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2022 스토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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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천 이후, 준천(濬川) 과정에서 둑을 튼튼하게 하고자 개천 양쪽 언덕에 심은 버드나무(『증보문헌비고』 권21 「여지고」 산천, 1908)와 수양버들로 오간수문은 한양의 상춘장소로 사랑받았다. (유본학, 『문암집』,「오간수문유제」,1812~181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 준천 이후, 준천(濬川) 과정에서 둑을 튼튼하게 하고자 개천 양쪽 언덕에 심은 버드나무(『증보문헌비고』 권21 「여지고」 산천, 1908)와 수양버들로 오간수문은 한양의 상춘장소로 사랑받았다. (유본학, 『문암집』,「오간수문유제」,1812~181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
− | * 준천으로 개천 주변의 일부 백성이 거주지를 잃게 되었는데, 영조는 도성의 빈집을 | + | * 준천으로 개천 주변의 일부 백성이 거주지를 잃게 되었는데, 영조는 도성의 빈집을 준천소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제공 (영조실록 1760년 4월 1일)하거나 뱀 장사를 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는 등 민생을 돌보았다. |
* 준천때 퍼낸 흙은 동대문 일대 개천의 양 둑에 쌓아두고 이를 가산으로 불렀으며(『광여도』,「도성도」,18세기,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사산금표도』,1765), 훈련원과 동대문 밖의 땅을 메우는 데 사용하였다. | * 준천때 퍼낸 흙은 동대문 일대 개천의 양 둑에 쌓아두고 이를 가산으로 불렀으며(『광여도』,「도성도」,18세기,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사산금표도』,1765), 훈련원과 동대문 밖의 땅을 메우는 데 사용하였다. |
2022년 4월 7일 (목) 10:24 기준 최신판
목차
왕이 사랑한 무예, 활쏘기
- 참고: https://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051
- https://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192
- https://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276
- 오의상 고풍: https://www.yna.co.kr/view/AKR20210503032300005?input=1195m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630026001
- 우리나라의 활쏘기도 고구려 벽화와 중국 문헌에도 등장하는 등 역사가 길고, 활을 다루고 쏘는 방법과 활을 쏠 때의 태도와 마음가짐 등 여러 면에서 우리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현재까지도 그 맥을 잇고 있는 민족의 문화 자산
- 활쏘기와 관련된 무형 자산 이외에도 활·화살, 활터 등 유형 자산이 풍부하게 남아 있고 활과 화살의 제작기법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무예의 역사 중에서도 관련된 연구자료가 풍부하다”면서 “이 때문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았다
- 문화재청은 여타 무형문화재와 달리 '활쏘기'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신체 활동이자 문화라는 점에서, 이 활쏘기를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 없이 종목만 지정하기로 했다.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중 아리랑(제129호), 제다(제130호), 씨름(제131호), 해녀(제132호), 김치담그기(제133호), 제염(제134호), 온돌문호(제135호), 장담그기(제137호), 전통어로방식·어살(제138-1호) 등 총 9건이 활쏘기처럼 특정 보유자·보유단체 인정없이 종목만 지정
- 국가무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된 ‘궁시장'도 있음.
- 창덕궁의 관덕정: 유일한 왕의 사정(射亭)인 관덕정(觀德亭)이다. 이곳에 처음 정자가 들어선 것은 인조20년(1642년)이었다. 병자호란(1636년)의 수모를 경험한 임금이 절치부심한 탓인지 북벌론(北伐論)이 비등했던 당시 공혜왕후 한씨가 잠례(蠶禮)를 거행하던 장소에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의 활터를 세우고 활쏘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현종이 1664년 정자를 수리하고 이름도 관덕정(觀德亭)으로 바꾸었다.
- 관덕정의 과녁은 춘당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이 사이가 수목으로 시야가 가로 막혀 있다. 그러나 동궐도를 보면 시원하게 탁 트여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에서는 관덕정을 가르켜 “창경궁에 있는 일종의 사정(射亭)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 조선 후기의 문신 윤기(尹愭)가 1824년(순조24년) 84세 때 쓴 ‘형조참판 황공 행장(刑曹參判黃公行狀)’에 나타난다. 이 글에서 윤기는 숙종이 매일 같이 활쏘기를 했다고 적었다.
