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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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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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촬영
표석명칭 고운담골
설치연도 2000년
주소 을지로 30(을지로1가 180)


표석 문안

Quote-left.png 임진왜란 때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명나라에 갔을 때 여인을 도와준 일로 보은단(報恩緞)이란 글씨를 수놓은 비단을 받았다 하여 보은단골이 고운담골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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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편년자료 및 고전번역서

홍순언(洪純彦, 1530-1598)과 보은단(報恩緞)에 대한 이야기는 본래 정태제(鄭泰齊, 1612-1669)의 『국당배어(菊堂徘語)』(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수록된 것이다. 『국당배어』는 여러 인물들의 일화와 시화(詩話)를 수록하고 있는 필기류의 저서이다. 총 139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특히 임진왜란 전후의 인물에 관한 글이 많다. 그 후 홍순언 고사는 『통문관지(通文館志)』,『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 수록되어 널리 퍼지면서 다양한 버전으로 만들어졌다.

Quote-left.png 洪純彦
少落拓有義氣。嘗赴燕, 到通州, 夜遊靑樓, 見一女子, 極有殊色, 意悅之, 托主嫗要歡, 見其衣素, 問之則曰: “妾父母本浙江人, 仕宦京師, 不幸遘癘疾, 一時俱沒, 旅櫬在館。獨妾一身, 返葬無資, 不得已自鬻。” 言畢哽咽泣下, 公聞之愍然, 問其葬費, 可用三百金, 卽傾橐與之, 終不近焉。女請姓名, 終不言, 女曰: “大人不肯言, 妾亦不敢受賜。” 乃言姓而出, 同行莫不嗤其迃。女後爲禮部侍郎石星之繼室, 侍郞聞知此事而高其義, 每見東使, 必問洪通官來否。時本國以宗系卞誣, 前後十餘使, 皆未得請。萬曆甲申公隨卞誣使黃芝川廷彧到北京, 望見朝陽門外, 錦幕連雲, 有一騎疾馳來問洪判事, 言“禮部石侍郞聞公來, 與夫人迎候”。俄見女奴十餘簇擁夫人, 自帳中出, 公驚愕欲退避, 侍郞曰: “君記通州施恩事乎? 我聞夫人言, 君誠天下之義士, 今幸相見, 大慰我心。” 夫人見卽跪拜, 公俯伏固辭, 侍郞曰: “此報恩拜, 君不可不受。” 夫人曰: “蒙君高義, 得葬父母, 感結中心, 何日忘也。” 仍大張宴, 夫人執盃以進。侍郞問東使此來爲何事, 公以實對, 侍郞曰: “君毋慮。” 留會同館月餘, 使事果得准請。特命錄示新改會典, 石公實爲之地也。及還邀至其家, 禮待甚厚, 夫人以鈿函十各盛五色錦段十疋, 曰: “此是妾手織以待公至。願以此獻公。” 公辭不受。還到鴨綠江邊, 見擡杠軍隨至置其段去, 錦端悉刺報恩二字。旣歸買錦者爭赴, 人稱所居洞爲報恩段洞云。壬辰倭奴內犯, 車駕西巡, 請援天朝, 時朝議或請堅守鴨江以觀其變, 或云夷狄相攻中國不必救。石公時爲兵部尙書, 獨力言救之, 且請先賜軍器火藥, 吾東得復爲國而免其魚者, 皆石公力也。公策光國勳, 封唐陵君, 其孫孝孫爲肅川府使。《菊堂俳語》曰: “唐陵急人之義 可嘉, 而夫人之不忘其恩, 而必報之者如此, 尤可尙已。先是卞誣使累往不准請, 朝議以爲非貨難成, 公曰: ‘此事唯可以至誠格天, 何用賂爲。且外國事勢, 與中國不同, 若開此路, 其弊必至於國斃。’ 至光海時始開賂門, 終成難救之弊, 荷潭金公時讓以爲‘有先見君子’云。”
홍순언(洪純彦)

젊어서 불우하였으나 의기(義氣)가 있었다. 일찍이 연경에 가다가 통주(通州)에 이르러 밤에 청루(靑樓)에 놀러 가서 자색이 매우 뛰어난 한 여자를 보고 마음에 들어 주인 여자에게 부탁하여 접대하게 하였는데, 그가 소복(素服)을 입은 것을 보고 물었더니, 여자가 말하기를, “제 부모는 본디 절강(浙江) 사람인데, 명나라 서울에서 벼슬 살다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한때에 다 돌아가서 관[櫬]이 객사에 있습니다. 저는 외동딸이고 고향으로 모셔가 장사지낼 밑천이 없으므로 마지못하여 스스로 몸을 팝니다.” 하고는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리므로, 공이 듣고 불쌍하여 그 장례비를 물으매 3백 금을 써야 하겠기에 곧 전대를 털어서 주고 끝내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여자가 성명을 물었으나 끝내 말하지 않았는데, 여자가 말하기를, “대인께서 말씀하지 않으려 하시면 저도 감히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성만 말하고 나오니, 동행이 모두 그의 오활함을 비웃었다.
여자는 뒤에 예부시랑(禮部侍郎) 석성(石星)의 계실(繼室)이 되었는데, 시랑이 이 일을 들어서 알고 그 의리를 높이 여겨 번번이 우리나라의 사신을 보면 반드시 홍 통관(洪通官)이 왔는지를 물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때문에 전후 10여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모두 허락받지 못하였는데, 만력(萬曆)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에 공이 변무사(卞誣使)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을 따라 북경에 이르러 조양문(朝陽門) 밖을 바라보니, 금막(金幕)이 높다랗게 구름에 이었는데, 말을 타고 한 사람이 달려와서 홍 판사(洪判事)를 찾아 말하기를, “예부 석 시랑이 공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계집종 10여 명이 떼지어 부인을 옹위하고 장막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공이 놀라 피하려 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군(君)은 통주에서 은혜를 베푼 일을 기억하시오? 내가 부인의 말을 들으니 군은 참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인데, 이제야 다행히 서로 만나니 내 마음이 크게 위안됩니다.” 하였다. 부인이 보고는 곧 꿇어앉아 절하므로 공이 부복하여 굳이 사양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이것은 은혜에 보답하여 군에게 절하는 것이니,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군의 높은 은혜를 입어 부모를 장사지낼 수 있었으므로 감회가 마음에 맺혔으니, 어느 날엔들 잊겠습니까?” 하고는 곧 크게 잔치를 벌여 부인이 잔을 잡고 올렸다. 시랑이 동방의 사신이 이번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인지를 물으므로,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군은 염려하지 마시오.” 하였는데, 회동관(會同館)에 머무른 지 한 달 남짓 만에 사신 간 일을 과연 청한 대로 허락받았다. 특명으로 새로 고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록하여 보인 것은 석공(石公)이 실로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다.
돌아올 때가 되어 그 집에 맞이하여 매우 후하게 예대(禮待)하고, 부인이 나전함[鈿函] 열 개에 각각 오색 금단(錦段) 열 필을 담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제가 손수 짜서 공이 오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을 공께 바치겠습니다.” 하였으나, 공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압록강 가에 돌아와 보니 대강군(檯杠軍)이 따라와서 그 비단을 두고 갔는데,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아 있었다. 집에 돌아갔을 때에 비단을 사려는 자가 앞다투어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그의 사는 동(洞)을 ‘보은단동(報恩段洞)’이라 불렀다 한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노(倭奴)들이 국내로 침입하자 임금이 서쪽으로 피하고 중국에 구원을 청하였는데, 그때 중국 조정의 의논이 혹은 압록강을 굳게 지키면서 형세가 변해 가는 것을 보자고 청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이적(夷狄)이 서로 치는 것을 중국이 반드시 구원할 것까지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석공이 그때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 구원할 것을 혼자 힘써 말하고, 또 먼저 군기와 화약을 줄 것을 청하였으니, 우리 동방이 나라를 회복하여 살육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석공의 힘이다. 공은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훈(策勳)되고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졌으며, 그 손자 홍효손(洪孝孫)은 숙천 부사(肅川府使)가 되었다.
《국당배어(菊堂俳語)》에 이르기를, “당릉군이 남의 급한 일을 도운 의리는 가상히 여길 만하거니와, 부인으로서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반드시 갚은 것이 이러하니, 더욱이 가상히 여길 만하다. 이에 앞서 변무사가 여러 번 가서 청한 것을 허락받지 못하였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재화(財貨)가 아니면 이루기 어렵다고 여겼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 일은 오직 지극한 정성이 하늘에 사무쳐야 할 것이거늘 뇌물을 써서 무엇하겠는가? 또 외국의 사세는 중국과 같지 않은데, 만일 이 길을 한 번 열게 되면 그 폐단은 반드시 나라가 피폐하기에 이를 것이다.’ 하였다. 광해군 때에 이르러 비로소 뇌물을 쓰기 시작하여 마침내 바로잡기 어려운 폐단이 되니,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 공이 ‘선견이 있는 군자이다.’라고 말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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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지남(金指南, 1654-?), 『통문관지』제7권(1720) > 인물편(人物篇)


