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진흥원 스토리
목차
개요
서원
- 공주 충현서원(최초의 서원), 돈암서원(노론쪽 서원), 노강서원(소론쪽 서원-명재쪽 서원)
- ① 서원의 공간, 이 서원의 배향인물은 누구고, 관련 서적은 무엇인지
- ② 서원에서 특출난 이야기(ex. 정회당)
- 우리가 뽑은 주제 관련
- History: 현재 초반(정회당)만 있음. 원래 돈암서원은 중간이 없으나, 어쨋든 20년대 들어서 흥하는 부분도 추가해야함 (너무 길어지겠지만, 그러면 앞부분을 조금 쳐내기 / 모든 곳에 해당)
- 돈암서원 : 묘정비 등 문화유산 ~ 공간(시각적으로 보이는)은 무조건 스토리가 되어야 함(모든 곳에 해당)
- 배향인물: 시설의 존립이유 -> 그러나 기호유학과 연결하면 풀어내기 어려울 듯 -> 그래서 그냥 배향인물만 주로 하여 스토리를 구성할 것. (배향인물의 배향 전후로만) ~ 배향인물의 제자, 스승 등은 하지 말고.
- History: 현재 초반(정회당)만 있음. 원래 돈암서원은 중간이 없으나, 어쨋든 20년대 들어서 흥하는 부분도 추가해야함 (너무 길어지겠지만, 그러면 앞부분을 조금 쳐내기 / 모든 곳에 해당)
스토리
충현서원
노강서원
배향인물
- 1675년(숙종 원년)에 김수항(金壽恒)의 발의로 윤황(尹煌, 파평윤씨 일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윤황의 위패를 봉안
- 1682년(숙종 8)에 ‘노강’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윤황 아들-형)를 추가 배향하였다.
- 그후 1723년(경종 3)에는 명재(明齋) 윤증(尹拯, 윤선거 아들)과 윤선거(尹宣擧, 윤황 아들-동생)를 추가 배향하였다.
- 윤선거 언제 봉안하였는지? 건립당시인지, 1723년인지 확인 필요
공간
- 구릉을 등지고 남서향인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배치하고 있다. 서원 전면에 들을 두고 뒤로는 구릉을 등지고 좌우에 민가들이 배치되어 있다.
- 초입에 서 있는 홍살문을 지나서 곧바로 있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 마당을 중심으로 북편에 강당이 전면을 향해 크게 서있고, 그 앞 좌·우측에 강학공간인 동재, 서재가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 강당 뒤편에는 높은 단을 조성하여 제향공간인 내삼문과 사당을 배치해 두었다. 사당 주위에는 담을 둘러 엄숙함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전면에 강학공간, 후면에 제향공간인 ‘전학후묘’식 배치이다.
- 내삼문은 일반적인 1동으로 하지 않고 3동으로 하여 예적질서에 따라 신과 사람의 출입동선을 확연하게 구분하였는데, 이는 흔치않은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 1871년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한 곳으로, 전학후묘식 배치로 공간의 위계성을 유지하는 서원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사적으로 승격됨
- 기와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경내는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다. 전면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강당, 후면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사우(祠宇)가 자리잡고 있는데, 강당이 있는 일곽은 입구에 외삼문을 세우고 강당 앞마당의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배치되었고, 사우 주위는 근래에 자연석 담장을 돌리고 전면에 문도 설치하였다.
- 내삼문
- 일반적인 1동으로 하지 않고 3동으로 하여 예적질서에 따라 신과 사람의 출입동선을 확연하게 구분하였는데, 이는 흔치않은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 강당
- 전퇴를 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충남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 중에서 대표적으로 큰 규모이다.
-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여덟 팔八자 모양의 박공면 풍판 아래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덧지붕인 영榮을 눈썹처럼 달았다. 이는 건물의 외관을 안정적인 형태로 보이게 하는 역할도 한다.
