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리석
차리석(車利錫) | |
대표명칭 | 차리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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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車利錫 |
생몰년 | 1881년-1945년 |
본관 | 전주 |
이칭 | 서입환(徐立煥) |
호 | 동암(東岩) |
시대 | 근대 |
대표직함 | 국무위 비서장 |
대표경력 | 독립신문사 기자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장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1962) |
능묘 | 효창공원 |
성격 | 독립운동가 |
목차
정의
차리석(車利錫,1881년~1945)은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업적 요약
1919년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1922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의 주요 실무간부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이 결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32년부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국무위원 또는 국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임시정부가 명맥을 유지하여 정통성을 유지하고 발전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자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의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 1948년 사회장 당시 이시영·김구 선생의 추모사 중
생애
상세내용
민족교육에 힘쓰다
1907년 항일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고,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를 경영하여 민족교육과 인재 육성에 힘썼다. 당시 신민회는 국권회복을 위해 교육기관 설립, 독립군 기지 개척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차리석은 교육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1910년 안명근이 계획한 데라우치 암살 미수사건로 인해 신민회 민족지도자 105인이 기소 당했고, 차리석은 1911년 1월에 잡혀 3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독립신문 기자로 활약
1919년 3·1운동 때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품을 품고 4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자로 만주 독립군의 활동상, 임시정부의 힘찬 출발과 의욕적인 활동, 해외에서의 적극적인 지원 등을 취재 보도하여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계하고 항일과 독립의 열망을 북돋았다.
임시정부에 힘을 싣다
1921년 임시정부는 열강의 냉대와 일제에 의한 조직의 파괴, 중국·소련, 미국의 방관 및 비협조로 외교노선 실패 등을 겪으면서 지도체제의 동요가 일어났고 존폐의 기로에 섰다. 이에 차리석은 독립신문의 편집국장으로서 주요 인사들과의 교유 및 언론활동 등을 통해 독립운동계의 대동단결 필요성을 역설하며 임시정부에 힘을 싣고자 하였다.
임시정부로 가다
임시정부 침체기였던 1922년 2월, 차리석은 독립신문사를 떠나 직접 임시정부에 참여해서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에 선출되었고,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등 임시정부의 재건에 주력하였다. 또한 안창호가 주도하는 흥사단(興士團)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에 가입하여 1924년 3월 남경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한국독립당 참여
1930년 1월 민족진영의 독립지사들을 결속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정당으로서 임시정부를 유지·발전시키고자 창당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주요 실무간부로 활동하였다. 당의 홍보용 선전책자인 「한보(韓報)」·「한성(韓聲)」 등을 발행, 배포하는 등 당의 기본 강령 실천과 그 이념을 전파하고자 힘썼다.
임시의정원 활동
1932년 11월 28일 의정원 회의에서 선생은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33년 3월 임임시정부의 내무장 겸 비서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아 하였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유지하다
1935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열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등 5개의 당이 통합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되었는데,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마저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임시정부의 존폐가 다시금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에 차리석은 김구·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을 찾아 다니며 임시정부의 유지하고 재건하기로 뜻을 모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35년 11월 13일 임시정부의 존폐 위기를 극복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이때 주석에는 이동녕(李東寧), 내무장 조완구(趙琬九), 외무장 김구(金九), 재무장 송병조(宋秉祚), 군무장 조성환(曺成煥), 법무장 이시영(李始榮), 그리고 차리석은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임시정부를 지키다
1932년 임시정부는 일제의 반격으로 상해를 떠나게 되었고,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1937)으로 중국 각 처(1932년 항주· 1935년 전장·1937년 장사·1938년 광동·1938년 유주·1939년 치장 등)를 거쳐 1940년 중경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40년 임시정부는 직할부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1945년까지 각종 군사작전을 전개하였고, 이 덕분에 임시정부는 한국독립운동의 최고 통수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차리석은 이러한 갖은 고초와 난관을 극복하며 임시정부를 지켜왔던 장본인이었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광복 전해인 1944년 9월 9일 중경 임시정부청사에서 눈을 감았다.
생가지와 추모
차리석은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1947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가 운구되어 효창원(현재의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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