Quote-left.png 譯舌【幷出《通文館志》】
(생략)... 洪純彦, 少落拓有義氣。嘗赴燕, 到通州, 夜遊靑樓, 見一女子, 極有殊色, 意悅之, 托主嫗要歡。見其衣素, 問之則曰: “妾父母本浙江人, 仕宦京師, 不幸遘癘疾俱沒。旅櫬在館, 獨妾一身, 返葬無資, 不得已自鬻。” 言畢哽咽泣下。公聞之愍然, 問其葬費, 可用三百金, 卽傾橐與之, 終不近焉。女請姓名, 終不言, 女曰: “大人不肯言, 妾亦不敢受賜。” 乃言姓而出。同行莫不嗤其迃。女後爲禮部侍郎石星之繼室, 星高其義, 每見東使, 必問洪通官來否。

純彦還國, 以公債未償, 逮囚多年。時本國以宗系辨誣, 前後十餘使, 皆未得請。上怒敎曰: “此象胥之罪也。今行又未准請, 當斬首譯一人。” 於是諸譯無敢願行者。相與議曰: “洪純彦無得生出獄門之望, 吾輩宜賠償債本贖出以送之。苟得准事而還, 在渠爲幸, 雖死固無所恨。乃齊進喩其意, 純彦慨然許之。【補】 宣祖甲申純彦隨黃廷彧到北京, 望見朝陽門外錦幕連雲, 有一騎疾馳來問洪判事, 言“禮部石侍郞聞公來, 與夫人迎候”。俄見女奴十餘簇擁夫人, 自帳中出。純彦驚愕欲退, 石星曰: “君記通州施恩事乎? 我聞夫人言, 君誠天下之義士。” 夫人見卽跪拜, 純彦固辭, 石星曰: “此報恩拜, 君不可不受。” 仍大張宴。星問: “東使此來何事?” 純彦以實對, 星曰: “君毋慮。” 留館月餘, 使事果得准請, 石星實爲之地也。及還夫人以鈿函十各盛五色錦段十疋, 曰: “此是妾手織以待公至。” 純彦辭不受, 還到鴨綠江, 見擡杠者置其段而去, 錦端悉刺報恩二字。純彦歸後策光國二等勳, 封唐陵君。人稱所居洞爲報恩段洞。其孫孝孫爲肅川府使。【《菊堂俳語》】
역관(譯官) 【《통문관지》에도 나온다.】
(…) ○홍순언(洪純彦)은 젊을 때에 불우[落拓]했지만 의기는 있었다. 언젠가 연경에 갔을 때 통주(通州)에서 밤에 청루(靑樓)에서 노는데, 자태가 특별히 아름다운 한 여인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주인 노파에게 부탁하여 서로 즐기기를 요구하였다. 그 여인의 옷이 흰색임을 이상히 여겨 물으니, 말하기를, “첩의 부모는 본시 절강(浙江) 사람인데, 서울[京師]에서 벼슬하다가 불행히도 염병에 걸려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객사한 영구[旅櫬]가 사관(舍館)에 있지만, 저 한 몸밖에 없어 고향으로 이장할 돈이 없어 부득이 제 몸을 파는 것입니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목메어 울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순언이 불쌍히 여겨 그 장사지낼 비용을 물으니, 3백금이면 된다고 하므로 곧 전대를 톡톡 털어 주고 끝내 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순언의 성명을 묻는 여인의 질문에 끝내 말하지 않자 여인은 “대인(大人)께서 성명을 말씀해 주지 않는다면 첩도 또한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하는 수 없이 성(姓)만 말하고 나왔다. 일행들은 그 오활함을 비웃었다. 여인은 뒤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석성(石星)의 계실(繼室)이 되었는데, 성(星)이 그 순언의 의로움을 높이 여겨 늘 우리나라 사신[東使]을 볼 적마다 홍 통관(洪通官)이 왔는지 꼭 물었다고 한다.
순언은 환국한 뒤 공금의 빚을 갚지 못한 것 때문에 체포되어 여러 해 동안 갇혀 있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때문에 전후 10여 명의 사신이 갔다 왔으나, 아무도 청(請)을 허락받지 못하고 돌아 왔다. 임금이 노하여 교지를 내리기를, “이것은 역관[象胥]의 죄로다. 이번에 가서 또 청을 허락 받지 못하고 오면 마땅히 수석 통역관 한 사람을 목베리라.” 하였다. 어떤 역관도 감히 가기를 지원하는 자가 없었다. 역관들은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홍순언은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희망이 없으니, 우리들이 마땅히 빚진 돈을 갚아주고 풀려 나오게 하여, 그를 보내기로 하자. 만일 그 일을 허락받고 돌아오면 그에게는 행복이 될 것이고,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한(恨)될 일은 없을 것이다.” 하고 모두들 함께 가서 그 뜻을 알리니, 순언이 개연히 허락하였다. 【보(補)】
선조 갑신년에 순언이 황정욱(黃廷彧)을 수행하여 북경에 이르러 바라보니 조양문(朝陽門) 밖에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 있는데, 한 기병(騎兵)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홍 판사(洪判事)가 누구시냐고 묻고는 말하기를, “예부의 석 시랑(石侍郞)이 공(公)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보니 계집종 10여 명이 부인을 에워싸 옹위하고 장막 안으로부터 나왔다. 순언이 몹시 놀라 물러가고자 하니 석성(石星)이 말하기를, “당신은 통주(通州)에서 은혜 베푼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 아내의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천하의 의사(義士)입니다.” 하였다. 부인을 보니 부인은 곧 무릎을 꿇고 절을 하므로, 순언이 굳이 사양하니 성이 말하기를, “이것은 보은의 절[報恩拜]이니 당신은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는 연회를 크게 베풀었다. 성이 물었다. “동사(東使 우리나라 사신)가 이번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순언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성은 “당신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사관에 머무른 지 한 달 남짓한 동안에 사신으로 온 일이 과연 청한 대로 허가되었으니, 석성이 참으로 그 터전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순언이 돌아올 때, 부인이 전함(鈿凾) 10개에 각각 비단 10필을 담고 말하기를, “이것은 첩이 손으로 짜가지고 공(公)이 오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하였다. 순언이 사양하여 받지 않고 돌아왔는데, 압록강에 이르러 짐꾼들이 그 비단을 놓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순언이 돌아온 뒤에 광국 이등훈(光國二等勳)에 녹훈되고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졌다. 사람들은 그가 사는 동리를 ‘보은단동(報恩段洞)’이라 하였고, 그 손자 효손(孝孫)은 숙천 부사(肅川府使)가 되었다. 【국당배어(菊堂俳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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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려실기술』(1776년 이전) 별집 제5권 > 사대전고(事大典故)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통문관지』의 홍순언 고사를 전하면서, 사실관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Quote-left.png 洪純彦

