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김구 묘역
백범김구_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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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백범김구_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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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효창공원의 서쪽에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꿈꾸었던 나라의 큰 선생인 백범 김구의 묘역이 있다.
김구선생은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히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안악사건[1]으로 옥중생활을 하던 중, 호를 백범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백정의 백(白)과 범부의 범(凡)을 딴 것이며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모두 적어도 본인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을 고취하여 완전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여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하였으며, 항일무장투쟁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동녕 선생과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은 일제가 훼손한 효창원의 터에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싸우다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봉환하여 안장하고자 하였으며, 덕분에 오늘날 효창공원에 3인의 의사와 3인의 임정요인의 묘역이 자리하게 되었다.
1949년 6월 26일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의해 암살당한 김구 선생은 국민의 애도 속에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중략)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 -
사진
사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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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선생 묘 전경 | |
김구선생 묘의 안내판 | |
김구선생 묘의 석등 | |
김구선생 묘의 석물 | |
김구선생 묘의 묘비 | |
김구선생 묘의 묘비문 |
주석
- ↑ 1911년 안명근(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이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자금모집을 하던 것이 발각되어 관련 인사 160여명이 검거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