- “병진년(1676년·숙종2년)에 부호군 겸 내금위장(副護軍兼內禁衛將)에 제수되었다. 태복시 내승(太僕寺內乘)으로 있을 때 참판공이 연로한 나이로 고향에 있으니 공이 본도(本道: 충청도)의 벼슬자리를 하나 얻어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였다. 전관(銓官: 병조판서)이 공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 후보자 명단에 올렸으나 임금의 낙점은 받지 못하였다. 당시 상(임금)은 매일같이 금원(禁苑: 후원)의 관덕정(觀德亭)에 납시었는데, 공이 내승으로서 활 쏘는 법이 전아하고 활 솜씨가 화살이 같은 자리에 적중할 정도로 뛰어나자 상이 특히 사랑하여 멀리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명자집(無名子集)』 제14책>
- 정조도 관덕정에 자주 발걸음을 하며 활쏘기를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글이 남아 있다. 정조의 어제(御製)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권 춘저록(春邸錄)과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서 느낀 아름다운 경치 열 곳을 정해 ‘상림십경(上林十景)’이라 하고 직접 지은 시가 수록돼 있다. 이 가운데에는 관덕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가을 단풍을 구경하는 ‘관덕풍림(觀德楓林)’이 포함돼 있다.
畫鵠鳴時箭中心 화살이 과녁에 맞혀 적중소리 울릴 때 雲霞步障擁仙林 구름 노을이 병풍처럼 선경 숲 에워쌌네 三淸物色元如許 삼청 경물 빛 이와 같이 뛰어나서 樂與諸君醉不禁 여러 군(君)과 함께 즐겨 취하길 마다하지 않네
- ‘대사례도(大射禮圖) 중 어사례도(御射禮圖)’, 1743년(영조19년) 윤 4월7일 거행된 ‘대사례(大射禮)’ 중 임금이 활 쏘는 모습을 담고 있는 ‘어사도(御射圖)’다. 비단에 채색, 60.0×282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 국왕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의인 진하의(進賀儀), 국왕이 활을 쏘는 예인 어사례(御射禮), 문무백관이 활을 쏘는 예인 시사례(侍射禮) 등이 있음.
- 조선시대 궁궐의 사정(射亭)은 관덕정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경복궁에 오운정(五雲亭)이라는 사정을 만들어 누구나 활쏘기를 할 수 있도록 민간에까지 개방했으며 효종은 창경궁 내사복(內司僕)에 사정을 특설해 내승(內乘)과 별군직(別軍職) 등의 관리가 습사하도록 했다. 고종도 1868년 경복궁 내에 경무대(景武臺)를 설치해 문무(文武) 과시(科試)와 열무를 행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희궁(慶熙宮) 회상전 동쪽 내원(內苑)의 별실로 융무당이 있었다”며 “남쪽의 대를 관사대(觀射臺)라 하고 북쪽의 정자를 봉황정(鳳凰亭)이라 하는데 모두 활쏘기를 익히고 무예를 연습하는 곳”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조선 왕들에게 이들 사정(射亭)은 별반 의미가 없었다. 궁궐 어디라도 과녁만 설치하면 그곳이 무겁이었고 왕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사대였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의 여러 왕들도 궐내 곳곳에서 활쏘기를 했고 대표적인 연회 장소였던 경복궁 경회루에서까지 활쏘기를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등장한다.
『세종실록』 52권(세종13년 6월1일)에는 세종이 “경회루 아래에 나아가 활쏘기를 구경했다(御慶會樓下 觀宗親射侯)”고 기록돼 있다. 세종은 경회루를 가장 많이 찾고 활용한 임금이었다. 사신맞이는 물론 종친과 신하들을 위한 연회도 자주 베풀었고 가뭄 때는 기우제도 경회루에서 올렸다. 또한 무과시험을 주재해 활쏘기 시범을 관람한 곳도 경회루였다.
중중 역시 “경회루에서 활쏘기를 관람한 후 1등을 한 내금위 허광필을 승진시켜 주었다(御慶會樓觀射 內禁衛許光弼居首 命加一級)”고 『중종실록』은 전한다. 세조는 경회루 연못 너머에 과녁을 설치하고 자주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연못에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에도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는 27개의 민간 활터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민간 활터의 유래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 후에 선조대왕이 상무정신을 진흥하고자 하여 화재가 있었던 경복궁 동쪽 담장 안에 오운정(五雲亭)을 설치하고, 이것을 개방하여 백성들이 활쏘기를 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 민간 활터의 시초라고 한다.