譯官洪純彦, 有功於國系辨誣, 策光國勲, 封唐陵君。世傳純彦前此赴京, 以厚賂售養漢的, 得一美倡。養漢的者, 畜倡售價之稱也。問之則倡本良女, 父母死, 家貧無以葬, 自鬻至此, 實室女未事人者。純彦聞而惻隱, 遂捐金以資之, 不與歡。後女為尚書石星寵姬, 及辨誣之行, 純彦因此女有力。至於壬辰之變, 天朝發兵再造, 石星主之, 亦此女有助云。《說郛》有《甲乙剰言》云: “沈惟敬以落魄, 僑寓燕中, 寓傍有一閒屋, 使賣水擔子沈嘉旺居之。嘉旺本樂淸趙常吉家蒼頭, 為倭掠去十八載, 還走燕依趙, 趙無所用。故賣水自給。惟敬時時従之, 談日本事, 無不了悉會。石大司馬經略東事, 而石寵姬父袁某恒従惟敬, 惟敬與之說日本事, 若身至之者。袁告石, 召與語悅之, 奏授遊撃將軍, 奉使日本, 而有封貢之說矣。” 夫光國之勲以譯舌得參, 必有其故, 而壬辰之援師因石星寵姬者, 恐亦非全誣矣。或者袁某妻死, 無以葬, 乃賣其女資之耶。《通文館志》云: “女是石侍郎繼室”, 失之矣。且石非侍郎矣。石既專意東事, 而袁遂進沈惟敬, 惟敬之於我, 實血忱也。東来時帶嘉旺, 其赴順安也, 先使直入賊營, 諭行長約五十日勿相掠, 蓋曾留倭相習故也。世又傳“純彦再赴京, 石之寵姬載金帛酬恩甚厚, 純彦曰‘若爾是利之也, 非吾初志’, 皆不受。女有手織綵錦百段, 皆繡文報恩段三字。奉此哀訴, 純彦不忍全却, 遂帶而還。今京城西部有報恩段洞, 此純彦所居故因名云。” 《荷潭手記》云: “光海既立, 中朝以其非長, 故遣嚴一魁、萬愛民等, 驗覈臨海君珒病否, 光海以銀、參, 厚賂嚴、萬。自此賂門一開, 譯官縦臾其間, 非賄不成矣。當宗系辨誣, 累行不準請, 朝議以為中朝之事, 非貨難成, 純彦曰‘外國事勢, 與中國不同, 若開此路, 其弊必至於國弊, 此事差遲數年何傷’, 遂不果。至於壬丁請兵事, 甚鉅大, 未甞行賂, 自光海以来, 為國痼疾, 不可救藥矣, 人服純彦先見。”
홍순언(洪純彦)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은 왕가(王家)의 세계(世系)를 변무(辨誣)하는 데 공이 있어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당릉군(唐陵君)을 봉했다. 세간의 전설에 의하면 순언은 이에 앞서 명나라 서울에 갔을 적에, 양한적(養漢的)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한 아름다운 창녀를 얻었었다. 양한적이란 창녀를 길러 값을 받는 칭호이다. 물어본즉 창녀는 본시 양갓집 여자로서 부모가 죽자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 모실 길이 없으므로 스스로 몸을 팔아 이에 이르렀는데, 기실은 처녀로서 남자를 섬기지 않은 몸이라는 것이었다. 순언은 듣고서 측은히 여겨 마침내 돈을 내어 깨끗이 도와주고 관계를 맺지 아니하였었다. 그 뒤에 그녀는 상서(尙書) 석성(石星)의 총희(寵姬)가 되었는데, 변무(辨誣)하러 갔을 적에 순언은 그녀를 인하여 힘을 입었었다. 임진왜란에 이르러 명나라에서 군사를 내어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킨 것은 석성의 힘이었는데 역시 그녀의 도움이었다고 한다. 《설부(說郛)》에 ‘갑을잉언(甲乙剩言)’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심유경(沈惟敬)이 불우한 몸으로 연경(燕京)에 우거하는데, 우사(寓舍) 곁에 한 칸의 방이 있어 물장수 심가왕(沈嘉王)으로 하여금 들어 살게 했다. 가왕은 본시 낙청(樂淸) 조상길(趙常吉)의 집 종이었는데, 왜적에게 잡혀가 18년 만에 달아나 연경으로 돌아와 조에게 의지하니 조는 그를 쓸 데가 없었다. 그래서 물을 팔아 스스로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다. 유경은 때때로 그와 상종하여 일본에 대한 일을 이야기한 바 모르는 것 없이 환하였다. 때마침 대사마(大司馬) 석성이 동쪽 일을 요리하는데, 석성의 총희의 아버지 원모(袁某)가 항시 유경과 상종하므로 유경은 그와 더불어 일본 일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몸소 그곳에 갔다 온 자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원이 석성에게 고하자 석성은 불러들여 말해보고 대단히 기뻐하며 위에 아뢰어 유격장군(遊擊將軍)을 제수하고 일본에 봉사케 하여, 봉공(封貢)의 설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무릇 역관으로서 광국공신의 훈(勳)에 참여하게 된 것을 보면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며, 임진년의 군사 원조는 석성의 총희로 인해서 된 것이라는 것도 역시 전혀 거짓말은 아닌 성싶다. 혹시 원모의 아내가 죽자 장사할 길이 없어서 마침내 그 딸을 팔아서 치룬 것이 아니었던가? 《통문관지》에는 “여(女)가 바로 석 시랑의 계실(繼室)이다.” 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더구나 석성은 시랑이 아니었다.
석성이 동쪽 일을 전담하게 되자 원은 마침내 심유경을 천거하였는데, 심유경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실로 혈성(血誠)이었다. 동쪽으로 올 적에 심가왕을 대동하였고, 그가 순안(順安)으로 갈 적에는 먼저 그로 하여금 곧장 적의 진영에 들어가 행장(行長)을 타일러서 50일 동안에는 서로 침략하지 말 것을 약속하였으니, 대개 그가 일찍이 왜국에 머물러 있어 서로 익숙한 까닭이었다.
세간에서 또 전하기를 “순언이 두 번째 연경에 갔을 때 석성의 총희가 금과 비단을 잔뜩 싣고 와서 은혜에 보답하기를 심히 후히 하자 순언은 말하기를 ‘만약 이렇게 한다면 이는 이익을 노린 것에 불과하니, 나의 당초의 뜻이 아니다.’ 하고 모두 받지 아니하였다. 그녀 손수 짠 채단이 1백 필이었는데 수(繡)의 무늬는 모두 ‘보은단(報恩緞)’ 세 글자로 되었었다. 이 채단을 받들고 와서 슬피 호소하므로 순언은 차마 이것조차 물리칠 수 없어서 마침내 가지고 돌아왔다. 지금 서울 서부(西部)에 ‘보은단골’이 있는데, 이는 순언이 사는 곳이므로 인하여 이름이 된 것이다.”라고 한다.
《하담수기(荷潭手記)》에 이르기를 “광해(光海)가 즉위하자 명나라에서는 그가 장자(長子)가 아니라는 까닭으로써 엄일괴(嚴一魁)ㆍ만애민(萬愛民) 등을 보내어 임해군(臨海君) 진(珒)의 신병 여부를 조사하게 하니, 광해는 은자(銀子)와 인삼을 엄ㆍ만에게 후히 주었다. 이로부터 뇌물의 문이 한번 열리자 역관이 그 사이에서 방종하고 아유하여 회뢰가 아니고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종계(宗系)의 변무(辨誣)에 당해서도 누차 갔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므로, 조정의 의논이 ‘중국의 일은 재물이 아니고서는 성사하기 어렵다.’고 여겼는데, 순언은 말하기를 ‘외국의 사세는 중국과 같지 않으니 만약 이 길을 열어 놓는다면 그 폐단이 반드시 국가가 퇴폐하는 지경에 이를 것인즉, 이 일은 몇 해가 더 지연된들 무엇이 서럽겠는가!’ 하며, 마침내 버티고 나갔던 것이다. 임진ㆍ정유년의 청병(請兵)에 이르러서도 일이 몹시 거창했지만 뇌물을 쓴 일은 일찍이 없었는데, 광해조 이래로부터 국가의 고질이 되어 약으로도 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순언의 선견지명에 감복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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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익(李瀷, 1681-1763),『성호사설』제9권 > 인사문(人事門)


