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담골
고운담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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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명칭 | 고운담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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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연도 | 2000년 |
주소 | 을지로 30(을지로1가 180) |
목차
표석 문안
임진왜란 때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명나라에 갔을 때 여인을 도와준 일로 보은단(報恩緞)이란 글씨를 수놓은 비단을 받았다 하여 보은단골이 고운담골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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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편년자료 및 고전번역서
홍순언(洪純彦, 1530-1598)과 보은단(報恩緞)에 대한 이야기는 본래 정태제(鄭泰齊, 1612-1669)의 『국당배어(菊堂徘語)』(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수록된 것이다. 『국당배어』는 여러 인물들의 일화와 시화(詩話)를 수록하고 있는 필기류의 저서이다. 총 139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특히 임진왜란 전후의 인물에 관한 글이 많다. 그 후 홍순언 고사는 『통문관지(通文館志)』,『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 수록되어 널리 퍼지면서 다양한 버전으로 만들어졌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통문관지』의 홍순언 고사를 전하면서, 사실관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아래는 홍순언 고사를 전하고 있는 기록들이다. 내용이 조금씩 변개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자료들에서 모두 ‘고운담골’[美墻洞]의 유래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의 와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근현대 자료
20세기에 들어서 이곳은 ‘곤당골’ 혹은 ‘미동’이라고 불렸다. 아래는 근대 신문 아카이브에서 ‘곤당골’을 검색하면 1896년부터 1914년까지 모두 26건 기사가 확인된다. 아래는 그 예이다.
오월 삼일에 곤당골 슐쟝사 손영오 집문 압희 베 보자에 겨을 옷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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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독립신문』, 1896년 7월 7일 |
곤당골 근쳐에 아편연을 먹는 폐단이 대단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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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신문』, 1898년 10월 29일 |
일젼밤에 곤당골 어늬계집의 집에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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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국신문』, 1900년 10월 3일 |
獨軍과 如한 전차, 殺一人 礫一犬, 새벽바람 급행전차, 목수 하나 불쌍히 죽고 개 한마리도 즉사, 이십칠일 아침 (…) 맛참경성남부 곤당골구십오통구호에 사ᄂᆞᆫ목슈일을ᄒᆞ난 안원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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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신보』, 1914년 8월 28일 |
지도 및 도판자료
<도성대지도>와 <한양도>에는 ‘미장동(美墻洞)’으로 표시되어 있다.
<수선전도>에는 ‘미동(美洞)’으로 나와 있으며, <게일 한성부지도>에는 ‘곤당골’이라는 한글 표기와 함께 ‘美洞’이라고 병기되어 있다. 근대 신문에는 ‘곤당골’이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하며, 『경성부사』에서는 ‘미동(美洞)’이라고 쓰고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미장’, 즉 ‘고운 담’이 ‘곤당’으로 바뀌고, 한자 표기 역시 ‘미동’이 주로 사용되다가 20세기 이후 ‘미동’ 하나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표석 위치
종합 의견
〇 홍순언 관련 고사는 『국당배어』를 시작으로 『통문관지』와 『연려실기술』을 거쳐 여러 문헌에서 반복 전승되어왔다. 지도상 확인되는 명칭은 ‘미장동(美墻洞)’과 ‘미동(美洞)’인데, 이 미장동이 본래 ‘보은단동(報恩緞洞)’이 변한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20세기 지도 및 근대 신문에서 확인되는 명칭은 ‘곤당골’이다. 종합하면 ‘보은단골–고운담골–곤당골’로 변한 것이고, 이에 따라 한자 표기 역시 ‘報恩緞洞 - 美墻洞 - 美洞’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여기서 ‘미동’은 ‘곤당골’에 직접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미장동의 줄임말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 ‘곤당골’과 ‘미동’의 두 가지 명칭만 남게 된다.
〇 미장동, 미동, 곤당골은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 지도까지 모두 동일한 위치에 표시되어 있다. 현재 표석은 이를 기준으로 설치된 것으로, 현행대로 두어도 무방하다.
〇 표석 명칭을 ‘곤당골’로 수정하고, 문안 내용에도 조금 손질을 가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①보은단골, ②고운담골, ③곤당골 가운데 최초 명칭인 ‘보은단골’은 『통문관지』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전승을 통해 제시된 것이다. 즉, 이것이 고운담골의 옛 명칭이었는지는 사실 알기 어렵다. 고운담골의 경우 ‘미장동’이라는 한자 표기에서 추출한 것으로, 실제 이곳의 명칭이었음은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며 최종적으로 정착되어 널리 불린 이름은 ‘곤당골’이다. 홍순언 관련 고사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설화에 가까우므로 이 표석의 중심은 과거 이곳이 ‘곤당골’로 불린 장소였으며, 그 명칭과 관련하여 이러한 고사가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된다.
〇 현재 문구에서 설명하고 있는 고사의 내용에도 약간의 오류가 있다. 홍순언이 명나라에서 여인을 도와준 것은 임진왜란 때가 아니다. 한편 홍순언의 이야기는 『국당배어』에서 처음 소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직접 인용한 『통문관지』와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보은단(報恩緞)’ 세 글자가 아니라 ‘보은(報恩)’ 두 글자를 수놓은 비단을 ‘보은단’이라고 한 것이다. 본래 구전된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므로 어느 것이 맞다고 하기 어렵지만, 시기상 앞선 기록을 따라 ‘보은’ 두 글자를 수놓았다고 고치는 편이 좋다고 본다.
표석문안
곤당골
이곳은 옛날 곤당골·미동(美洞)으로 불리던 마을이다. 선조 때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명나라에서 한 여인을 도운 일로 ‘보은(報恩)’ 두 자를 수놓은 비단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가 살던 동네를 보은단골이라 했고, 나중에 고운담골·미장동(美墻洞)으로 변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