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팀프로젝트 위키페이지 6조

my9univ
My9univ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5월 1일 (목) 02:09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2025-1 디지털인문학이란

안동 광산김씨 예안파를 중심으로 보는 진정한 군자의 삶
파트 작성자(다수 가능)
조장 인문정보학 이효림
목적 및 필요성 인문정보학 이효림
연구 대상 인문정보학 이효림
온톨로지 인문정보학 이효림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인문정보학 이효림, 한국고전학과 홍길동
연구결과 인문정보학 이효림




















목적 및 필요성

세상이 평화로우면 도학에 전념하는 것이 군자이다. 그러나 나라에 변란이 있으면 칼을 집고 일어서서 구국의 길을 걷는 것이 군자이다.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일 때 스스로 일어나 앞장서 우리나라를 구한 것은 항상 민중이었다.

조선왕조 500여년의 역사에는 여러 국난의 상황이 있었다. 국난의 상황에서 조선의 민중, 아니 조금 더 나아가 소위 기득권이라 칭해지는 양반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라는 궁금증에서 본 프로젝트는 시작하였다.

이에 우리 6조는 안동 광산김씨 예안파를 중심으로 나라의 환란에 칼을 뽑아드는, 구국의 길을 걷는 진정한 군자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입향조와 함께 불천위가 된 김해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은 후조당 종택에 부속된 재사(齋舍, 제사 지내는 집)와 광산 김씨 중 오천리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김효로(金孝盧,1445∼1534)와 증손자 김해(金垓,1555∼1593)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1]

본래 광산김씨 사당은 안동 예안 오천리 입향조[2]인 김효로를 제향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김해가 임진왜란 시 영남의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여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안동 광산김씨는 수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당에는 김효로와 김해만이 제향되어 있다.

입향조가 모셔진 신성한 사당에, 김해는 어떠한 업적이 있어서 입향조와 함께 불천위로 모셔질 수 있었는가?

안동 광산김씨 예안파, 그 중 특히 김해를 중심으로 나라의 환란에 칼을 뽑아드는 진정한 군자의 모습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연구 대상

김해

김해는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원권지정자와 예문관검열을 지낸 문신 관료였다.

고향에서 지내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는 안동지방과 영남 북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진중일기인 『향병일기(鄕兵日記)』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行軍須知)』를 저술하였다.

난중잡록(亂中雜錄)[3]에는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았는데, 그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썼다고 되어있다.[4]


군자의 구국정신을 일깨운 김성일의 격문

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임진왜란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1592년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김해도 김성일의 격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Quote-left.png

국운이 막혀 오랑캐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종묘사직이 병화(兵火)에 휩싸이고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니, 백성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지가 오래입니다.
누추하고 협소한 지방이라서 예전에도 이 지역 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유학만을 숭상했을 뿐 무예를 익히지 않았습니다. (중략)
의병을 불러 모으니 모두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활을 잡아 본 사람은 열에 한둘도 되지 않아 떨쳐 일어나 진격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만,
요해처에 복병을 설치할 수는 있으니, 격분한 마음을 떨쳐 임금을 위해 죽고자 하는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군대는 근본이 갖춰지지 않았고, 통솔하는 자의 재주가 부족하여 병세(兵勢)가 열악합니다. 게다가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병기는 탕진되어 모두가 나무를 잘라 만든 병기를 쥐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거사를 한다면 뜻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충의로운 마음이 천성으로부터 나오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도리도 예전에 대략이나마 익혔습니다.
불끈 마음을 먹고 저 더러운 오랑캐를 소탕하고자 하며, 하늘에 맹세컨대 이 도적들과는 세상을 함께하지 않을 것입니다.

Quote-right.png
출처: 김해,<근시재집>


이 답장을 통해 여러 환경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분개하며 일어났고, 김해 또한 같은 마음으로 의병대장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향병일기』와 『행군수지』

『향병일기(鄕兵日記)』는 서문과 발문 없이 1592년 4월 14일 왜적에 의한 동래성 침공 소식으로부터 그 다음해인 1593년 6월 19일 계림전투까지의 의병 활동 경과를 날짜 별로 기록하고 있다. 즉, 김해가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1593년 왜군에게 포위되어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장렬히 순국하기 바로 직전까지의 전투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김해는 영남 북부 지역의 의병장으로서 여러 고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예천, 용궁, 함창 등지 등지에서 벌인 왜군과의 전투 과정과 각종 내역 뿐 아니라 임진왜란 초기 영남 북부 지방의 의병 활동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행군수지(行軍須知)』는 부대 지휘관으로의 장군의 도리를 논하고 금령을 세우는 방법과 병사와 병마를 선발하는 요령, 군량 보급, 무예 강습 등에 대하여 기술했다. 믿음과 사랑으로 인심을 단단히 결속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또한 진을 치는 법, 성을 지키는 요령, 간첩 색출, 항복을 받는 요령 등을 차례로 밝혀서 부대 지휘관이 반드시 읽고 익혀야 할 책이었다.

『향병일기(鄕兵日記)』『행군수지(行軍須知)』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처한 군자의 의식과 대응 자세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 의병사를 고찰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기록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상정의 문집인 대산집(大山集)에 따르면 김해는 이외에도 『서행일기(西行日記)』등을 저술하였으나 이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서 전해지지 않는다.


『향병일기』에 저술된 무기

『향병일기(鄕兵日記)』에는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는 비격진천뢰만한 것이 없으며,[6] 1593년 2월 24일에는 반암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격진천뢰를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되어있다.