아래는 홍순언 고사를 전하고 있는 기록들이다. 내용이 조금씩 변개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Quote-left.png 洪純彦

洪純彦者, 南陽府人也。嘉靖中, 純彦以通事赴京。聞有美女價直千金, 遂乞銀于僚官。如其數以往見其女, 垂首不言而涕。純彦問之, 女曰: “某江南人也。隨父之官, 父死無以返葬, 欲自鬻營歸耳。” 純彦聞而悲之, 予其銀而歸。貸銀者以積債不還訴于官, 謫配嶺東。其後女子適于石星, 星歷官至禮部尙書。每東使至, 輒問純彦所在。昭敬王赦還, 復爲通事, 隨宗系辨誣使, 又赴京。事關禮部, 石星及夫人招見, 道謝舊恩, 令竣事以還。昭敬王嘉之, 策光國勛, 封唐陵君。夫人甞自織錦數百端, 每端繡報恩緞三字, 以贈純彦。昭敬王命純彦所居第洞名曰報恩緞洞。壬辰亂, 石星爲兵部尙書, 又力主出兵之議。一女子之微, 而能洗東國之宗誣, 又能出兵以復其國, 可謂壯哉。
홍순언
홍순언은 남양부 사람이다. 가정 연간에 순언이 통사(通事)로 명나라 서울에 가게 되었다. 어떤 미녀가 천금의 값이 나간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동료 관원에서 은을 빌렸다. 그 돈으로 가서 여자를 보았는데, 머리를 떨구고 말없이 울기만 했다. 순언이 물으니 여자가 말하길, “저는 강남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벼슬살이 때문에 여기로 왔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반장(返葬)할 길이 없어 스스로 몸을 팔아 돌아갈 여비를 마련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순언이 듣고서 애처롭게 여겨 그 은을 모두 주고서 돌아왔다. 은을 빌려준 자가 빚을 갚지 않는다고 관에 아뢰어서 영동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후 여자는 석성(石星)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성(星)의 관직이 예부상서에 이르렀다. 매번 동쪽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번번이 순언이 있느냐고 물었다. <순언은> 소경왕(昭敬王: 선조)께서 용서하여 풀어주셔서 다시 통사가 되어,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를 따라 경사(京師)에 가게 되었다. 종계변무의 일이 예부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석성과 그의 부인이 순언을 불러서 만나고 옛날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고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소경왕께서 기특하게 여겨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책봉하고 당릉군(唐陵君)에 봉하셨다. 부인이 일찍이 수백 단의 비단을 짰는데 매 단마다 ‘보은단(報恩緞)’ 세 자를 수놓아서 순언에게 주었다. 소경왕께서 순언이 사는 제동을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고 이름하도록 명하셨다. 임진란 때에 석성이 병부상서로 있었는데, 다시 힘써 출병의 뜻을 주장하였다. 자그마한 여자가 능히 동국의 종무(宗誣)를 씻고 또 출병하여 그 나라를 회복시켜 주었으니 장하다고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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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윤행임(尹行恁, 1762-1801),『석재고(碩齋稿)』제9권 > 해동외사(海東外史)


Quote-left.png 대수암야화(大樹菴夜話)