- 노강서원 강당은 평면 구성은 조선시대 일반적인 서원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 규모는 현존하는 서원 강당 중에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도 철폐되지 않고 원위치에서 그 모습을 유지해오고 있는 강당은 서원 건축으로서 검박하고 건실한 조형미를 바탕으로 공포와 화반 등 세부 수법에서는 장식화되는 후기적 수법을 보여준다. 특히 ‘영(榮)’을 설치한 지붕의 모습은 돈암서원 응도당과 청주향교 명륜당에서도 볼 수 있으나 보다 합리적이고 구축적인 결구수법을 보여준다.
가치
- 노강서원은 1675년에 건립한 이후 한 차례도 이건하지 않고 대원군 때 훼철되지 않은 기호유학의 대표적 서원으로 들판에 입지하여 예적질서 체계를 부여한 전학후묘 형식으로 기호지역의 배치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강당은 충남지역에서 대표적으로 큰 규모이며, 이에 적절한 모양새의 기단과 초석이 화려함과 검박함으로 융합된 1출목3익공의 공포 형식이 돋보인다. 맞배지붕에 덧붙은 ‘영’은 아주 귀한 시설로 풍우로부터 훼손을 방지하고 어색하게 높은 건물의 외관을 시각적으로 안정되게 할 뿐 아니라 팔작지붕의 곡선미를 조심스럽게 더해서 검소함을 잃지 않게 한 뛰어난 기법을 엿보게 하며, 그 시대 사림들의 예제(禮制)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다. 청방간의 맹장지 4분합 굽널띠살 들문은 17세기 초 건물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 창호로 옛스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 이처럼 노강서원 강당은 기호지역 유교건축의 귀중한 양식적 특징과 지역성 그리고 17세기 말 서원건축의 시대적 양상을 잘 살펴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역사
- 1682년(숙종 8)에 ‘노강’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 1717년(숙종 43) 정쟁으로 인해 윤선거·윤증 부자가 관직이 삭탈되면서 사액 현판이 철거됐다가, 1722년(경종 2) 두 사람의 관직이 회복되면서 현판도 복액되었다. 1781년(정종 5)에 나라에서 중수하였다.
-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보존되었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문헌
- 노강서원의 영건문(營建文)을 지은 이는 김수항이다. 그는 김상헌(윤황과 친구사이)의 손자이자 송시열과 같이 활약한 서인의 중진이며 나중에는 노론에 가담하여 윤증 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강서원 건립 당시는 노·소론 갈등이 첨예화되기 이전이므로 김수항이 영건문을 썼던 것 같다. 이로써 볼 때 서원은 파평윤씨의 문중서원이면서 동시에 기호계의 서원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물
- https://ncms.nculture.org/confucianism/story/2640
- 배향 인물 중 가장 선조가 되는 윤황은 사람됨이 강하고 굳세며 기계와 절개가 있는 인물로 선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다가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에 등용되어 다시 관직에 올랐지만, 병자호란 때 "오늘날의 화친은 사실상 항복이다." 하여 인조의 노여움을 사 귀양 보내졌다. 삼사(三司)의 구원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향에 있는 니산으로 돌아와 “나는 선묘(先墓)나 지키다가 죽겠다”하고 이후로는 절대 시국에 대한 일을 말하지 않았고 자손들에게 환로(宦路,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화친을 배척했다는 이유로 유배형을 받아 적소에서 죽게 되었다. 죽기 전 유언을 남기기를 장사를 간소하게 치르고 염(斂)할 때 사인(士人)의 의복을 쓰도록 하였다.
- 윤황이 기호유학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은 우계 성혼의 제자이자 사위였기 때문이다.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은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 있다가 기묘사화 이후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에 은둔한 인물로 조광조의 도통을 잇는 인물 중 하나였다. 윤황은 성혼의 문하에 있다가 후에 그의 사위가 되면서 조광조-성수침-성혼-윤황-윤선거-윤증으로 연결되는 기호유학의 한 맥을 이루게 되었다.
