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광산김씨 김해 스토리
목차
개요
개요
입향조와 함께 제향된 김해는 누구인가
광산김씨 재사(사진상 왼쪽) 및 사당(사진상 오른쪽).(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신문[神門]과 사당(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
난중잡록에 쓰인 김해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은 후조당 종택에 부속된 재사(齋舍, 제사 지내는 집)와 광산 김씨 중 오천리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김효로(金孝盧,1445∼1534)와 증손자 김해(金垓,1555∼1593)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광산김씨 사당은 안동 예안 오천리 입향조인 김효로를 제향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김해가 임진왜란 시 영남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여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안동 광산김씨는 수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음에도 입향조가 모셔진 신성한 사당에 함께 불천위로 모셔진 인물인 김해와 그의 대표적인 저술서 『향병일기』는 무엇일까.
이것들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나라의 환란에 칼을 뽑아드는 진정한 군자, 김해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김해는 누구인가
세상이 평화로우면 도학에 전념하는 것이 군자이다. 그러나 나라에 변란이 있으면 칼을 집고 일어서서 구국의 길을 걷는 것이 군자이다.
이것은 가히 김해를 두고 할 수 있는 말이다.
김해는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원권지정자와 예문관검열을 지낸 문신 관료였다.
고향에서 지내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는 안동지방과 영남 북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진중일기인 『향병일기』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난중잡록(亂中雜錄)[1]에는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고,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썼다고 되어있다.[2]
내용
군자의 구국정신을 일깨운 김성일의 격문
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1592년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으며, 이를 통해 군사적 환경이 열세임에도 나라를 걱정하며 적에 대해 분개하여 의병대장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국운이 막혀 오랑캐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종묘사직이 병화(兵火)에 휩싸이고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니, 백성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지가 오래입니다. 누추하고 협소한 지방이라서 예전에도 이 지역 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유학만을 숭상했을 뿐 무예를 익히지 않았습니다. (중략)
의병을 불러 모으니 모두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활을 잡아 본 사람은 열에 한둘도 되지 않아 떨쳐 일어나 진격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만, 요해처에 복병을 설치할 수는 있으니, 격분한 마음을 떨쳐 임금을 위해 죽고자 하는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군대는 근본이 갖춰지지 않았고, 통솔하는 자의 재주가 부족하여 병세(兵勢)가 열악합니다. 게다가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병기는 탕진되어 모두가 나무를 잘라 만든 병기를 쥐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거사를 한다면 뜻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충의로운 마음이 천성으로부터 나오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도리도 예전에 대략이나마 익혔습니다. 불끈 마음을 먹고 저 더러운 오랑캐를 소탕하고자 하며, 하늘에 맹세컨대 이 도적들과는 세상을 함께하지 않을 것입니다."
- 김해,<근시재집>
김성일은 왜 격문을 썼을까
1589년 각 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 김성일은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은“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3]
1592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성일은 격문을 작성하였다.
『향병일기』와 『행군수지』
향병일기와 행군수지(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
향병일기(국립중앙박물관, 문화체육관광부)
대산집 제49권[4]에 기술된 김해의 저서.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향병일기(鄕兵日記)』는 서문과 발문 없이 1592년 4월 14일 왜적에 의한 동래성 침공 소식으로부터 그 다음해인 1593년 6월 19일 계림전투까지의 의병 활동 경과를 날짜 별로 기록하고 있다. 즉, 김해가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1593년 왜군에게 포위되어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장렬히 순국하기 바로 직전까지의 전투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향병일기』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83호에 지정되어 있다.
영남 북부 지역의 의병장으로서 여러 고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예천, 용궁, 함창 등지 등지에서 벌인 왜군과의 전투 과정과 각종 내역 뿐 아니라 임진왜란 초기 영남 북부 지방의 의병 활동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행군수지(行軍須知)』는 부대 지휘관으로의 장군의 도리를 논하고 금령을 세우는 방법과 병사와 병마를 선발하는 요령, 군량 보급, 무예 강습 등에 대하여 기술했다. 믿음과 사랑으로 인심을 단단히 결속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또한 진을 치는 법, 성을 지키는 요령, 간첩 색출, 항복을 받는 요령 등을 차례로 밝혀서 부대 지휘관이 반드시 읽고 익혀야 할 책이었다.
『향병일기』와 『행군수지』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처한 군자의 의식과 대응 자세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 의병사를 고찰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기록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상정의 문집인 대산집(大山集)에 따르면 김해는 이외에도 『서행일기(西行日記)』등을 저술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서 전해지지 않는다.
『향병일기』에 저술된 무기
비격진천뢰(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향병일기에 쓰인 비격진천뢰(전자사료관, 국사편찬위원회.)
향병일기에 쓰인 비격진천뢰(전자사료관,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에 쓰인 비격진천뢰(승정원일기, 규장각.)
