략)...어한 高等普通學校의 植物學先生님이 同校에 가티잇는 日本人敎師와 塔洞公園에 散步를 갓섯다 그마츰 公園한 모통이에는 鷄冠花(맨두람이)가 滿發하얏는데 日本人敎師가 그 植物學先生님에게 이것은 朝鮮말로 무엇이며 漢字로는 어쓰느냐고 물엇다 그 植物先生님은 朝鮮말로 맨두람이라는 것은 아나 漢字로 어쓰는 것은 알지못하얏다 그러나 所謂植物學敎授하는 사람으로서 모른다하기는 넘우도 昌皮하야서 扇狀花 (부채가티보이는 닭이엇다) 라고 抑制로 對答을 하고 日本人에게 反問한 즉 日本에서는 鷄冠花라고 쓴다하얏다 그 先生님은 그 後 學校에서 學生에게 이 事實을 말하되 日本은 科學이 發展되어 植物의 名詞도 다가티 適當하게 지엇스나 우리 朝鮮은 아즉 科學이 發達되지 못하야 物名도 確實한 者가 업슴으로 敎師나 學生이다 困難한 일이만히잇슨 즉 諸君은 熱心으로 工夫를 잘하라고 訓戒 비슷하게 하얏다한다 現下朝鮮에 科學이 發達되지 못하야 敎師나 學生이다 困難하다 함은 누구나가 다 그 先生님의 말에 同情하는 바이다 그러나 鷄冠花가튼 名詞는 비록 科學이 發達되지 못하얏다할지라도 朝鮮에서 前日부터 固有하게 쓰는 名詞다 그 先生님이 日本에 가서 高等師範學校卒業하지 말고 구리개 藥房에 가서 藥性歌나마 한번 읽것더면 그 困難이 업섯슬것이다 그러나 鷄冠花를 扇狀花라한 것은 日本女學校敎員이「데모크래시」를 毒藥이라 對答한 것보다는 좀낫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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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벽 제28호 1922년 10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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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人의 勢力으로 觀한 朝鮮人 京城 (생략)... 京城府는 186개소의 町洞에 구분되야 잇슴니다. 즉 「ヤマトマチ」니 「メイチマチ」니 「マチ」라고 불너야 제 맛이 생기는 101개소의 「町」과 「잿골」이니 「똥골」이니 「골」이라고 불러야 제 맛이 생기는 85개소의 「洞」이 잇습니다. 「町」은 「マチ」라는 日本말로 불러야 맛이 생기리 만콤 대체로 日人의 獨天地외다. 「洞」은 「골」이라고 불러야 녯날 맛이 생기리 만콤 대체로 녯날의 주인인 朝鮮人 최후의 退居地외다. 그런데 日本人獨天地는 101, 朝鮮人退居地는 85, 이만 하야도 상세한 설명은 필요치 안니하나 市區의 형성과 주민의 분포상태를 개괄적으로 간단히 소개하야 未洽을 보충하려 합니다. 同一한 목적, 相似한 규범, 균등의 세력 하에 잇는 幾個의 부락은 자연적으로 同一한 區域에 모히어 각각 특수한 一群을 형성합니다. 이것이 都會의 특색인 동시에 도회 자체가 발달하는 경로외다. 뿐만 아니라, 진실로 도회의 완성을 求하려면 인위적으로라도(自然相을 기초로 하고 이용할 것은 물론) 이러케 만들어야 할 것이외다. 그러면 京城의 그것은-京城의 상업지, 공업지, 주택지는 어느 방면이며 장차 어느 방면으로 하는지 이에 대하야는 當局의 도시계획상, 비밀에 붓친 것임으로 분명한 것은 알 수 업스나, 현재 형성되야가는 상태와 當局의 여러 가지 시설을 종합하고 아울러 자연의 고유한 地勢를 살펴보면, 대개는, 別判할 수 잇습이다. 상업지대는 黃金町 大道를 중심으로 하야 남측으로, 明治町1, 2丁目, 永樂1, 2丁目, 櫻井町1, 2丁目, 若草, 花園, 初音 등 諸町과, 북측으로 黃金町1, 2, 3, 4, 5丁目. 本町1, 2, 3, 4丁目, 南大門通1, 2, 3, 4, 5丁目, 南北米倉町, 義州通1丁目, 御成, 古市, 和泉, 吉野 등 諸町 鍾路, 1, 2, 3, 4, 5丁目과 이에 딸린 약간의 諸洞...(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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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벽 제48호 1924년 06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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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城의 二十年間 變遷 / 大京城回想曲 李光洙 (생략)...그때의 京城의 本名은 漢城府다. 漢城府에는 判尹이 잇던 것도 우에 말하엿다. 그러고 漢城府는 東署, 西署, 南署, 北署의 4署로 갈렷섯다. 署 밋헤는 坊이 잇고 坊 밋헤 統이 잇고 統 밋헤 戶가 잇서서 가령 엇던 주소를 쓰랴면 「漢城府 西署 淸進坊 中學洞 五統 三戶」 이 모양이엇고 漢城은 흔히 皇城이라고 썻스니 大皇帝 게신 都城이탄 뜻이다.
