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팀프로젝트 위키페이지 6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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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size="150%">'''★주제'''</font></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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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size="150%">'''안동 광산김씨 김해로 보는 
자신보다는 나라와 사회를 생각하는 군자의 삶'''</font></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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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및 필요성==
 
==목적 및 필요성==
* 기획 의도 등 어떠한 문제 의식을 갖고 접근하였는지 구체적으로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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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평화로우면 도학에 전념하는 것이 군자이다. 그러나 나라에 변란이 있으면 칼을 집고 일어서서 구국의 길을 걷는 것이 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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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어려울 때 스스로 일어나 앞장서 우리나라를 구한 것은 항상 민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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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여년의 역사에는 여러 국난의 상황이 있었다. 국난의 상황에 조선의 민중, 아니 조금 더 나아가 양반이라 칭해지는 소위 기득권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라는 궁금증에서 본 프로젝트는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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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우리 6조는 '''나라의 환란에 칼을 뽑아드는 진정한 군자'''를 바탕으로 이러한 모습을 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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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와 함께 불천위가 된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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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광산김씨재사및사당.jpg|광산김씨 재사(사진상 왼쪽) 및 사당(사진상 오른쪽).([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700270000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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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광산김씨재사및사당2.jpg|신문[神門]과 사당([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80600190001 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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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난중잡록김해.jpg|난중잡록에 쓰인 김해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2A_V006_067A_IMG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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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광산김씨_재사_및_사당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은 [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안동_후조당_종택 후조당 종택]에 부속된 재사(齋舍, 제사 지내는 집)와 광산 김씨 중 오천리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김효로(金孝盧,1445∼1534)와 증손자 김해(金垓,1555∼1593)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ref>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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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광산김씨 사당은 안동 예안 오천리 입향조<ref>어떤 마을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이나 조상[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78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입향조"]</ref>인 김효로를 제향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김해가 임진왜란 시 영남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여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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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안동 광산김씨는 수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광산김씨 사당에는 김효로와 김해만이 제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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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가 모셔진 신성한 사당에, 김해는 왜 어떠한 업적이 있길래 입향조와 함께 불천위로 모셔졌는가? 그 이유를 알아봄으로써 나라의 환란에 칼을 뽑아드는 진정한 군자, 김해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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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대상==
 