선조수정실록에 쓰인 비격진천뢰(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향병일기』에는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는 비격진천뢰만한 것이 없으며,[5] 1593년 2월 24일에는 반암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격진천뢰를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되어있다.
이 ‘비격진천뢰(飛格震天雷)’는 ‘날아올라 적을 치니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하여 이름이 붙은 인마살상용 시한폭탄의 일종로 선조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것이다.
비격진천뢰는 내부에 화약과 빙철(憑鐵) 등을 장전하여 완구(碗口)라는 화포에 의하여 목표물에 발사하는 무기로, 발사 후 표적지에 날아간 뒤 시간이 지나서 터지는 일종의 작렬 시한폭탄으로 분류된다. 섬광, 굉음과 함께 수많은 철파편을 사방에 흩날리는게 특징이다.
그 시대 다른 포탄들은 발사되어 성벽이나 시설물을 우선 파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비격진천뢰는 날아간 뒤 적병들 사이에서 폭발하는 인마살상용 무기라는 점이 다르다.
임진왜란의 비밀병기
비격진천뢰는 강력한 살상력을 갖고있어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탈환전, 진주성·남원성 싸움 등 실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는 기록들이 전해진다. 갑자기 날아와서 큰 소리를 내며 터지는 이 무기에 왜군이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감은 대단하였으며, 승정원일기에는 왜적들이 신기(神器)라고 하면서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6]
특히 박진이 경주성을 탈환한 승전의 전투에서 사용한 비격진천뢰에 대해서 한국와 일본 모두의 기록이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이 비격진천뢰를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중략)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울산)로 도망하였다"
- <선조수정실록>[7]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 기이하고 놀라서 서생포로 돌아왔다."
- <정한위략>(일본의 기록)
일본의 병기전문가인 아리마 세이호(有馬成甫)는 『조선역 수군사』에서 “비격진천뢰의 발화장치는 매우 교묘한 것으로 그것은 화공술로서의 획기적인 일대 진보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향병일기』, 가학(家學)이 되다
향병일기(鄕兵日記). 김해(金垓,1555~1593)가 1592년부터 1593년까지 약 2년간 기록한 일기. (한국국학진흥원)
매원일기(梅園日記). 김광계(金光繼,1580~1646)가 1603년부터 1645년까지 약 28년간 기록 한 일기. (한국국학진흥원)
묵재일기(默齋日記). 김염(1612~1659)이 1636년부터 1640년까지 약 5년간 기록한 일기(한국국학진흥원)
과헌일기(果軒日記). 김순의(金純義,1645~1714)가 1662년부터 1714년까지 약 42년간 기록한 일기. (한국국학진흥원)
계암일록(溪巖日錄). 김령(金坽,1577~1641)이 1603년부터 1641년까지 약 39년간 기록한 일기. (한국국학진흥원)
여온일기(汝溫日記). 김선(1615~1670)이 1639년부터 1644년까지 약 3년간 기록한 일기. (한국국학진흥원)
김해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면서 『향병일기』를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한 그의 아들 김광계(金光繼,1580~1646)가 28년간 매원일기 18책을, 손자 김염(1612~1659)이 5년간 묵재일기 3책을, 증손자 김순의(金純義,1645~1714)가 42년간 과헌일기 6책을 대대로 기록했다. 또한 김해의 종형제인 김령(金坽,1577~1641)이 39년간 계암일록 8책을, 김염의 동생인 김선(1615~1670)이 3년간 여온일기 2책을 썼다.
즉 4대에 걸쳐 약 120년간 총 39권의 일기를 기록했는데, 이 일기들에는 손님을 접객하거나 취미활동과 같은 일상생활, 관혼상제와 같은 가정의례 뿐 아니라 농사·노비·토지경영 등의 경제활동, 수령 및 아전 등의 관리 접촉이나 부세와 환곡, 지방정책과 같은 지방통치 관계, 질병 치료와 식생활 등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생생한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이나 당쟁 등 대내외적 격동기 사회를 살아가는 재지사족의 일상과 고민이 담겨 있어 그 의미가 크다.
미디어 자료
- ‘4대 120년’ 일기…사대부 고민·반성 ‘절절’(KBS News,2016)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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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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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향병일기"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향병일기"
『디지털안동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임진왜란을 맞아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들"
『스토리테마파크』online , 한국국학진흥원. - 최은주,"한결같이 군자의 길을 걷다."
한국국학진흥원 공식 블로그online , 한국국학진흥원. - "향병일기"
국가문화유산포털online , 문화재청. - 이기환,"비격진천뢰 관련 기사"
『'조선의 귀신폭탄' 비격진천뢰의 철판두께가 밝혀낸 살상력의 진실』online , 경향신문.
- "향병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