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광산김씨 수운잡방 스토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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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21년 6월 1일 (화) 23:34 판

개요

할아버지 김유와 손자 김령이 쓴 수운잡방

일반인이 기록한 최초의 요리서[1]인『수운잡방』은 2권으로 된 한문 필사본으로 121개의 요리법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59가지가 술을 빚는 방법이다. 속표지에는 탁청공유묵(濯淸公遺墨), 계암선조유묵(溪巖先祖遺墨)이라고 적혀 있고, 상편은 행서, 하편은 초서로 되어 있으므로 글자체 및 필체에 따라 구분해 볼 때 김유(金綏,1491~1555)가 기록한 86항(상편)과 김령(金坽,1577~1641)가 기록한 35항(하편)으로 나눌 수 있다.

'수운(需雲)'이란 단어는 '역경(易經)'의 '구름 위 하늘나라에서는 먹고 마시며 잔치와 풍류로 군자를 대접한다(雲上于天需君子以飮食宴樂)'는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또한 '잡방(雜方)'이란 갖가지 방법을 뜻한다. 여기서는 『수운잡방』에 수록된 대표적인 요리와 손님들 대접했던 그 공간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즉, 구름 위 하늘나라와 그 곳에서 먹는 음식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용

구름 위 하늘나라, 탁청정

김유가 세운 건물은 탁청정공파 종택(국가민속문화재 제272호)와 종택의 정자인 탁청정(중요민속자료 제226호)이 있다.[2] 특히 탁청정은 그 규모가 웅장하고 모양이 화려하여 오랫동안 인근에서 이름을 떨쳤다. [3]

오천은 도산서당·역동서원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선비들의 왕래가 잦은 곳인데, 김유는 선비의 덕목인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에 충실하여 접빈객을 정중하게 대접하였으며 선비들과 학문을 이야기하고 시인 묵객들과 교유를 넓히는 풍류를 즐겼다. 탁청정은 친족 및 친구 등에게 좋은 음식과 술을 대접하는 데에 이용되었다.[4] 탁청정에 찾아오는 여러 친족과 친구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던 일이 많아지자 김유는 음식을 만드는 일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조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을 저술하였다.

탁청정은 매우 튼튼한 재료를 사용하였고, 정방형으로 느껴질 만큼 입체구성의 비례가 잘 잡혀 있는 것이 특징이며, 건축 당시에는 단청이 있었다. 영남지방에서 개인의 정자로는 그 구도가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탁청정의 현판은 당대의 명필인 한호(韓濩,1543~1605,호:석봉)의 글씨이며, 획과 점들이 듬직한 가운데 한 글자 한 글자가 생동감을 준다. 또한 내부에는 이현보(李賢輔,1467~1555), 이황(李滉,1501~1570) 등의 시구(詩句)가 현판(懸板)되어 있다.


하늘나라의 음식, 『수운잡방』에 수록된 요리

『수운잡방』은 재료 저장법에서 조리법, 가공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상세하기 기록되어 있어 조선 전기 안동 양반가의 식생활 모습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일부 향신료는 사용된 기록이 있으나 고추는 사용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1600년 초반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수운잡방』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의 각종 요리서[5]에 나오는 요리법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각종 요리서를 참고하여 저술한 부분도 있으나 「오천가법」, 「현재 엿도가에서 사용하고 있는 법」이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항간에 나돌고 있는 속방(俗方)을 수록하기도 하거나 양반가문에서 일상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토착화된 조리법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요리법의 변천이나 용어의 변화를 추정할 수 있으므로 식품조리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2017년 서울신라호텔 레스토랑 '더 파크뷰'에서는 수운잡방의 8가지 음식(새우 수란, 모점이법, 향과저, 서여탕, 전계아, 타락, 전약, 다식, 식혜)을 현대적인 조리기법으로 재해석하여 선보인 바 있다.


38년간 쓴 일기, 계암일록

지조(志操)의 꿋꿋함, 풍절(風節)의 고결함은 사림(士林)의 모범이 된다. 이는 김령이 죽자 숙종 때 도승지를 추증하면서 그에게 내린 교지(敎旨)에서 그를 평한 글로써, 평생 대의명분을 신조로 광해~인조 연간의 혼탁한 시절 속에서도 꼿꼿하게 지조를 끝까지 지키는 선비의 삶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다.

김령은 김부륜(金富倫,1531~1598)의 아들이자 김유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북인의 난정을 보고 낙향하여 고향에 은거하였으며 수십차례에 걸쳐 여러 직책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

인조실록은 계암에 대해 ‘성품이 차분하고 지조가 있어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여 종신토록 영(嶺)을 넘지 않아 세칭 영남제일인(嶺南第一人)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김령은 1603년부터 1641년까지 38년간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가 바로 『계암일록(溪巖日錄)』[7]이다. 일기의 대부분은 가정의례와 친족 및 접빈객과 교루하고 대접한 일상사이지만, 인조반정의 타당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 지방관의 가렴으로 인한 민생의 심각성, 향시의 폐단 등에 대한 기록 등 중앙과 지방의 전반적인 시사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계암일록』은 『설월당유고』177매의 고문서(교지, 유지, 분재기, 호구단자, 제문 등)과 함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0호(설월당종택소장전적및고문서)로 지정되어 있다.


미디어 자료

  • 자연의 재료로 색을 입히고 건강까지 생각한 요리, 수운잡방 (KBS 대구, 2020)

  • ‘500년 전통 종갓집 요리’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 (TV조선, 2015)


지식 관계망



중심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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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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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석

  1. 우리나라 최초의 식품고전종합농서는 궁중어의이자 영농 온실을 세계 최초록 설계한 과학자 전순의(全循義)가 기록한 『산가요록(山家要錄,1449)』이다.
  2. 침류정은 김유가 수리한 것으로 포함하지 않았다.
  3. 실제로 낙성연에 초대된 이황이 강 건너에서 정자의 모양을 보고는 ‘선비의 집이 너무 호사스럽다.’고 하여 오르기를 꺼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4. 김광계(金光繼)의 매원일기(梅園日記)에 보면 동네의 여러 친족들과 탁청정(濯淸亭)에서 모여 술을 마시기로 했다고 되어있다.
  5. 중국 조리서 『거가필용(居家必用)』에서 인용된 것도 있고, 당시에 널리 읽혔던 것으로 알려진 『식경(食經)』의 내용도 있다.
  6. 김령은 의리가 지켜지지 않는 세상과 담을 쌓고, 18년 동안 두문분출하였다. 보던 책들은 표지를 가려서 드나드는 사람들이 무슨 책인지 모르게 하고, 의롭지 않은 것은 겨자씨 하나라도 받지 않았다.
  7. 원서의 제목은『일록(日錄)』이다.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