- 그러나 활쏘기를 연습하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무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다. 무과의 과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활쏘기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1894년 정부 주도로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변혁을 불러온 갑오경장을 계기로 활쏘기는 구습타파의 대상이 돼 급격한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더구나 과거제도 폐지와 군제 개편으로 활이 군대의 무기체계에서 제외되면서 활쏘기를 통해 신분상승을 도모했던 이들이 활터를 떠나게 되고 활터마저 그 기능을 잃게 되면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특히 갑오경장 이후 활쏘기가 단순히 백성들의 외면에서가 아니라 정부의 공권력이 동원된 강제적 금지라는 기록은 갑오경장 2년 후인 1896년(고종33년) 5월28일자 『독립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달 15일 동소문 안 율목정에서 활을 쏘기로 경무 동서 심총순이 순검을 데리고 간즉 다 도망하고 새다리 최동환과 성균관 홍종혁을 잡아다 회유하여 보내고, 버리고 간 활 셋과 전통 세 개를 주워다가 그 임자 김석철 김재흥 김복림을 찾아 회유하고 내어 주었다더라.”
- 동대문 운동장은 조선시대에 군사를 훈련하던 훈련원 터다. 따라서 당연히 사정이 있었다. 또 충융청과 같은 군영에도 자체 사정이 있었다. 창경궁 후원의 춘당대도 사정이다. 하지만 사정은 민간에 더 많았다. 서울은 인왕산 기슭의 서촌(우대), 지금의 동대문 운동장 일대를 하촌(아래대)라 하는데, 전자에는 풍소정·등룡정·등과정·운룡정·대송정의 오정이 가장 유명하였고, 아래대에는 석호정·좌룡정·화룡정·이화정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곳곳에 사정이 있었다. 황학정은 등과정이 있던 터에 세운 것이다.
- 겨우 남아 있는 것이 인왕산 기슭의 황학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산보 삼아 찾아가 볼 것을 권한다. 황학정은 고종의 명으로 경희궁 안에 지어진 것인데,1922년 일제가 경희궁을 헐 때 지금 장소로 옮긴 것이다.
- 오의상 고풍: 1796년 2월 5일 정조가 활을 쏴 15발 중 9발을 적중시키자 이를 축하한 무신인 오의상(?∼1820)에게 보약 5첩을 선물로 준 내용을 수록한 문서
- 임금의 활쏘기 기록은 현판 또는 비석으로 제작하기도 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중 1842년 7월 15일 조선 헌종이 창경궁 춘당대 옆 단풍정에서 활을 쏜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 대표적이다.
- 정조는 창경궁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자주 했다. 41세가 되던 해인 정조 16년(1792) 10월 30일 춘당대에서 10순(50발)을 쏘아 49발을 맞혔다는 기록이 있다. 이날 그는 붉은 칠을 한 과녁의 중심부인 '홍심'에 23발, 그 외의 부분인 '변'에 26발을 맞혔다.
같은 달 12일에 10순을 연속으로 쏴 과녁에 41발을 맞춘 것을 시작으로 17일 32발, 18일 41발, 20일 41발, 22일 46발, 26일 47발, 28일 41발, 29일 45발을 맞혔고 30일에 드디어 49발을 명중시킨 것이다. 불과 18일 만에 자신을 최고 궁사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다.
같은 해 11월 21일부터는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는 기록이 10번 넘게 나온다. 그렇지만 50발을 전부 모두 명중시켰다는 기록은 없다. 정조가 자만심에 빠져 마지막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일까.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조가 당긴 마지막 오십 번째 화살은 과녁을 벗어나 소나무에 꽂혔다. 신하들이 아쉬워 위로의 말을 전하자 정조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무엇이든 가득 차면 못 쓰는 것이다."
최고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절제하고 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 1발은 일부러 여백의 미로 남겨둔 것이다.
정조는 과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활쏘기는 각각 자기의 과녁을 향해 쏘는 것"이라는 구절을 실천한 것이다.
