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 칭 | 낙천정 터 |
|---|---|
| 한 자 | 樂天亭址 |
| 영 문 | Site of Nakcheonjeong Pavilion |
| 설 명 | 태종(太宗)이 왕위를 세종(世宗)에게 물려주고 지은 ‘이궁(離宮) 낙천정(樂天亭)’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세종은 태종과 의논하여 대마도(對馬島) 정벌군을 파병하였고, 이기고 돌아온 정벌군의 환영식을 베풀었다. |
| 위 치 | 뚝섬로58길 101(자양동 670) |
| 설 치 | 2009 |
낙천정(樂天亭)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해인 1418년 겨울에 짓기 시작하여 1419년 2월에 완공되었다. 태종은 낙천정이 있는 이궁뿐만 아니라 한성 동쪽에는 풍양궁(豐壤宮), 서쪽에는 연희궁(衍禧宮)을 짓고 번갈아가며 거처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낙천정에 자주 머물렀다. 이 때문에 세종은 물론이고 여러 대신들이 낙천정으로 상왕을 찾아가 문안하였다.
上王幸東郊, 觀臺山新構離宮。
상왕이 동교(東郊)에 거둥하여, 대산(臺山)에 새로 세우는 이궁(離宮)을 살펴보았다.
상왕이 동교에서 매사냥을 하다. 대산 아래 지은 궁의 낙성식을 하다
上王與老上王幸東郊, 觀放鷹, 上從之, 遂置酒于臺山新亭, 至暮乃還。 山在箭串坪之東, 臨漢水, 狀如伏甑, 或曰甑山。 上王自前冬命築宮其下, 作亭其上, 至是告成, 乃命朴訔名之, 訔請命以樂天, 從之。
상왕은 노상왕과 더불어 동쪽 교외에 나아가 매사냥을 하는데, 임금도 따라가 드디어 대산(臺山)의 신정(新亭)에서 잔치하고 저물녘에 돌아왔다. 대산은 살곶이[箭串] 벌의 동쪽에 있어 한강에 다다르고, 형상이 시루를 엎어 놓은 듯하여, 혹은 증산(甑山)이라고도 한다. 상왕은 지난겨울부터 그 아래에 궁을 건축하고, 그 위에 정자를 짓게 하여, 이제야 낙성식을 하므로, 박은에게 명하여 이름을 짓게 하니, 박은은 낙천(樂天)으로 명명할 것을 주청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상왕이 영의정에게 포천과 풍양에 이궁 지을 뜻을 전해 말하다
上王召趙末生、元肅語曰: "近日鵂鶹來鳴, 吾不以爲怪, 然離宮避居, 自古而然。 且《韻會》釋鶹字曰: ‘鶹, 鳥名, 鳴則凶。’ 吾欲避居, 若開京則涉水且遠, 吾於前年, 審知往來多弊。 欲於抱川、豐壤, 以本宮奴子營室十餘間, 自樂天亭經由豐壤, 向抱川來往避方。 若抱川則多有本宮田民, 營室不難, 予已命施行, 若豐壤則有奴子而無田土, 欲於古邑之基營室, 又得閑田, 給奴子以資其生。 然營室之事, 誓不煩國家之力。 爾其具告領議政。" 領議政適承召詣壽康宮, 聞命啓曰: "上敎甚當, 臣請奉行。"。
상왕이 조말생과 원숙을 불러서 말하기를, "근일에 부엉이가 와서 우는데, 내가 괴이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마는, 궁을 떠나 피해 있는 것은 옛 부터 있는 일이다. 또 《운회(韻會)》에 유(鶹)자를 풀이하기를, ‘유는 새 이름인데, 울면 흉하다.’ 하였으니, 나는 피해 있고자 한다. 개경 같은 데는 물을 건너야 하고 또 길이 멀어서, 내가 전년에 왕래할 때 폐단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포천(抱川)과 풍양(豐壤)에 본궁 노자(本宮奴子)만으로 집 10여 간을 짓고, 낙천정에서 풍양을 거쳐 포천에 향하여 내왕하면서 〈흉한〉 방위를 피하고자 한다. 포천 같은 데는 본궁에 〈딸린〉 전토와 백성이 많아서 집짓기 어렵지 않으므로, 내가 이미 집을 짓도록 명하였지마는, 풍양 같은 데는 노자는 있어도 전토가 없다. 옛 읍터에 집을 짓고, 또 묵은 밭을 노자에게 주어서 그들의 생계를 돕고자 한다. 그러나 집 짓는 일은 맹세코 국가의 힘을 괴롭게 하지 않겠으니, 너는 〈이 계획을〉 다 영의정에게 말하라."하니, 영의정이 마침 부름을 받고 수강궁에 왔다가 명을 듣고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매우 좋으니, 신이 〈명을〉 받들어 거행하겠나이다."하였다.