==연구 대상==
* 주요 노드에 대하여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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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 왜 주요 노드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도록 주요 노드인 대상에 대하여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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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는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원권지정자와 예문관검열을 지낸 문신 관료였다.
* 팀의 인원이 작성한 개별 콘텐츠 페이지와 반드시 연결할 것(내부링크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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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지내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는 안동지방과 영남 북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진중일기인 『향병일기』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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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亂中雜錄)<ref>임진왜란 시 남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이 쓴 야사집으로 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차례의 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ref>에는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고,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썼다고 되어있다.<ref>亂中雜錄[二] 壬辰下</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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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의 구국정신을 일깨운 김성일의 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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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성일격문.jpg|김성일 문집인 『학봉집』제3권 초유문[招諭文]의 격문([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040_040_0010_2004_001_X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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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해격문답편.jpg|김해 문집인 『근시재집』제3권에 실린 김성일 격문에 답하는 편지([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730A_0050_010_0360_2010_B009_X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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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1592년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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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으며, 이를 통해 군사적 환경이 열세임에도 나라를 걱정하며 적에 대해 분개하여 의병대장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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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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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이 막혀 오랑캐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종묘사직이 병화(兵火)에 휩싸이고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니, 백성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지가 오래입니다. 누추하고 협소한 지방이라서 예전에도 이 지역 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유학만을 숭상했을 뿐 무예를 익히지 않았습니다. (중략) <br/> 의병을 불러 모으니 모두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활을 잡아 본 사람은 열에 한둘도 되지 않아 떨쳐 일어나 진격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만, 요해처에 복병을 설치할 수는 있으니, 격분한 마음을 떨쳐 임금을 위해 죽고자 하는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군대는 근본이 갖춰지지 않았고, 통솔하는 자의 재주가 부족하여 병세(兵勢)가 열악합니다. 게다가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병기는 탕진되어 모두가 나무를 잘라 만든 병기를 쥐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거사를 한다면 뜻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br/> '''그러나 충의로운 마음이 천성으로부터 나오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도리도 예전에 대략이나마 익혔습니다. 불끈 마음을 먹고 저 더러운 오랑캐를 소탕하고자 하며, 하늘에 맹세컨대 이 도적들과는 세상을 함께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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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해,<근시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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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은 왜 격문을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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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각 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 김성일은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은“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ref>국조보감 제30권 선조 24년(159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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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성일은 격문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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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병일기』와 『행군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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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향병일기와행군수지.jpg|향병일기와 행군수지([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80600190001 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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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향병일기.jpg|향병일기([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418985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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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산집의김해저서.jpg|대산집 제49권<ref>대산집 제 49권 행장(行狀)의 예문관 검열 증 홍문관 수찬 근시재 김 선생 행장(贈弘文館修撰近始齋金先生行狀)</ref>에 기술된 김해의 저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531A_A227_453L_IMG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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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병일기|『향병일기(鄕兵日記)』]]는 서문과 발문 없이 1592년 4월 14일 왜적에 의한 동래성 침공 소식으로부터 그 다음해인 1593년 6월 19일 계림전투까지의 의병 활동 경과를 날짜 별로 기록하고 있다. 즉, 김해가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1593년 왜군에게 포위되어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장렬히 순국하기 바로 직전까지의 전투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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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는 영남 북부 지역의 의병장으로서 여러 고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예천, 용궁, 함창 등지 등지에서 벌인 왜군과의 전투 과정과 각종 내역 뿐 아니라 임진왜란 초기 영남 북부 지방의 의병 활동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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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수지|『행군수지(行軍須知)』]]는 부대 지휘관으로의 장군의 도리를 논하고 금령을 세우는 방법과 병사와 병마를 선발하는 요령, 군량 보급, 무예 강습 등에 대하여 기술했다. 믿음과 사랑으로 인심을 단단히 결속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또한 진을 치는 법, 성을 지키는 요령, 간첩 색출, 항복을 받는 요령 등을 차례로 밝혀서 부대 지휘관이 반드시 읽고 익혀야 할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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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병일기』와 『행군수지』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처한 군자의 의식과 대응 자세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 의병사를 고찰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기록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상정의 문집인 대산집(大山集)에 따르면 김해는 이외에도 『서행일기(西行日記)』등을 저술하였으나 이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서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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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병일기』에 저술된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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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비격진천뢰.jpg|비격진천뢰([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1108600000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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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향병일기무기.png|향병일기에 쓰인 비격진천뢰([http://archive.history.go.kr/image/viewer.do?system_id=000000694023 전자사료관,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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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향병일기무기2.png|향병일기에 쓰인 비격진천뢰([http://archive.history.go.kr/image/viewer.do?system_id=000000694023 전자사료관,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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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승정원비격.jpg|승정원일기에 쓰인 비격진천뢰([https://kyudb.snu.ac.kr/ImageServlet.do?path=/data01/stream/SJW/IMG/GK12792_00/GK12792_00_0038/GK12792_00_IH_0038_037b.jpg 승정원일기,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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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선조실록무기.png|선조수정실록에 쓰인 비격진천뢰([http://sillok.history.go.kr/popup/viewer.do?id=WNB_12509001_009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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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병일기』에는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는 [[비격진천뢰]]만한 것이 없으며,<ref>향병일기 1593년 2월 9일</ref> 1593년 2월 24일에는 반암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격진천뢰를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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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격진천뢰(飛格震天雷)’는 ‘날아올라 적을 치니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하여 이름이 붙은 인마살상용 시한폭탄의 일종로 선조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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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격진천뢰는 내부에 화약과 빙철(憑鐵) 등을 장전하여 완구(碗口)라는 화포에 의하여 목표물에 발사하는 무기로, 발사 후 표적지에 날아간 뒤 시간이 지나서 터지는 일종의 작렬 시한폭탄으로 분류된다. 섬광, 굉음과 함께 수많은 철파편을 사방에 흩날리는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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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 다른 포탄들은 발사되어 성벽이나 시설물을 우선 파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비격진천뢰는 날아간 뒤 적병들 사이에서 폭발하는 인마살상용 무기라는 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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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가학(家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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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향병일기3.png|향병일기(鄕兵日記). 김해(金垓,1555~1593)가 1592년부터 1593년까지 약 2년간 기록한 일기. ([https://blog.naver.com/kstudy0700/220742979710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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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매원일기.png|매원일기(梅園日記). 김광계(金光繼,1580~1646)가 1603년부터 1645년까지 약 28년간 기록 한 일기. ([https://blog.naver.com/kstudy0700/220742979710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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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묵재일기.png|묵재일기(默齋日記). 김염(1612~1659)이 1636년부터 1640년까지 약 5년간 기록한 일기([https://blog.naver.com/kstudy0700/220742979710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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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면서 『향병일기』를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 김광계(金光繼,1580~1646)는 매원일기를 썼다. 또한 김광계의 아들 김염(1612~1659)도 묵재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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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안동_광산김씨_일기|일기가 안동 광산김씨의 가학(家學)]]이 되었다고 일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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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일기들에는 손님을 접객하거나 취미활동과 같은 일상생활, 관혼상제와 같은 가정의례 뿐 아니라 농사·노비·토지경영 등의 경제활동, 수령 및 아전 등의 관리 접촉이나 부세와 환곡, 지방정책과 같은 지방통치 관계, 질병 치료와 식생활 등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생생한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이나 당쟁 등 대내외적 격동기 사회를 살아가는 재지사족의 일상과 고민이 담겨 있어 그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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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
 
