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안중근(安重根) | |
대표명칭 | 안중근 |
---|---|
한자표기 | 安重根 |
생몰년 | 1879년-1910년 |
본관 | 순흥 (경상북도 영주) |
시대 | 근대 |
대표직함 | 임시정부 군무부장 |
대표경력 | 임시정부 군무부차장 북로군정서 군사부장 대원수부 군사부장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
능묘 | 효창공원 |
생가 | 황해도 해주 |
성격 | 독립운동가 |
목차
정의
안중근(安重根,1879~1910)은 이토포살의거를 한 독립운동가이다.
업적 요약
안중근은 1909년 만주의 하얼빈(哈爾賓)에서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하였다.
“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 — 안중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생애
상세내용
100년이 지나도 돌아올 수 없는 유해
안중근은 사형 집행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사형집행 보고서에는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매장 위치에 대해선 기록이 없고, 감옥 담장 바깥의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순국 당시 여순 감옥 형무소장인 일본인 구리하라 사다기치(栗原貞吉)는 사형 집행 뒤 “아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면서 집안에 안중근 의사의 사당을 만들어 놓고 평생 숭모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1]
한국의 답사팀이 수차례 답사와 측량을 통해 사진에 나타난 지형을 찾아 2008년 한·중 공동 발굴을 실시하였으나 아파트 부지 조성 공사로 당초 목표로 삼은 지역의 40%가량은 발굴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발굴이 불가능한 상태다. 그 이후 중국이 고려인 묘지가 있었다는 인근 야산을 발굴하고, 북한도 공동묘지를 발굴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은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생가지와 추모
안중근은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당해 순국, 유해를 찾지 못해 효창원에 있는 것은 가묘이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국방TV)
지식 관계망
노드
ID | Class | Label | 비고 |
---|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오세창, "안중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중근"
『독립운동가』online , 국가보훈처. - 오세창, "이토포살의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중근 의거"
『독립전쟁, 그 위대한 여정』online , 전쟁기념관. - 김인영, "효창공원에 쓸쓸히 세워진 안중근 의사 가묘"
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오세창, "안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