그 때에는 아직 京城은 「町」이니 「丁目」이니 「通」이니 하는 萬古 歷代에 보지도 못하던 글자를 가진 地名은 업섯다. 지금 光化門通이라는 데는 「黃土峴」(황토마루) 「黃金町」이라는 데는 銅峴(구리개) 茶屋町이라는 데는 上茶洞(웃다방ㅅ골) 下茶洞(알엣다방ㅅ골)이오 鍾路一丁目은 샌전병문 鍾路四丁目은 통안 또는 배오개ㅅ병문 明治町은 明洞이오 若草町은 草洞이오 朝日町은 會洞이오 長谷川町 近傍은 大公洞 小公洞이오 모도 이 모양으로 朝鮮ㅅ사람이 지은 일홈이엇다.
新主人인 日本人에는 그 일홈이 불편하닛가. 「三坂通」 「義州通」 「朝日町」 「本町」 이 모양으로 모도 저희 式으로 고처버리고 말앗고 新主人이 고치닛가 舊主人들도 新名으로 불러야 有識하게 되엇고 겨오 老婆와 「병문친구」들의 입을 빌어 舊時의 지명이 전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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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벽 제48호 1924년 06월 01일/ 별건곤 제18호 1929년 01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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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월요일》 맑고 더움 서울 집이다. 오전 7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모친, 장선이, 기선이와 함께 황금정(黃金町)에서 거행된 순종황제 장례식 예행연습을 보았다. 이런 유형의 장엄한 행진은 이번 장례식이 거행된 뒤에는 조선에서 결코 다시 볼 수 없을 광경이다. 그래서 모든 조선인이 이 행사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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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8 1926년(병인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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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正 後의 京城 街上의 人生과 現實의 一面(一) 聲斷曉頭 花柳群 舞蹈曲에 行進茶坊, 주정꾼의 무도국에 거지는 밥 달라고 애걸복걸 젊은 놈팽이 하나에 기생이 셋식이나 대롱대롱 (第一驛 구리개 네거리 暗行記者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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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일보 1926년 05월 26일 2면3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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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동안에 서울 구경 골고로 하는 法, 시골親舊 案內할 路順 (생략)...아츰을 먹고는 北村의 徽文이나 中央高普를 차저 학부형이라 하고 敎授狀況이며 시설을 구경하고 齋洞女子高普를 또 구경하고 그 뒤ㅅ마당에 600년된 白松을 구경하고 나서서 구리개를 건너 東洋拓殖會社를 보아 두고 그 엽흐로 올너가다가 예전 京城府廳 지금의 職業紹介所에 가서 서울의 실직자들의 서른 사정을 듯고 또 보아야 할 것일세. 그래야 정말 서울 구경을 똑똑히 하는 것이 아니겟나. 거긔서 나와서 진고개 마르턱을 구경하지만은 여긔는 電氣燈 켜진 후에 보아야 할 것이닛가 그냥 대강대강 지나서 예전 총독부 터에 科學館을 보고 그리고는 다시 나려와서 구리개를 꾀뚤는 電車로 昌慶苑 구경을 하다가 식물원 압헤서 점심을 먹고 나와서 大學病院은 바라만 보고...(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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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별건곤 제23호 1929년 0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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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城市廛의 變遷 李重華 銅峴은 俗이 『구리개』라 稱하야 『九里峴』라이 或稱하나니 今 黃金町2丁目 입구의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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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별건곤 제23호 1929년 0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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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城洞町名의 由來 及 今昔의 比較, 서울의 洞里 일흠푸리- 洞名 하나에도 史的 由來가 잇다 (생략)...