- 윤황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인 윤문거(尹文擧, 1606~1672)는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의 병과에 급제해 부친을 도와 삼사(三司)의 일을 맡아 보았다. 윤황이 유배 가게 될 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를 잡아가라”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부친의 죽음 이후 관직을 버리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둘째 아들인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역시 척화론을 주장하였는데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신했을 때 부인과 함께 순절을 계획했지만 홀로 살아 돌아왔다.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 윤선거는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금산으로 들어가 성리학에만 몰두하였다.
- 윤증(尹拯, 1629~1714)은 윤선거의 아들이다. 일곱 살이 되던 해 강화도에서 어머니의 자결을 경험하였다. 이후 윤증은 “직접 목격한 나의 금창리 터지는 슬픔이 오죽했겠는가. 어머님 한 분을 지키지 못한 주제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어떻게 벼슬길에 나서겠는가?” 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부인과 함께 자결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아버지 윤선거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기에 윤증도 과거를 포기하고 부친 곁에서 학문을 이어간 것이다.
돈암서원
돈암서원
아름답고 아름다운 김장생, 문헌으로 보는 김장생의 일생
-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김장생
- 개요: 문헌, 문서 등에서 김장생에 대한 편가를 찾아서 연결
- 스승: 송익필(매우 아름답고 아름답다 - maybe 본인과 다른 의견도 옳다고 할 줄 알아서?), 율곡 이이(김장생이 부친상으로 돌아가니 서로 성장함이 없어짐, 나와 다른 의견도 옳다고 하는 멋진 사람~), 성혼(나와 다른 의견도 옳다고 하는 멋진 사람~)
- 성혼: 이황 주리론과 이이 주기론을 종합하는 독특한
-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임명됨 : 과거에 뜻이 없음(본인피셜- 사계전서 ~ 그치만 사계전서는 길어서 안넣을 것임My9univ (토론)), 학행으로 천거됨(이조가 김장생을 천거한 이유는 성경에 깊이 몰입하고 사색하여 옛 교훈을 독실하게 믿음)
- 제자: 송시열(송익필에게 어렵게 학문을 배움, maybe 젋었을때 색욕을 금하고 공부에 전념함)
- 친구:
- 기타
- 아버지의 죽음으로 조선의 상례를 확립 : 스승 송익필(편지 2개에서 정의와 예의가 넘치니 예학의 진보가 있다 ㅇㅇ), 그 해 상례비요(喪禮備要, 원본은 신의경 작)를 보충,삭제,교정하여 완성함(증보상례비요라고도 함)
- 임진왜란: 충청감사 왈(그는 정산현감으로 쇠잔해가는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고 정사를 살핌)
- 예송논쟁의 시초: 선조때 경북 성주군에 사는 정구를 찾아가 임금에게도 관혼상제 및 각종 예의가 적용되어야하는 가에 대해 논의함. 김장생은 예의는 보편적이므로 임금도 예외가 아니라고 하였음. 대담은 종결되었지만 후에 현종때 예송 논쟁으로 발전함(관련 자료 있는지는 찾아봐야함.)
- 인조반정 이후, 대학자로서 방향을 제시 : 관직을 사양하고 반정공신들에게 새 임금을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며 정치의 방향을 제시(인심이 흡족하여야 차후 할말이 있고 탈이 없다-문헌 무엇?)
- 13가지 일 건의: 이괄의 난때 논공행상을 적절하게 하지 못함을 비판하며 중요한 정사 13가지를 논함
- 나이 80에 어명을 받들다: 정묘호란때 호소사(號召使)로 임명되어, 나이 80세에 충청도와 전라도에 격문을 보내 식량을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다. (인조왈 늙고 병중인데 참가해줘서 매우 기뻐)
- 김장생의 죽음: 인조의 보양관(어려서 학움한 것은 김장생 덕분ㅇㅇ),
- 스승: 송익필(매우 아름답고 아름답다 - maybe 본인과 다른 의견도 옳다고 할 줄 알아서?), 율곡 이이(김장생이 부친상으로 돌아가니 서로 성장함이 없어짐, 나와 다른 의견도 옳다고 하는 멋진 사람~), 성혼(나와 다른 의견도 옳다고 하는 멋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