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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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尹奉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윤봉길
한자표기 尹奉吉
생몰년 1908년-1932년
본관 파평 (파주)
시대 근대
대표경력 한인애국단원
훙커우공원 의거
상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능묘 효창공원
생가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사적 제229호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성격 독립운동가



정의

윤봉길(尹奉吉,1908~1932)은 훙커우공원 의거를 한 독립운동가이다.

업적 요약

윤봉길은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에 힘썼으며, 1932년 상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 축하연에서 폭탄을 던져 중국 주둔 일본군대의 수뇌부에 중대한 타격을 입힌 독립운동가이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 윤봉길, 윤봉길 의사 유서 중

생애

상세내용

농촌계몽 운동에 뛰어들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고,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고, 1926년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치며 본격적으로 농촌 계몽운동을 벌였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시했으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또한 지방 농민들을 규합해 자활적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하고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 바탕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독립 운동을 위해 망명하다

1930년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신념이 가득찬 편지를 남기고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 등의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고, 12월 중국 청도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고, 세탁소의 직원으로 1년여간 일하면서 월진회 회원들이 마련한 여비를 갚고자 했다.

1931년 8월, 보다 큰일을 수행하고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거사를 계획하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동경에서 일왕을 폭살(사쿠라다문 의거)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상황에 빠졌다. 더욱이 일제는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고,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김구와 윤봉길은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게 된다. 이에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의 협의하여 4월 29일에 진행되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의거

윤 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어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 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 쓸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기에 나도 기념으로 윤 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 군에게 주었다.
— 김구, 백범일지에 기록된 의거 당일 아침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의 식장에서 윤봉길은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었고, 앞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에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이 중상을 입었다.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훙커우 의거는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5세의 나이로 순국하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사형 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묻는 질문에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므로 하등의 남길 말이 없다."라고 하였다.

생가지와 추모

윤봉길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난 집(광현당)과 성장한 집(저한당)은 그를 기리는 충의사 등과 함께 사적 제229호(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로 지정되어 있다. 광복 후 1946년, 형무소의 쓰레기 소각장 부근에 버려진 유해를 발굴하여 조국에 봉환하여 효창원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사진 설명
윤봉길의사.png 훙커우공원 의거 전 선서하는 윤봉길 (국사편찬위원회)
윤봉길 한인애국단 입단.png 윤봉길의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보물 제568-1호 /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봉길의거직후.jpg <North China Daily>에 실린 의거 직후 일 군경에게 연행되어 가는 윤봉길 (국가보훈처)
4.29의거기록화.png 4.29 의거 기록화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봉길 중국.png 4.29 의거를 보도한 중국과 일본 신문 (공훈 전자 사료관, 국가보훈처.)
윤봉길유품2.jpg 윤봉길 의사 유품. 의거날 아침 김구와 바꾸어 찬 낡은 시계. (보물 제568-2호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백범김구회중시계.jpg 백범 김구 회중시계. 윤봉길이 훙커우 의거날 아침 김구 선생과 바꾼 시계. (국가등록문화재 제441호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윤봉길유품.jpg 윤봉길 의사 유품 (보물 제568-3호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윤봉길 광현당.jpg 윤봉길이 태어난 집인 광현당 (사적 제229호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윤봉길충의사.jpg 윤봉길을 기리는 충의사 (사적 제229호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윤봉길 안장.png 1946년 효창공원 안장식 (공훈 전자 사료관, 국가보훈처.)
효창 삼의사묘 윤.jpg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의 윤봉길 묘

영상

  • 훙커우공원 의거 당시 현장 (역사저널 그날, KBS)

지식 관계망


노드

ID Class Label 비고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박영석, "윤봉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윤봉길" 『독립운동가』online,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