太平通은 舊 太平洞에다 町字만 부친 것이니 太平洞은 원래에 太平舘이 잇섯던 까닭이오 舟橋町도 역시 前名 舟橋洞을 仍用한 것이고 明治町은 舊 明洞 壽町은 舊 鑄洞(鑄字골)의 鑄字에서 壽字만 띄여 일본 지명과 符合케 한 것이다. 元 鑄字洞이 생기기는 前日에 그 부근에 鑄字署가 잇섯던 까닭인데 지금 壽字만 띄여 町名을 지은 것은 아모 의미업는 짓이다. 米倉町은 前日 倉洞 즉 宣惠廳 附屬 米倉이 잇섯던 까닭이오 黃金町은 전일 銅峴(구리개)의 銅을 黃金으로 變한 것이니 이를 터이면 지위가 놉하진 새음이다...(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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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별건곤 제23호 1929년 0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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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大學府 出의 人材 언.파렛드 (생략)...세부란쓰醫學專門學校 針대와 藥봉을 가지고 13도 방방곡곡으로 도라다니며 반도민족의 보건을 직히여 준다든 한방의사를 新銳한 과학의 의학전문학교졸업생과 이 「세부란스」醫學專門學校 출신들이 잇다. 전자는 官學이요, 후자는 私學이지만 米國선교회의 투자경영인 것 만치 세부란스醫專의 설비와 규모의 웅대에는 내외국인을 놀나게 하기에 충분하엿다. 생각건대 1884년(明治 17년) 조선 최초의 기독교선교사 아-렌 씨가 故判書 閔泳翊 씨 생명을 구하여준 기회에 그때의 光武帝는 謝意를 겸하야 漢城 南部銅峴에 王室병원을 설치하엿든 것이 세부란쓰병원의 전신이엇다. 그때는 물론 조고마한 조선식 가옥이 병원건물의 전부엇스나 光武 8년에 至하여 외국인선교사의 활동으로 巨資을 취하야 현재의 南大門에다가 규모 웅대한 건물을 신축하고 학교까지 병설하엿든 것이다. 졸업생은 隆熙 2년에 처음 내엇스니 그때의 수는 7인이라. 그 뒤로는 약 30년 동안 해마다 봄이면 의학계의 영재를 배출하여 반도 刀圭界에 보내엇스니 그 수 실로 本科 출신 244명, 別科 11명의 다수에 及하엿다. 졸업생은 京畿의 80명이 가장 만헛고 平北의 38인, 平南의 33, 黃海의 31, 咸南의 16명이 그 버금이엇다. 이제 이 「세부란쓰」학원에서 일홈을 날닌 출신의 몃몃분을 드러보면...(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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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천리 제4권 제2호 1932년 0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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屍體 二百八個 解剖記 醫學搏士 朴昌薰 (생략)...이 긔회에 한가지 더 긔록하고 십흔 일이 잇다. 그것은 나는 처음은 의학을 할 생각은 조곰도 아니하엿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비위가 약한 사람이다. 20년 전 서울에는 저 수하정(水下町)가튼 데는 정말 구렁이 만헛다. 길을 가다가도 구렁이를 보기만 하면 그날은 밥을 먹지 못하엿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밥상에 가령 간장종지에 파리 한 마리 죽는 것이 떳슬지라도 간장 뿐 아니라 그 밥상을 그만 물니고 못 먹고 말엇다. 못 먹을 뿐더러 먹엇든 것을 도로 토하고 만다. 내 체질이 이러하기 때문에 나는 원체로 고름을 짜내고 살을 베이고 하는 의학을 할 궁리도 하지 안엇다. 그러치만 집에서는 긔어히 의학을 하라 하엿다. 우리 집은 원래 대대로 내려오든 의학이다. 지금도 구리개 둥지의 약종상(藥種商)과 서울 각지의 한방의사(漢方醫師) 가운데는 나의 친척이 만타. 부모의 강권을 물니칠 수가 잇섯다....(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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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년 06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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