明萬曆時, 兵部尙書石星夫人卽南京戶部侍郞某之女也。初家被籍追贓, 自賣娼館, 以贖父死。時朝鮮譯官洪彥純入燕京遊娼館, 有一娼索價千金, 洪許之, 女背燈而泣, 問其故, 答曰: “索高價, 令人不敢求媒者, 本欲以免斯須之辱也, 一以望天下義氣人贖爲箕箒妾也。公外國人, 法不當將奴去。此身一染, 不可浣也。” 洪詰知其侍郞女, 殊憐之, 問贖價幾何, 曰二千金。洪立輸之訣別, 女百拜稱恩父。其後洪隨辨誣奏文之使, 又入燕至通州, 供帳如雲連, 問洪彥純來否, 乃石公奉邀也。洪怪之, 隨至石第, 尙書携入內堂, 其夫人盛粧出拜, 洪惶恐罔知所措, 石公曰“恩丈久忘此人耶”。夫人泣道出娼館歸石公爲繼室之由, 洪始知之。夫人貴猶手織錦, 皆刺報恩緞字, 贈洪歸裝。洪在漢陽美洞, 賣報恩緞, 美洞卽報恩緞洞, 而音相似而訛傳也。石公以夫人之故, 尤致力於我東, 辨誣請援兩事, 大有功焉, 立生祠於箕城, 洪亦以此功, 封唐城君。
(…) 명나라 만력(萬曆) 때의 병부 상서 석성(石星)의 부인은 곧 남경 호부시랑 모(某)씨의 딸이었다. 처음에 집안 장물을 추징당하여 적몰되었을 때, 제 몸을 창관(娼館)에 팔아 아비의 죽음을 속죄하였다. 그때에 조선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연경에 들어가 창관에서 놀았는데, 한 창녀가 부르는 값이 천금이었으나 홍순언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여자가 등불을 지고 앉아 울고 있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비싼 값을 불러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몸을 사지 못하게 한 것은 본디 잠깐 동안의 욕됨을 면하고자 함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천하의 의기(義氣) 있는 이에게 팔리어 아내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은 외국인이라 법으로 저를 데리고 갈 수 없으며, 이 몸이 한번 더렵혀지면 씻을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홍순언이 캐어물어서 그가 호부 시랑의 딸임을 알고 특별히 불쌍히 여겨 몸값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2000금이라고 하였다. 홍순언이 그 자리에서 돈을 치르고 결별(訣別)하니, 그 여자가 백 번 절하며 은부(恩父)라고 불렀다.
그 뒤에 홍순언이 변무주문(辨誣奏文)의 사신을 따라 다시 연경에 들어가 통주(通州)에 이르니 공장(供帳)이 구름같이 잇따랐는데 홍순언이 오는지의 여부를 물었으니, 곧 석공(石公)의 마중이었다. 홍순언이 이상히 여기면서 따라서 석성의 집에 이르러 상서가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니, 그 부인이 성장을 하고 나와서 절한다. 홍순언이 황공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니, 석공이 말하기를, “은장(恩丈 은혜로운 어른)께서 이 사람을 오래되어 잊었소이까?” 하였다. 부인이 울면서 창관을 나와서 석공의 계실(繼室)이 된 사연을 말하자, 홍순언이 비로소 알았다. 부인이 귀한 몸으로 손수 짠 비단에 모두 보은단(報恩緞)이란 글자를 수놓아 홍순언의 돌아오는 행장에 보내었다. 홍순언이 한양(漢陽) 미동(美洞)에 있으면서 보은단을 팔았는데, 미동은 곧 보은단동으로 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이다. 석공은 부인의 일로 해서 더욱 우리나라 일에 힘을 써 변무(辨誣)와 청원(請援: 원병 청원)의 두 가지 일에 크게 공로가 있어 생사(生祠: 산 사람을 모신 사당)를 기성(箕城: 평양)에 세웠으며, 홍순언 또한 이 공로로써 당성군(唐城君)에 봉하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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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사호(朴思浩),『심전고(心田稿)』(1828년) 제2권 > 유관잡록(留館雜錄)


Quote-left.png 報恩緞洞

俗稱美墻洞, 以其音訛傳之致也。通文館志曰: “洪純彦, 少落拓有義氣。嘗赴燕, 到通州, 夜遊靑樓, 見一女子有殊色。意悅之, 託主嫗要歡。見其衣素, 問之則曰: ‘妾父母本浙江人, 仕宦京師, 不幸遘癘疾俱沒, 旅櫬在館。獨妾一身, 返葬無資, 不得已自鬻。’ 言畢泣下。公聞之愍然, 問其葬費, 可用三百金, 卽傾橐與之, 終不近焉。女請姓名, 終不言, 女曰: ‘大人不肯言, 妾亦不敢受賜。’ 乃言姓而出。同行莫不嗤其迃。女後爲禮部侍郎石星之繼室。侍郞知此事而高其義, 每見東使, 必問洪通官來否。時本國以宗系辨誣, 前後十餘使皆未得請。萬曆甲申公隨卞誣使黃芝川廷彧到北京。望見朝陽門外, 錦幕連雲, 有一騎疾馳來問洪判事, 言‘禮部石侍郞聞公來, 與夫人迎候’, 俄見女奴十餘簇擁夫人, 自帳中出。公驚愕欲退避, 侍郞曰: ‘君記通州施恩事乎? 我聞夫人言, 君誠天下之義士。今幸相見, 大慰我心。’ 夫人見卽跪拜。公俯伏固辭, 侍郞曰: ‘此報恩拜, 君不可不受。’ 夫人曰: ‘蒙君高義, 得葬父母, 感結中心, 何日忘也。’ 仍大張宴, 夫人執盃以進。侍郞問東使來事, 公以實對, 侍郞曰: ‘君毋慮。’ 留會同館月餘, 使事果得准請, 特命錄示新改會典, 石公實爲之地也。及還邀至其家, 禮待甚厚, 夫人以鈿函十各盛五色錦緞十疋, 曰: ‘此是妾手織以待公至, 願以此獻公。’ 公辭不受。還到鴨綠江邊, 見擡杠軍隨至置其緞去。錦端悉刺報恩二字。旣歸買錦者爭赴。人稱所居洞爲報恩緞洞云。壬辰倭奴犯城, 車駕西巡, 請援天朝, 石公時爲兵部尙書, 獨力言救之, 且請先賜軍器火藥, 吾東得復爲國, 皆石公力也, 公策光國勳, 封唐陵君, 其孫孝孫爲肅川府使。”
보은단동(報恩緞洞)
보통 미장동(美墻洞)이라 한 것은 그 음이 잘못된 까닭인 듯하다.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보면 「홍순언(洪純彦)이 젊어서 곤궁하였으나 의기가 있었다. 중국 연경에 가는 길로 통주(通州)에 도착하여 밤에 청루(靑樓)에서 노는데, 어떤 미녀가 하나 있어서 자색이 있었다. 마음에 들어서 주인 노파에게 부탁하여 하룻밤 동침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소복을 입고 있어서 물은즉 그녀의 대답이 “소녀의 부모는 본래 절강(浙江) 사람으로 서울에 와서 벼슬하고 있다가 불행히도 병에 걸려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빈소는 객관(客館)에 있으나 소녀가 독신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를 지낼 노자가 없어서 부득이 몸을 팔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을 마치며 울먹였다. 순언이 듣고 딱하게 여겨서 “반장(返葬)할 비용이 얼마면 되느냐?” 하고 물은즉, 300냥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주머니를 털어서 주고 끝내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성명을 물어도 말하지 않으니 그녀가 하는 말이 “대인께서 대답하시지 않으면 소녀도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받기를 거절하므로 부득이 성만 홍가라 하고 나왔다. 함께 놀던 사람들은 모두 그가 세상물정 모른다고 조롱하였다.
그녀는 그 뒤에 명나라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계실이 되었다. 시랑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의협심을 대단하게 여기고 번번이 우리나라 사신만 보면 꼭 홍 통관(通官)이 왔나를 물었다. 때마침 우리나라에서 나라의 종계(宗系)가 중국 문헌에 잘못되어서 이것을 고치려는 변무사(辨誣使)가 전후 십여 차례 갔으나 모두 고치지 못하였다. 선조 17년에 홍공이 변무사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을 따라서 북경에 도착했다. 조양문(朝陽門) 밖을 바라보니 비단 장막이 구름과 닿아있고 말 탄 사람 하나가 와서 홍 판사냐 묻고 말하기를 “예부의 석 시랑이 공이 온단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환영하려 기다린다.” 하자, 여종 십여 명이 시랑의 부인을 옹위하고 장막 뒤에서 나온다. 공이 깜짝 놀라 물러나와 피신하려 하니 시랑이 하는 말이 “홍공은 통주에서 은혜 베푼 일을 기억하는가? 내가 부인의 말을 들어보니 그대는 참말로 천하의 의사이라. 지금에서 만나보니 내 마음이 후련하다.” 하고 부인이 즉시 꿇어앉아 배례를 하려 한다. 홍공은 엎드려서 굳이 사양하니 시랑의 말이 이것은 은혜를 갚기 위한 배례이니 받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부인은 말하기를 “그대의 높은 의협심으로 입사와 부모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으니 마음 가운데 서린 심정 어느 날 잊겠습니까?” 하고 크게 풍악을 잡히고 부인이 손수 술잔을 권하였다. 시랑이 묻기를 “이번에 조선서 사신이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기에 홍공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시랑의 말이 그대는 걱정하지 말라 하고 회동관(會同館)에서 유한 지 월여에 종계변무는 청한 대로 특명으로 사실을 기록하여 회전(會典)을 새로 고치게 된 것은 실로 석 시랑의 힘이었다. 돌아올 때가 되어 석 시랑의 초청을 받고 그 집에 가니 접대가 심히 후하며, 부인은 자개 놓은 함 열 개에 각각 오색비단 열 필씩 담아서 주면서 하는 말이 “이것은 소녀 손으로 짜서 그대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니 이것으로 그대에게 바치기를 원하옵니다.” 한다. 홍공이 사양하고 받지 않고 압록강변에 돌아오니 물건을 메고 오는 군정이 따라와서 그 비단을 두고 가버렸다. 그 비단에는 모두 ‘보은(報恩)’이라는 두 글자의 무늬를 놓았다. 돌아온 뒤에 비단 사러 온 사람들이 붐볐다. 그래서 사람들이 홍순언이 살고 있는 동리를 ‘보은단동’이라 하였다. 선조 25년에 왜적들이 도성을 범해서 왕의 행차는 서도로 납시고 중국에 구원병을 청구했는데, 석성이 때마침 병부상서가 되어서 혼자 힘으로 싸워서 구원하게 하고 또 먼저 군기와 화약을 원조하도록 하여 우리나라가 다시 나라꼴이 된 것도 모두 석 상서의 힘이며, 홍공도 광국(光國) 공신으로 당릉군(唐陵君)으로 봉하여졌다. 그 손자 효손(孝孫)이 숙천부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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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경지략』(1830년) 제2권 > 각동(各洞)