- 김홍도의 ‘활쏘기’는 활쏘기를 연습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강희언의 ‘활쏘기’는 활 쏘는 장면에 집중하고 있을 뿐 김홍도의 그림과 대동소이하다.
백성을 생각한 개천, 청계천
준천을 통해 백성을 생각하다
청계천은 조선시대 개천으로 불렸다.(한양도 - 위백규(1727~1798)가 1770년 저술한 『환영지』에 수록) 15세기 세종 대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개천은 비가 오면 쉽게 범람하여 도선 안의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조선 후기 영조는 개천에 대한 대대적인 준천(개천의 바닥을 파내어 물길이 원활히 흐르게 하는 것)을 통해 홍수 피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 한양은 상업도시로 변모하여 많은 상인과 평민이 생계를 목적으로 상경하였고, 이들은 주로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며 개천 주변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 증가(호구총수에 기술)과 개천 주변 거류민 증가, 하류지역 경각지 개간, 도성 사산에서의 벌목(지봉유설에 기술), 시체 유기(박지원, 『연암집』 「방경각외전」 광문자전, 1754년) 등은 개천에 각종 퇴적물이 쌓이는 원인이 되었고, 개천 주변은 불안정한 거주공간이 되었다. (숙종실록 1710년 9월 5일)
이에 영조는 세종(1397~1450)이후 거의 시행되지 않았던 개천 준설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영조는 재임 기간 중 200여 차례의 순문을 진행했는데, 그 중 준천과 관련해서는 9차례를 진행하였다. 즉, 백성과 직접 소통하면서 준천에 대한 민심을 파악한 것이다.
영조는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에 있다"(승정원일기 1760 2월 23일), "개천의 준설은 첫째도 백성을 위함이요, 둘째도 백성을 위함이니..."라고 하였는데(『준천사실』)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준천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이에 부응하듯 많은 여러 관원과 많은 백성들이 준천에 자원하여 참여하였다.
또한 영조는 준천이 시작되자 개천에 나가 곡식과 무명을 나눠주는 등 백성을 위로하였고, 백성에 대한 자신의 뜻을 표현한 『어제균역준천여사업』(1773,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을 지었다.
- 준천은 경진준천(1760년), 계사준천(1773년) 두번 진행되었는데, 두번째 공사는 개천의 양쪽 기슭에 석축을 쌓는 것으로 경진준천에서 목책으로 임시 가설한 것을 보완한 것이다.
백성이 사랑하는 수문을 만들다
- 한양도(18세기)에는 18세기 한양 모습을 묘사한 지도로 송기교(松杞橋)부터 영도교(永渡橋)까지 개천 본류의 준천 공사 구간에 있던 10개의 다리 명칭이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중 오간수문을 살펴보자.
- 오간수문은 동대문 남쪽에 있던 개천의 배수구로 수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 기능도 하였다.
- 준천 이후, 준천(濬川) 과정에서 둑을 튼튼하게 하고자 개천 양쪽 언덕에 심은 버드나무(『증보문헌비고』 권21 「여지고」 산천, 1908)와 수양버들로 오간수문은 한양의 상춘장소로 사랑받았다. (유본학, 『문암집』,「오간수문유제」,1812~181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준천으로 개천 주변의 일부 백성이 거주지를 잃게 되었는데, 영조는 도성의 빈집을 준천소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제공 (영조실록 1760년 4월 1일)하거나 뱀 장사를 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는 등 민생을 돌보았다.
- 준천때 퍼낸 흙은 동대문 일대 개천의 양 둑에 쌓아두고 이를 가산으로 불렀으며(『광여도』,「도성도」,18세기,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사산금표도』,1765), 훈련원과 동대문 밖의 땅을 메우는 데 사용하였다.
- 오간수문(五間水門) 홍예(虹蜺) 기초석의 물가름석 위에 놓여있던 돌거북이 형상의 석조물이 놓여져 있는데, 이는 물흐름을 잘 관장하여 개천(開川)의 범람을 막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수문상친림관역도에도 그려짐)
- 오간수문에는 외부인의 도성 출입을 막기 위해 오간수문(五間水門) 홍예 사이사이에 설치한 철책도 있었고, 이는 오간수문지(五間水門址)에서 발굴되었다.