==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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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지에 그린 지식관계망 등의 사진을 업로드(섬네일 형식으로 보이도록 할 것)
 
* 전지에 그린 지식관계망 등의 사진을 업로드(섬네일 형식으로 보이도록 할 것)
 
* 전지 외에도 팀이 그린 지식관계망(온, 오프라인)이 있다면 업로드해도 무방
 
* 전지 외에도 팀이 그린 지식관계망(온, 오프라인)이 있다면 업로드해도 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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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5-1_6조_지식관계망.png|thumb|가운데|6조의 지식관계망(miro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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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본인 조에서 올린 사진파일의 확장자에 맞게 위키문법을 수정하면 됩니다. 사진 설명은 전지에 그린 지식관계망이라면 ㅇ조의 지식관계망(전지사용) 으로 기재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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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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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5-1_6조]]
 
[[분류:2025-1_6조]]
 
[[분류:2025-1 실습]]
 
[[분류:2025-1 실습]]

2025년 4월 30일 (수) 14:55 판

2025-1 디지털인문학이란

안동 광산김씨 김해로 보는 
자신보다는 나라와 사회를 생각하는 군자의 삶
파트 작성자(다수 가능)
조장 인문정보학 이효림
목적 및 필요성 인문정보학 이효림
연구 대상 인문정보학 이효림
온톨로지 인문정보학 이효림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인문정보학 이효림, 한국고전학과 홍길동
연구결과 인문정보학 이효림




















목적 및 필요성

세상이 평화로우면 도학에 전념하는 것이 군자이다. 그러나 나라에 변란이 있으면 칼을 집고 일어서서 구국의 길을 걷는 것이 군자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스스로 일어나 앞장서 우리나라를 구한 것은 항상 민중이었다.

조선 500여년의 역사에는 여러 국난의 상황이 있었다. 국난의 상황에 조선의 민중, 아니 조금 더 나아가 양반이라 칭해지는 소위 기득권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라는 궁금증에서 본 프로젝트는 시작하였다.

이에 우리 6조는 나라의 환란에 칼을 뽑아드는 진정한 군자를 바탕으로 이러한 모습을 보고자 하였다.


입향조와 함께 불천위가 된 김해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후조당 종택에 부속된 재사(齋舍, 제사 지내는 집)와 광산 김씨 중 오천리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김효로(金孝盧,1445∼1534)와 증손자 김해(金垓,1555∼1593)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1]

본래 광산김씨 사당은 안동 예안 오천리 입향조[2]인 김효로를 제향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김해가 임진왜란 시 영남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여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사실 안동 광산김씨는 수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광산김씨 사당에는 김효로와 김해만이 제향되어 있다.

입향조가 모셔진 신성한 사당에, 김해는 왜 어떠한 업적이 있길래 입향조와 함께 불천위로 모셔졌는가? 그 이유를 알아봄으로써 나라의 환란에 칼을 뽑아드는 진정한 군자, 김해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연구 대상

김해

김해는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원권지정자와 예문관검열을 지낸 문신 관료였다.