왕세손이 수행하여 헌릉에 나가 제사를 지내다
己酉/上詣獻陵, 王世孫隨駕。 先詣昌德宮行禮眞殿, 御龍舟渡廣津 (…)
임금이 헌릉(獻陵)에 나아가는데, 왕세손이 수행하였다. 먼저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예를 거행하고 나서 용주(龍舟)를 타고 광진(廣津)을 건넜다. (…)
한강을 건너기에 편한 배다리에 관한 어제 《주교지남(舟橋指南)》의 내용
舟橋節目曰: "舟橋安排, 津路爲先, 露梁津渡, 兩岸相對而高, 中流平穩而深, 且其長廣, 比纛島、西冰庫, 三分減一。 地勢之方便, 工役之省約, 甲於五江津路, 則以露梁永定溫幸時及宣陵、靖陵、章陵幸行時, 幷用此路, 獻陵、英陵 寧陵幸行, 移設於廣津。"
주교 절목(舟橋節目)에 ‘배다리를 설치할 때는 나룻길을 먼저 보아야 하는데, 노량진 건널목은 양쪽의 언덕이 마주 대하여 높고 강복판의 흐름은 평온하면서도 깊다. 그리고 그 길이와 넓이도 뚝섬[纛島]이나 서빙고(西氷庫)에 비하여 3분의 1은 적어 지형의 편리함과 공역의 절감이 오강(五江)의 나룻길 중에 가장 으뜸이다. 이에 온천에 행차할 때와 선릉(宣陵)ㆍ정릉(靖陵)ㆍ장릉(章陵)에 행차할 때 모두 이 길을 이용할 것을 영구히 결정하고, 헌릉(獻陵)ㆍ영릉(英陵)ㆍ영릉(寧陵)에 행차할 때에는 광진(廣津)으로 옮겨 설치한다.’ 하였다.
또한, 광진은 도성과 경기도 광주 및 강원도 일대를 연결해 주는 나루였다.
廣津: 在州西十八里, 禿浦下流。又見楊州。
광진(廣津): 서쪽 18리 독포 하류에 있다. 또 양주 편에 보라.
楊津: 在州南六十七里。一名廣津渡, 迷津下流。江原道春川府昭陽江, 忠淸道忠州金灘合爲此津。
양진(楊津):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광진도(廣津渡)라 하기도 하는데 미진(迷津) 하류이다. 강원도 춘천부 소양강(昭陽江)과 충청도 충주 금탄(金灘)이 합쳐져서 이 나루로 되었다.
渡迷津 (…) 又其西有廣津渡。 【有渡丞譏察出入, 以左道水站轉運判官兼之, 專掌漕運。】 四境, 東距楊根、龍津三十里, 西過果川、水原界至聲串八十五里, 南距利川、陽知四十五里, 北距楊州十一里, 東西一百十五里, 南北五十六里。
도미진(渡迷津) (…) 또 그 서쪽에 광진도(廣津渡)가 있다. 【도승(渡丞)이 있어서 〈사람의〉 드나드는 것을 조사하는데, 좌도 수참 전운 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하여 조운(漕運)을 관장한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양근(楊根) 용진(龍津)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과천(果川)을 지나서 수원(水原) 경계의 성곶이[聲串]에 이르기 85리, 남쪽으로 이천(利川)의 양지(陽知)에 이르기 45리, 북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기 11리요, 동서(東西)가 1백 15리, 남북(南北)이 56리이다.
광진간로(廣津間路)는 광나루를 통해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었고 광주로(廣州路)는 삼전도를 지나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1936년 경강의 두 번째 다리이자,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을 잇는 광진교가 설치되면서 광진은 나루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會衆萬餘盛況極한 廣津橋의 初渡式 제일 먼저 이 다리를 건너는 이는 纛島尹氏一家三代
경성과 강능지방의 교통운수 문물교환상 중대 역할을 가진 광나루에 다리가 업서서 뜻잇는 인사들의 한 걱정거리로 되얏든 것을 경긔도가 주체가 되어 국고 보조와 반독지가의 지원으로 소화 9년 8월 14일부터 총공비 八十四萬三千원으로 가교에 착수하야 만잇해의 세월과 연인원 十八萬五千인의 힘을 드리는 동안에 부상당한 사람이 七명이엿섯는데 그 가운데서 三명의 사망자가 까지 내인난 공사의 광진교가 금년 九월 三十일에 준공되야 十三일 오전 十一시 十五분부터 준공식을 거행하얏다. 당일 이력사적 크나큰 다리를 맨 처음건는 사람은 임이 보도한 바와가티 고양군 뚝도면 화야리 윤상옥씨 一가 三대부 엿섯는데 이 날은 고양군과 광주군은 물논하고 경성시내에서까지 남녀노유가 물밀려드듯이 모혀서 萬여 관중은 추석이 지낸지 몃칠이 안되는 오늘에 또다시 추석을 맛난것과 흡사하게도 모혀 동일 오후 두시부터 一반의 교통을 허락하야 콧노래 부르며 락동강 다리에 다음가는 조선 제二의 기나긴 다리를 가을 하늘 맑은 바람 쏘여가면서 즐겁게 건너 다녓다.(사진은 다리와 윤씨 一가가 처음 건느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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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광진(廣津)"은 광장리 반대편에서 광나루를 바라보고 그린 것으로, 현대 지도와 비교시 그림속에 묘사된 나루의 지형이 현재 표석이 위치한 지점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나루 터의 위치는 근대지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추적이 가능하다. 1:50,000 지형도를 통해 광나루 위치가 지금의 광진교보다 상류 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0,000 지형도와 현대 지도를 비교하면 지형도에 표시된 나루 위치가 실제 표석이 세워진 지점과 거의 일치한다.
현재 표석 위치에는 문제가 없다.
현재 표석문구에 큰 문제는 없다. 다만, 고지도에 의하면
광나루는 한양과 경기도 광주·강원도를 이어주는
길목이었으므로 현재 표석 문구를 ‘서울과 경기도 광주,
강원지방을 이어주던 나루터’로 수정하는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또한, ‘너븐나루’라는 명칭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찾기
어려우므로 삭제하는 것을 제안한다.
광나루 터
廣津址
서울과 경기도 광주, 강원지방을 이어주던 나루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