- 1907년(융희 1), 하천수와 토사가 쉽게 흘러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 문을 뜯었고, 1908년(융희 2)에는 교통을 원활하게 하고자 남아있던 오간수문과 성벽을 헐어내며 오간수교라는 다리를 설치하였다. 이후 오간수교는 청계천 복개공사 때 사라졌다.
해체 이전의 오간수문의 사진은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 1904년)에 실려있다.
준천 참여자의 마음을 헤아리다
- 준천소좌목: 경진준천에 동원된 준천소 관원의 구성과 명단, 참여한 백성들의 구성을 자세히 기록한 『준천소좌목』(1760,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이 있다.
- 임시로 설립된 준천소는 정식기구가 되면서 준천사가 되었고, 현재 준천사 터가 남아있다.
- 춘첩첩은 영조가 경진준첩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종류는 '어제준천계첩', '어제갱진계첩' 두가지이나 각 종류마다 여러 첩이 존재하며, '영화당친림사선도'는 모든 준천첩에 실려있으나 이를 제외하고는 실린 그림에 차이가 있다.
- 『준천첩』 내 어제준천계첩: 영조가 시를 지어 준천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내려준 것으로 어제어필, 격려하는 내용을 그린 그림, 좌목,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는 준천첩에 포함된 그림)
- 『준천첩』 내 어제갱진계첩: 영조가 지은 시에 대해 신하들이 화답한 시들을 모아 제작한 것이다.
-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영조(英祖)가 오간수문(五間水門)에 행차하여 준천의 현장을 관람한 것을 그린 것으로 준천 당시 오간수문의 모습과 공사 현장의 생생함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 영화당친림사선도 (暎花堂親臨賜膳圖): 공식적으로 준천이 완료된 후 영화당(暎花堂)에 나가 활쏘기 시합에 참석하고 준천(濬川) 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담은 그림이다.
- 모화관친림시재도 (慕華館親臨試才圖): 영조(英祖)가 모화관(慕華館)에서 각 군문(軍門)과 준천소 군병(軍兵)들의 훈련 모습을 시찰하고 준천(濬川) 사업에 참여한 군병을 격려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후 누락된 장교(將校)와 군졸(軍卒), 지원한 백성과 승려들까지 참여하여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
- 연융대사연도(鍊戎臺賜宴圖): 영조가 준천소 당상(堂上)부터 하급 예속(隸屬)에 이르기 까지 준천의 참여자를 모두 연융대(鍊戎臺)에 모이게 한 후 잔치를 베푼 것을 그린 것이다. 이 날은 준천(濬川)에 관한 모든 일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음을 기념(記念)하는 자리로 준천(濬川)에 참여한 군민(軍民)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없애 버렸다.
준천이 계속되다
- 영조는 준천을 자신의 대표 업적 중 하나로 꼽으며, 세손(정조)과 신하들에게 명심하라고 당부하였다. (어제준천명병소서, 1773)
- 『준천사실』: 영조는 경진준천을 진행하면서 홍계희(洪啓禧)에게 준설을 기록하도록 하였고, 책의 구성은 영조가 직접 지은 서문을 비롯하여 배경과 과정을 기록한 준천사실, 개천관리의 전담기구인 준천사의 구성 인원과 활동 지침을 기록한 준천사절목으로 되어있다. 정조는 『준천사실』의 편찬을 통해서 후대 왕들에게 백성들의 안전을 위한 개천 관리의 모범을 전하고자 하였다.
- 준천은 경진준천 후 경진지평, 계사경준, 기사대준 등 네 개의 글자를 광통교, 수표교, 오간수문, 영도교 등에 새겼다. 이는 향후 준천 시에 네 글자가 다 보이도록 기준점을 잡기 위한 것이며, 준천의 지속적인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후 준천은 2~3년 주기로 진행되었으며, 1886년(고종 23)부터는 한성부에서 주관했고 1897,8년(광무 1,2)에는 민간업체인 경성마차회사에 위탁하여 실시하였다. 실제로 조선 정부가 주도한 준천은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8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는 민본정치의 이념을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 조선초기~계사준천까지의 개천의 역사는 채제공의 시문집인 번암집에서 함축적으로 볼 수 있으며, 여기에는 영조의 준천 후 평안하고 아름다운 개천을 노래하는 「준천가」가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