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와 전남대로 보는 광주의 5.18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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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조선대학교는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으로 1947년 착공된 이후 한국전쟁으로 건립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교직원과 학부모 모두가 온갖 힘을 모아 착공한 지 8년 만인 1947년에 완공되었으며, 전남대학교 또한 지역주민의 성원과 기금에 힘입어 창설되었다. 가히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 모두 광주 시민들의 열의로 설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대학을 통해 광주의 5.18 민주정신, 가장 마지막까지 계엄군에 맞서 싸운 광주지역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기억을 살펴보고자 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로 인해 최규하 대통령이 권한대행으로 제 10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는데, 이 혼란 속에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군인, 이른바 신군부들이 12.12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들은 권력을 장악하고자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포하여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17일 밤과 18일 새벽 계엄군은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등 전남 20개 대학에 병력을 배치하고 점령했다.
계엄군은 교내를 수색하여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 및 구금했는데, 이 중에는 계엄령에 반대하는 농성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1] 이렇게 연행된 대학생은 전남대학교 69명, 조선대학교 43명이다. [2]
5월 18일 오전 7시에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오전 10시가 되자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비롯한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200여명이 모여들었다.[3] 학생들은 계엄 확대와 휴교 조치에 항의하며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과 충돌하였고, 계엄군은 난폭하게 학생들을 연행하면서 계엄군 7명과 일부 학생들이 부상 당했다. [4] 비슷한 시각 전남대 후문,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에서도 반란 계엄군의 일방적인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5]
이후 금남로로 진출해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면서 민중항쟁이 시작되었고, 계엄군의 무차별·무자비한 시위진압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대학교에는 1,000여명 이상의 계엄군이 주둔하였는데, 운동장과 구체육관은 강경하지 않은 부대원을 구타하고 얼차려를 가하거나, 연행된 학생들을 기합주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심지어는 기합 도중 대검으로 찌르는 일도 있었다. [6]
시위가 확산되고, 계엄군이 극단적으로 진압하면서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계엄군이 주둔하던 조선대학교의 병원은 상대적으로 조용했으나 광주 시내 크고 작은 병원은 부상자 및 사망자로 북적였다. 특히 5월 20일 광주역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이루어진 이후 많은 집단발포가 있었는데, 이에 전남대학교 병원 응급실에 총상을 당한 응급 환자들이 물밀 듯 후송되었다. [7]
전남대학교 병원은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5월 21일 몇몇 시민들이 병원 옥상에 LMG 기관총을 설치하고, 도청의 계엄군을 공격하고자 했는데, 병원장을 비롯해 관계자들의 만류로 작업을 중단했다. 27일 도청에서 외곽으로 철수하던 계엄군이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도로변을 향해 혹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을 향해 사격하여 병원은 총탄세례를 받고 말았다.[8] 현재 전남대 5.18기념관에는 총탄 흔적이 남아있는 캐비닛와 가운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현장의 모습을 보여준다.[9]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학생들의 저항·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전남대학교 정문은 5.18사적지 1호, 쇄도하는 사망자와 부상자 치료에 전념한 전남대학교병원은 5.18사적지 9호, 계엄군의 주둔지로 사용된 아픔이 있는 조선대학교는 5.18사적지 제12호로 지정되었다.
5.18기념재단은 2010년 오월길(5.18민주화운동 사적지와 광주의 역사, 문화자원 등을 주제별로 살펴보는 테마 탐방길)을 지정하였는데, 이 중 5·18민주화운동의 열망이 담긴 사적지를 찾아가는 길인 오월인권길에는 항쟁의 불씨가 도심으로 번져가던 길인 횃불코스[10]에 전남대학교 정문이 포함되어 있으며, 민주화의 염원이 숭고한 희생정신과 만나는 길인 희생코스[11]에 전남대학교병원과 조선대학교가 포함되어 있다.
참고문헌
- ↑
- 전남대병원 「응급 환자 기록지(#227050)」, 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23권, 2000., 725쪽
- 『정사(正史) 5.18』,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특별취재반 엮음, 1995, 135~136쪽.
- 광주광역시의사회 『5.18 의료 활동』 1권, 1996., 199쪽
- 『정사(正史) 5.18』,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특별취재반 엮음, 1995, 136쪽.
- ↑ 5·18기념재단, 『오월 광주 여행』, MOVE, 2022.
- ↑ 5월14일에서 16일까지 진행된 평화로운 민족민주화성회에서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려지면 1차로 학교 정문앞, 2차로 도청 앞에서 모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 ↑ <5.18 관련 사건 조사결과> 58페이지, 1995.7.18 서울지방검찰청, 국방부검찰부
- ↑ 『정사(正史) 5.18』,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특별취재반 엮음, 1995, 149~151쪽. /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번호 6001, 현사연 엮음, 1990, 1023쪽.
- ↑ 하상호(조선대병원 진료부장. 당시 조선대병원 정형외과 레지던트 4년차), 대검에 찔린 환자, 5.18 의료 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189쪽
- ↑
- 『오월길』 5·18기념문화관, 인용일 2023-05-03, http://518road.518.org/sub.php?PID=0101&action=Read&idx=23
- 『오월길』 5·18기념문화관, 인용일 2023-05-03, http://518road.518.org/sub.php?PID=0101&action=Read&idx=20
- ↑ 『오월길』 5·18기념문화관, 인용일 2023-05-03, http://518road.518.org/sub.php?PID=0101&action=Read&idx=23
- ↑ 5·18기념재단, 『오월 광주 여행』, MOVE, 2022.
- ↑ 전남대학교 정문(사적 1호), 광주역 광장(사적 2호),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옛 터(사적 3호), 5·18 최초발포지(사적 21호), 광주 MBC 옛 터(사적 7호), 녹두서점 옛 터(사적 8호), 광주 YWCA 옛 터(사적 6호), 금남로(5·18기록관)(사적 4호), 광주YMCA(사적 5-4호), 구 상무관(사적 5-3호), 5·18민주광장(사적 5-2호), 도청과 5·18민주광장(사적 5-1호)
- ↑ 도청과 5·18민주광장(사적 5-1호), 남동성당(사적 25호), 전남대학교병원(사적 9호), 조선대학교(사적 12호), 배고픈다리 일대(사적 13호), 주남마을 인근 양민 학살지(사적 14호), 광목간 양민 학살지(사적 15호), 광주기독병원(사적 10호), 구 광주적십자병원(사적 11호), 광주공원(사적 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