Quote-left.png 洪譯本末

譯官洪純彦, 豪俠好義。少時赴京, 欲覩一世之國色, 袖數百兩銀子, 往花房。有一女, 容姿果絶世, 而衣素服, 面帶羞澁之狀。純彦恠而問之, 對曰: “身是士族婦女, 而客中連失怙恃, 且喪一兄。三喪方在淺土, 而歸葬無策, 不得已欲從養漢的賣身, 以謀營窆矣。” 又問曾經人否, 對曰: “今日始初來, 而未曾汚身矣。” 純彦卽以手中銀與之曰: “用此則足以返櫬, 潔身歸葬, 好嫁士族。” 不顧卽去。其女人銘恩刻骨, 後嫁爲石尙書星夫人。每歲躬蠶手織爲緞, 緞首繡刺報恩緞三字。及純彦從宗系辨誣使赴京, 石星時爲禮部侍郎, 快許竣事。一日侍郞邀純彦, 盛供具以饋, 有一盛粧夫人拜稽階下, 因升堂進爵。純彦惶駭欲走避, 侍郞挽住, 令受爵, 因細道其一通, 純彦辭退。將渡江, 有人擎進侍郞夫人手札及禮單, 報恩緞數十疋, 及其他珍玩不可勝數, 或恐其不受, 置之江干而去。純彦不得已持歸, 以竣事功, 錄光國勳, 封唐城郡。後人名其所居巷爲報恩緞洞。後壬辰倭亂時, 石星方爲本兵, 前後奏請兵械粮餉, 力主曲施, 以成再造之績, 或疑夫人內助之力。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의 본말(本末)
역관 홍순언은 기상이 호협(豪俠)하고 의리를 좋아하였다. 젊은 시절에 중국에 가서 일세(一世)의 빼어난 미인을 보려고 수백 냥의 은(銀)을 품속에 지니고서 화방(花房: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있는 곳)에 갔다. 어떤 여자 하나가 용모와 자태가 과연 절세의 미인이었는데 소복(素服)을 입고서 얼굴에는 부끄러워 수줍어하는 기색을 띠었다. 홍순언이 이상히 여겨 물어보니, 여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사족(士族)의 부녀(婦女)인데 객지(客地)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연거푸 여의고 또 오빠 하나를 잃었습니다. 세 사람의 상구(喪柩)가 바야흐로 천토(淺土)에 있는데 고향에 돌아가 장례를 치를 방도가 없는 까닭에 마지못해 양한적에게 몸을 팔아서 장례 비용을 마련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전에 사람을 겪었느냐고 물으니, 여자가 대답하기를, “오늘에야 처음 이곳에 왔고 아직 몸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에 홍순언은 즉시 수중(手中)의 은을 여자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정도면 충분히 고향으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를 수 있을 것이니, 몸을 깨끗이 하고서 고향에 돌아가 장례를 치르고 부디 사족에게 시집을 가도록 하오.”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즉시 그곳을 떠났다. 그 여인은 뼈에 사무치도록 은혜를 고마워하다가 뒤에 시집을 가서 상서(尙書) 석성(石星)의 부인이 되었다. 매년 몸소 누에를 기르고 손수 길쌈을 하여 비단을 짰는데, 비단의 첫머리에 ‘보은단(報恩緞)’이라는 세 글자를 자수(刺繡)하였다.
홍순언이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임무를 띤 사신을 따라 다시 중국에 갔을 때 석성이 마침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있었는데 일을 제대로 마칠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하였다. 하루는 시랑이 홍순언을 초청하여 음식을 푸짐히 차려 대접을 하였는데, 성장(盛粧)을 한 부인 하나가 뜰아래 엎드려 절을 하고는 이어 마루에 올라와 술잔을 올렸다. 홍순언이 황공하고 놀라서 달아나 피하려고 하니, 시랑이 붙잡아 앉히어 술잔을 받도록 하고는 이어 사연을 자세히 말하였으므로 홍순언이 사양하고 물러 나왔다. 장차 강을 건너려 할 즈음에 어떤 사람이 시랑 부인의 수찰(手札)과 예단(禮單)을 받들고 와서 바쳤는데, 보은단 수십 필(疋)과 그 밖의 진귀한 물건들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혹시 그가 받지 않을까 염려하여 강가에 놓아두고 가 버렸다. 이에 홍순언은 할 수 없이 그것을 가지고 돌아왔고, 일을 제대로 완수한 공으로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녹훈(錄勳)되어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졌다. 후세 사람들이 그가 살던 거리를 보은단골[報恩緞洞]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석성이 바야흐로 병부 상서(兵部尙書)로 있으면서 전후로 우리 조정이 중국에 주청하는 무기와 군량 등을 각별히 베풀어 주도록 힘껏 주장하여 우리나라를 재건하는 치적을 이루었는데, 혹자는 그 부인이 내조(內助)한 힘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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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하필기』(1871년) 제24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Quote-left.png 報恩緞洞