‘비격진천뢰(飛格震天雷)’는 ‘날아올라 적을 치니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하여 이름이 붙은 인마살상용 시한폭탄의 일종로 선조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것이다. 내부에 화약과 빙철(憑鐵) 등을 장전하여 완구(碗口)라는 화포에 의하여 목표물에 발사하는 무기로, 발사 후 표적지에 날아간 뒤 시간이 지나서 터지는 일종의 작렬 시한폭탄으로 분류된다. 섬광, 굉음과 함께 수많은 철파편을 사방에 흩날리는게 특징이다.

그 시대 다른 포탄들은 발사되어 성벽이나 시설물을 우선 파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비격진천뢰는 날아간 뒤 적병들 사이에서 폭발하는 인마살상용 무기라는 점이 다르다.


일기, 가학(家學)이 되다

김해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면서 『향병일기(鄕兵日記)』를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 김광계(金光繼,1580~1646)는 매원일기를 썼다. 또한 김광계의 아들 김염(1612~1659)도 묵재일기를 썼다.

가히 일기는 안동 광산김씨 예안파의 가학(家學)이 되었다고 일컬을 수 있다.

이 일기들에는 손님을 접객하거나 취미활동과 같은 일상생활, 관혼상제와 같은 가정의례 뿐 아니라 농사·노비·토지경영 등의 경제활동, 수령 및 아전 등의 관리 접촉이나 부세와 환곡, 지방정책과 같은 지방통치 관계, 질병 치료와 식생활 등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생생한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이나 당쟁 등 대내외적 격동기 사회를 살아가는 재지사족의 일상과 고민이 담겨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온톨로지

온톨로지 시각화 그래프





Class

Class Description(subClass) sample(ID)
인물 역사적 인물 김해, 김효로
개념/분류 개념용어 / 분류주제 의병, 안동_광산김씨 / 안동_광산김씨_일기
사건 국난 임진왜란, 병자호란
문화유산 시도 유형문화유산 / 국가민속문화유산 H37-0483-0000 / G00-0227-0000
물품 무기 비격진천뢰
장소 고택 안동_후조당_종택, 광산김씨_재사_및_사당
문헌 일기 / 지침서 / 격문 향병일기 / 행군수지 / 김성일_격문




Relation

Relation Description(source-target Class) sample(source - target ID)
~라는_문화유산이다 !! 장소-문화유산 광산김씨_재사_및_사당 - H37-0027-0000
부분_~를_갖고있다 장소-장소 광산김씨_재사_및_사당 - 광산김씨_재사
~에_제향되었다 인물-장소 김효로 - 광산김씨_재사
~의_입향조이다 인물-개념/분류 김효로 - 안동_광산김씨
~으로_활동하다 인물-개념/분류 김해 - 의병
~의_영향을_받다 개념/분류-문헌 의병 - 김성일_격문
~가_썼다 문헌-인물 향병일기 - 김해
~를_기록하다 문헌-사건 향병일기 - 임진왜란
~의_유형이다 문헌-개념/분류 향병일기 - 안동_광산김씨_일기
~에_대해_쓰여있다 문헌-물품 향병일기 - 비격진천뢰
~의_유형이다 물품-개념/분류 행군수지 - 지침서
~라는_문화유산이다 문헌-문화유산 향병일기 - H37-0483-0000
아들_~가_있다 인물-인물 김해 - 김광계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우리가 그린 지식관계망

6조의 지식관계망(miro 사용)




연구결과

  • 시맨틱 데이터 구축 및 디지털 큐레이션을 하면서 도출한 사항을 기술
    • 사실적인 관계와 사실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 추정 등
    • 처음 그렸던 지식 관계망과의 비교(크게 어떠한 점이 달라졌는지), 시맨틱 데이터 구축 시 중점적으로 고려한 사항 등

  • 내용 오류: 광산김씨_재사 안동_후조당_종택 부분_~를_갖고있다
  • 논리 오류 수정: 김해 의병 ~으로_활동하다 의병장 + 의병 김성일_격문 ~의_영향을_받다
  • 논리 구조 수정: 행군수지 지침서 ~의_유형이다 부대지휘관 (원: 행군수지 - 부대지휘관 지침서 - ~의 유형이다 => 추후 노드 활용성 고려 + 가장 많은 고민을 한 부분. 일기와 지침서는 성격의 차이가 큰데, 속성으로 분류를 넣어 지침서. 라고도 썼기 때문. 그러나 김해가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의병활동을 기록으로 남긴 일기만 쓴 것이 아니라, 부대 운용지침서인 행군수지를 작성하여 의병을 조직적으로 잘 운영하고자 하였다는 면모도 강조하고자 하였다.)
  • 릴레이션 구체화: ~가_썼다 (원 계획: ~가_만들었다)
  • 노드 생성: 일기 ~ 공통점이 보이고, 콘텐츠화 가능
  • 릴레이션 일관화: 김광계(부) - 김염(아들) : 아들 ~가 있다 로 수정(원: ~의 아들이다. 였는데, 둘다 있음 => 아버지에서 아들로 화살표가 뻗어져나가는 것이 의미상 적합하겠다는 판단)




주석

  1.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2. 어떤 마을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이나 조상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입향조"
  3. 임진왜란 시 남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이 쓴 야사집으로 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차례의 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4. 亂中雜錄[二] 壬辰下
  5. 대산집 제 49권 행장(行狀)의 예문관 검열 증 홍문관 수찬 근시재 김 선생 행장(贈弘文館修撰近始齋金先生行狀)
  6. 향병일기 1593년 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