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광산김씨 김해 스토리
목차
개요
세상이 평화로우면 도학에 전념하는 것이 군자이다. 그러나 나라에 변란이 있으면 칼을 집고 일어서서 구국의 길을 걷는 것이 군자이다.
이것은 광산김씨 예안파 김해(金垓,1555~1641)를 두고 할 수 있는 말이다.
김해는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원권지정자와 예문관검열을 지낸 문신 관료였다. 고향에서 지내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는 안동지방과 영남 북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진중일기인 『향병일기』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서행일기』를 저술하였다.
이것들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나라의 환란에 칼을 뽑아드는 진정한 군자, 김해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내용
『향병일기』와 『행군수지』
『향병일기』는 서문과 발문 없이 1592년 4월 14일 왜적에 의한 동래성 침공 소식으로부터 그 다음해인 1593년 6월 19일 계림전투 중 전사 전까지의 의병 활동 경과를 날짜 별로 기록하고 있다. 즉, 김해가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1593년왜군에게 포위되어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장렬히 순국하기 바로 직전까지의 전투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영남 북부 지역의 의병장으로서 여러 고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예천, 용궁, 함창 등지 등지에서 벌인 왜군과의 전투 과정과 각종 내역 뿐 아니라 임진왜란 초기 영남 북부 지방의 의병 활동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행군수지』는 부대 지휘관의 정신자세를 논하고 군령을 세우는 방법과 병사를 선발하는 요령, 군마를 얻는 법, 보급문제, 부대훈령 등에 걸쳐서 차례로 기술 했다. 또한 진을 치는 법, 성을 지키는 요령, 간첩 색출, 항복을 받는 요령 등을 차례로 밝혀서 부대 지휘관이 반드시 읽고 익혀야 할 책이었다.
『향병일기』와 『행군수지』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처한 군자의 의식과 대응 자세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 의병사를 고찰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기록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군자의 구국정신을 일깨운 김성일의 격문
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초유사에 제수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함양에 이르러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예안에 거주하던 김해가 의병을 일으킨 것도 이와 같은 경위에서였다. 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답하길, “섬 오랑캐가 창궐(猖獗)하여 임금이 피난가자 신민(臣民)들이 매우 애통하여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여기 궁벽한 고장에는 필묵(筆墨)만 일삼고 궁마(弓馬)는 익히지 못하여 빈주먹만 불끈 쥐고 있으니, 자신을 구제하기에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충의(忠義)의 근성으로 복수의 뜻이 간절하여 천지에 맹세하고 왜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펼치려고 합니다.” 라고 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를 다짐하였다. 이에 먼저 조목(趙穆)이 의병 조직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조목이 김해에게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6월 1일에는 안동에서 배용길(裵龍吉)을 비롯한 여러 사족들이 퇴계에 모여 각 지역에서 책임지고 군대를 모집하기로 하였다. 보름 뒤에는 여러 고을의 대표들이 모여 김해를 안동 열읍(列邑) 향병(鄕兵) 대장(大將)으로 추대하였다. 대장 김해 아래로 좌부장, 우부장, 정제장(整齊將), 조전장(助戰將)과 군량도총(軍糧都總) 등의 지휘관과 군량미 수집을 담당하는 여러 직책을 두어 조직화하였다. 군량도총 아래에도 전향유사(典餉有司)가 있어 군량 조달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의병으로 직접 나서지 않은 여러 사족들도 군량을 대는 둥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김해가 이끄는 안동의병의 첫 승리
안동 열읍의 의병들은 1592년 9월 2일에 운산역(雲山驛 : 안동시 일직면 운산리 소재)에 모여 행군을 시작하였다. 행군시에는 의병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민간인의 재산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군율을 세웠다. 당시 왜군은 경상도 상주의 당교(唐橋)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해 목책을 축조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당교를 거점으로 하여 인근 지방을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안동 의병은 당교에 주둔한 왜군을 상대하기 위하여 10월 22일에 풍산(豐山)에 집결, 다음날에는 예천군을 거쳐 10월 25일에는 용궁에 이르렀다.
10월 27일에는 복병장수 이선충(李選忠)과 조전장수 박호인(朴好仁)이 당교 근처의 반암으로 군사를 이끌고 갔으며, 11월 24일에는 복병장수 김사권(金嗣權) 역시 당교가 있는 함창으로 가서 동태를 살피며 주둔하였다. 이들과 함께 김해가 이끄는 총 본진이 왜군을 협공하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는데, 이는 왜군과 전력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왜군이 경유할 지점에 매복을 심어 놓고 한밤중에 왜군 진영을 급습하였다. 이 때 진천뢰(震天雷)와 같은 화약무기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관군의 지원을 받아 얻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안동 의병은 출진 후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향병일기』에 저술된 무기
선조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인마살상용 폭탄의 일종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내부에 화약과 빙철(憑鐵) 등을 장전하여 완구(碗口)에 의하여 목표물에 발사하는 무기로 임진왜란 때 사용되었다.
『향병일기』에는 “왜적을 토벌하는 방책으로 비격진천뢰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측도 조선의 비밀병기를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였다. 일본측 기록인 <정한위략>은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고 했다. 왜군이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감은 대단했다. 일본의 병기전문가인 아리마 세이호(有馬成甫)는 『조선역 수군사』에서 “비격진천뢰의 발화장치는 매우 교묘한 것으로 그것은 화공술로서의 획기적인 일대 진보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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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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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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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왜적과 맞서 싸울 향병을 조직하다"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향병일기"
『디지털안동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임진왜란을 맞아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들"
『스토리테마파크』online , 한국국학진흥원. - 최은주,"한결같이 군자의 길을 걷다."
한국국학진흥원 공식 블로그online , 한국국학진흥원. - "향병일기"
국가문화유산포털online , 문화재청. - 이기환,"비격진천뢰 관련 기사"
『'조선의 귀신폭탄' 비격진천뢰의 철판두께가 밝혀낸 살상력의 진실』online , 경향신문.
- "왜적과 맞서 싸울 향병을 조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