洞卽今美洞, 報恩緞之變也。洪譯純彦入中州, 遺惠於石尙書夫人, 受報恩緞, 世居美洞。因以號之者, 而緞是美也, 故又變之爲美洞。今其孫尙居之。(…)
보은단동(報恩緞洞)
이 마을은 지금 미동(美洞)인데, 보은단동이 변한 것이다.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중국에 들어가 석 상서(石尙書: 석성(石星)) 부인에게 은혜를 끼쳐 보은단을 받고서 대대로 미동에 살았다. 이로 인하여 보은단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고, 비단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또 변하여 미동이라고 한 것이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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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하필기』제32권 > 순일편(旬一編)


Quote-left.png 廣通坊

(…) ○坊內有報恩緞洞, 卽譯官洪純彦所居。純彦豪俠好義。少時赴京, 欲覩一世國色, 袖數百兩銀往花房, 審問第一名妓, 有一女容色絶世, 服素而帶愁容。恠問之, 對曰: “妾本泗川人, 父官至主事, 客中連失怙恃, 且喪一兄, 三喪方在淺土, 而歸葬無策, 不得已欲從養漢的賣身, 以謀營窆矣。” 純彦問: “曾經人否?” 對曰: “今日始來, 而未曾汚身矣。” 純彦惻然, 卽以袖銀千兩與之曰: “此足以返櫬。潔身歸葬, 好嫁士族。我若私汝而付此, 非義士也。” 遂結爲義妹而歸, 其女人銘恩刻骨, 問知其姓名, 因賣銀返葬。後嫁爲石尙書星夫人, 欲報其恩, 每歲躬蠶手織爲緞, 緞首繡刺報恩緞三字。如是積年, 每我國使至, 必探純彦行止。及純彦從宗系辨誣使至京, 石尙書時爲禮部侍郎, 乃其職掌, 快竣事。一日邀純彦至第, 盛具以饋, 有一盛粧夫人拜稽庭下, 因升堂進爵。純彦惶駭欲走避, 侍郞止之, 令受爵, 因細陳本末。及歸將渡江, 有人擎進侍郞夫人手札及禮單及報恩緞數十疋及其他珍玩, 不可勝數, 或恐其不受, 置之江干而去, 純彦不得已持歸, 以竣事功, 策光國勳, 封唐城郡, 官知中樞, 後人以此名其居巷爲報恩緞洞。後壬辰倭亂, 石星方爲本兵, 我國前後奏請兵械粮餉, 力主曲施, 以成再造之績, 多賴夫人內助之力云。今訛號美墻洞。
광통방(廣通坊)
(…) ○방 안에 보은단동(報恩緞洞)이 있으니 곧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 살던 곳이다. 순언은 호협(豪俠)하고 의를 좋아하였다. 젊었을 때 명나라 서울에 가서 일세의 미인을 보고자 하여 수백 냥의 은을 가지고 기생촌[花房]으로 가서 제일가는 명기(名妓)를 찾았는데, 한 여자가 있어 생김생김이 절세가인인데 소복(素服)을 입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괴이하게 여겨서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첩은 원래 사천(四川) 사람이며 아버지가 서울 와서 벼슬하여 관직이 주사(主事)에 이르렀는데 객중(客中)에 연이어 부모님을 여의고, 또 한 형마저 잃어서 세 상사를 지금 권장(權葬: 임시 매장)하여 두었는데, 고향으로 모셔다 장사를 치를 길이 없어서 부득이 화류계에 나와 몸을 팔아서라도 장사를 치르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순언이 묻기를, “일찍이 다른 사람을 만난 일이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오늘 처음 나왔기 때문에 아직 몸을 더럽히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순언이 가엾게 여겨서 곧 가지고 갔던 은 천 냥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이면 영구를 모시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몸을 깨끗이 가지고 돌아가 장사를 지낸 다음 사족(士族) 가문으로 잘 시집가거라. 내가 만일 네게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이것을 준다면 의사(義士)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결의(結義)하여 누이동생을 삼고 돌아오니, 그 여인이 은혜에 감명하여 뼛속 깊이 새기며 순언의 성명을 물어서 알고 인하여 은을 팔아서 반구(返柩)하여 장사지냈다.
그 후 시집가서 상서(尙書) 석성(石星)의 부인이 되었는데, 그 은혜를 갚고자 하여 해마다 자신이 누에치고 손수 비단을 짰는데, 비단 첫 머리에는 보은단(報恩緞)이라는 세 글자를 수놓았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하고 우리나라 사신이 갈 때마다 반드시 순언이 오는가를 탐문하였다. 순언이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를 따라 명나라 서울에 가게 되었을 때, 석 상서가 그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이었는데 곧 그가 맡아하는 일이었으므로 쉽게 일을 다하였다. 하루는 석 상서가 순언을 초청하여 집으로 가서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대접하였는데, 한 성장(盛粧)한 부인이 뜰 아래에 나와서 배례하고 이어 당 위로 올라와서 잔을 드리는 것이었다. 순언이 깜짝 놀라서 달아나 피하려 하니, 시랑이 말리며 잔을 받게 하고 이어 자세하게 사실의 전말을 말하여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강을 건너려 하는데 사람이 와서 시랑 부인의 친필 서신과 예단(禮單), 보은단 수십 필 및 기타 진귀한 물품을 수없이 받들어 드리며, 순언이 안 받을까 염려하여 강가에 두고서 가니 순언이 부득이 가지고 돌아왔으며, 일을 성공한 공으로 광국훈공(光國勳功)에 책정되어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지고 지중추(知中樞) 벼슬을 주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사실로 인하여 순언이 살던 마을을 이름해서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하였다.
후에 임진왜란 때에는 석성이 병부상서[本兵]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전후 주청(奏請)하는 병기와 군량 등을 힘써 주장하여 극진히 돌보아주어서 우리나라의 재조(再造)의 공적을 이루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 부인의 내조(內助)의 공에 힘입은 바가 많다고 한다. 지금은 잘못 전하여 미장동(美墻洞)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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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국여지비고』제2권 한성부 > 부방(部坊)


이상의 자료들에서 모두 ‘고운담골’[美墻洞]의 유래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의 와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근현대 자료

Quote-left.png 대동고사(大東古事)

(…) △洪純彥 은 宣廟朝時譯官이라 少時에 隨使到明京하야 夜遊靑樓할새 願見美娥하니 主嫗ㅣ引一女而至호되 草草縞衣로 仙姿ㅣ綽約이어늘 純彥이 問其所從하니 女ㅣ低頭答曰妾本淅江人으로 父母ㅣ旅宦京師라가 不幸俱沒하고 零丁一身이 返葬無路故로 爲得葬需하야 行此沒耻之事 하노라 因鳴咽泣下어늘 純彥이 矜悶하야 遂不汚其身하고 贈銀百兩하니 一行이 笑之러라 後三十餘年〔宣祖 十七年甲申〕에 以宗係辨誣로 隨使 復到明京하니 朝陽門外에 帳幕如雲 하고 有人來言호되 石侍郞〔侍郞名 은 星이라〕夫人이 請見洪判事어늘 純彥이 不知所以하고 旣入見하니 昔 年靑樓에 贈銀之女ㅣ라 夫人이 曰我 ㅣ蒙君高義야 返葬父母하니 敢忘 大恩이리오 遂盛備酒饌하야 以餽一 行하고 宗係汚衊을 始得快雪以還하니 因夫人之故하야 石侍郞之宣力이 居多러라 及還에 夫人이 贈以五色綿 緞各二十疋호되 每端에 刺成報恩緞 三字하니 盖夫人手織이라 純彥所居 地를 世穪報恩緞洞〔卽今之美洞〕이러라 後又壬辰之亂에 純彥이 隨使淸 救於明할새 明朝議論이 不一하야 或 請堅守鴨綠하고 或云夷狄相攻을 中國이 不必救라호되 惟兵部尙書石星 이 力言朝鮮을 不可不救라하고 先賜 火藥軍器하니 此亦夫人之故라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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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성신문(皇城新聞)』, 1906년 8월 1일 (1면 5단)


20세기에 들어서 이곳은 ‘곤당골’ 혹은 ‘미동’이라고 불렸다. 아래는 근대 신문 아카이브에서 ‘곤당골’을 검색하면 1896년부터 1914년까지 모두 26건 기사가 확인된다. 아래는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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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삼일에 곤당골 슐쟝사 손영오 집문 압희 베 보자에 겨을 옷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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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독립신문』, 1896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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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당골 근쳐에 아편연을 먹는 폐단이 대단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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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신문』, 1898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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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젼밤에 곤당골 어늬계집의 집에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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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국신문』, 1900년 10월 3일


Quote-left.png 獨軍과 如한 전차, 殺一人 礫一犬, 새벽바람 급행전차, 목수 하나 불쌍히 죽고 개 한마리도 즉사, 이십칠일 아침

(…) 맛참경성남부 곤당골구십오통구호에 사ᄂᆞᆫ목슈일을ᄒᆞ난 안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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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신보』, 1914년 8월 28일


지도 및 도판자료

<도성대지도>와 <한양도>에는 ‘미장동(美墻洞)’으로 표시되어 있다.

<수선전도>에는 ‘미동(美洞)’으로 나와 있으며, <게일 한성부지도>에는 ‘곤당골’이라는 한글 표기와 함께 ‘美洞’이라고 병기되어 있다. 근대 신문에는 ‘곤당골’이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하며, 『경성부사』에서는 ‘미동(美洞)’이라고 쓰고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미장’, 즉 ‘고운 담’이 ‘곤당’으로 바뀌고, 한자 표기 역시 ‘미동’이 주로 사용되다가 20세기 이후 ‘미동’ 하나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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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표석 위치

종합 의견

〇 홍순언 관련 고사는 『국당배어』를 시작으로 『통문관지』와 『연려실기술』을 거쳐 여러 문헌에서 반복 전승되어왔다. 지도상 확인되는 명칭은 ‘미장동(美墻洞)’과 ‘미동(美洞)’인데, 이 미장동이 본래 ‘보은단동(報恩緞洞)’이 변한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20세기 지도 및 근대 신문에서 확인되는 명칭은 ‘곤당골’이다. 종합하면 ‘보은단골–고운담골–곤당골’로 변한 것이고, 이에 따라 한자 표기 역시 ‘報恩緞洞 - 美墻洞 - 美洞’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여기서 ‘미동’은 ‘곤당골’에 직접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미장동의 줄임말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 ‘곤당골’과 ‘미동’의 두 가지 명칭만 남게 된다.

〇 미장동, 미동, 곤당골은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 지도까지 모두 동일한 위치에 표시되어 있다. 현재 표석은 이를 기준으로 설치된 것으로, 현행대로 두어도 무방하다.

〇 표석 명칭을 ‘곤당골’로 수정하고, 문안 내용에도 조금 손질을 가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①보은단골, ②고운담골, ③곤당골 가운데 최초 명칭인 ‘보은단골’은 『통문관지』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전승을 통해 제시된 것이다. 즉, 이것이 고운담골의 옛 명칭이었는지는 사실 알기 어렵다. 고운담골의 경우 ‘미장동’이라는 한자 표기에서 추출한 것으로, 실제 이곳의 명칭이었음은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며 최종적으로 정착되어 널리 불린 이름은 ‘곤당골’이다. 홍순언 관련 고사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설화에 가까우므로 이 표석의 중심은 과거 이곳이 ‘곤당골’로 불린 장소였으며, 그 명칭과 관련하여 이러한 고사가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된다.

〇 현재 문구에서 설명하고 있는 고사의 내용에도 약간의 오류가 있다. 홍순언이 명나라에서 여인을 도와준 것은 임진왜란 때가 아니다. 한편 홍순언의 이야기는 『국당배어』에서 처음 소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직접 인용한 『통문관지』와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보은단(報恩緞)’ 세 글자가 아니라 ‘보은(報恩)’ 두 글자를 수놓은 비단을 ‘보은단’이라고 한 것이다. 본래 구전된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므로 어느 것이 맞다고 하기 어렵지만, 시기상 앞선 기록을 따라 ‘보은’ 두 글자를 수놓았다고 고치는 편이 좋다고 본다.

표석문안

Quote-left.png 곤당골

이곳은 옛날 곤당골·미동(美洞)으로 불리던 마을이다. 선조 때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명나라에서 한 여인을 도운 일로 ‘보은(報恩)’ 두 자를 수놓은 비단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가 살던 동네를 보은단골이라 했고, 나중에 고운담골·미장동(美墻洞)으로 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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