고향에서 지내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는 안동지방과 영남 북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진중일기인 『향병일기』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난중잡록(亂中雜錄)[3]에는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고,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썼다고 되어있다.[4]


군자의 구국정신을 일깨운 김성일의 격문

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1592년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으며, 이를 통해 군사적 환경이 열세임에도 나라를 걱정하며 적에 대해 분개하여 의병대장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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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이 막혀 오랑캐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종묘사직이 병화(兵火)에 휩싸이고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니, 백성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지가 오래입니다. 누추하고 협소한 지방이라서 예전에도 이 지역 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유학만을 숭상했을 뿐 무예를 익히지 않았습니다. (중략)
의병을 불러 모으니 모두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활을 잡아 본 사람은 열에 한둘도 되지 않아 떨쳐 일어나 진격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만, 요해처에 복병을 설치할 수는 있으니, 격분한 마음을 떨쳐 임금을 위해 죽고자 하는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군대는 근본이 갖춰지지 않았고, 통솔하는 자의 재주가 부족하여 병세(兵勢)가 열악합니다. 게다가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병기는 탕진되어 모두가 나무를 잘라 만든 병기를 쥐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거사를 한다면 뜻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충의로운 마음이 천성으로부터 나오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도리도 예전에 대략이나마 익혔습니다. 불끈 마음을 먹고 저 더러운 오랑캐를 소탕하고자 하며, 하늘에 맹세컨대 이 도적들과는 세상을 함께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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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근시재집>


김성일은 왜 격문을 썼을까

1589년 각 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 김성일은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은“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5]

1592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성일은 격문을 작성하였다.


『향병일기』와 『행군수지』

『향병일기(鄕兵日記)』는 서문과 발문 없이 1592년 4월 14일 왜적에 의한 동래성 침공 소식으로부터 그 다음해인 1593년 6월 19일 계림전투까지의 의병 활동 경과를 날짜 별로 기록하고 있다. 즉, 김해가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1593년 왜군에게 포위되어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장렬히 순국하기 바로 직전까지의 전투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김해는 영남 북부 지역의 의병장으로서 여러 고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예천, 용궁, 함창 등지 등지에서 벌인 왜군과의 전투 과정과 각종 내역 뿐 아니라 임진왜란 초기 영남 북부 지방의 의병 활동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행군수지(行軍須知)』는 부대 지휘관으로의 장군의 도리를 논하고 금령을 세우는 방법과 병사와 병마를 선발하는 요령, 군량 보급, 무예 강습 등에 대하여 기술했다. 믿음과 사랑으로 인심을 단단히 결속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또한 진을 치는 법, 성을 지키는 요령, 간첩 색출, 항복을 받는 요령 등을 차례로 밝혀서 부대 지휘관이 반드시 읽고 익혀야 할 책이었다.

『향병일기』와 『행군수지』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처한 군자의 의식과 대응 자세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 의병사를 고찰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기록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상정의 문집인 대산집(大山集)에 따르면 김해는 이외에도 『서행일기(西行日記)』등을 저술하였으나 이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서 전해지지 않는다.

『향병일기』에 저술된 무기

『향병일기』에는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는 비격진천뢰만한 것이 없으며,[7] 1593년 2월 24일에는 반암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격진천뢰를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되어있다.

이 ‘비격진천뢰(飛格震天雷)’는 ‘날아올라 적을 치니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하여 이름이 붙은 인마살상용 시한폭탄의 일종로 선조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것이다.

비격진천뢰는 내부에 화약과 빙철(憑鐵) 등을 장전하여 완구(碗口)라는 화포에 의하여 목표물에 발사하는 무기로, 발사 후 표적지에 날아간 뒤 시간이 지나서 터지는 일종의 작렬 시한폭탄으로 분류된다. 섬광, 굉음과 함께 수많은 철파편을 사방에 흩날리는게 특징이다.

그 시대 다른 포탄들은 발사되어 성벽이나 시설물을 우선 파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비격진천뢰는 날아간 뒤 적병들 사이에서 폭발하는 인마살상용 무기라는 점이 다르다.


일기, 가학(家學)이 되다

김해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면서 『향병일기』를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 김광계(金光繼,1580~1646)는 매원일기를 썼다. 또한 김광계의 아들 김염(1612~1659)도 묵재일기를 썼다.

가히 일기가 안동 광산김씨의 가학(家學)이 되었다고 일컬을 수 있다.

또한 이 일기들에는 손님을 접객하거나 취미활동과 같은 일상생활, 관혼상제와 같은 가정의례 뿐 아니라 농사·노비·토지경영 등의 경제활동, 수령 및 아전 등의 관리 접촉이나 부세와 환곡, 지방정책과 같은 지방통치 관계, 질병 치료와 식생활 등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생생한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이나 당쟁 등 대내외적 격동기 사회를 살아가는 재지사족의 일상과 고민이 담겨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온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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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

  • 시맨틱 데이터 구축 및 디지털 큐레이션을 하면서 도출한 사항을 기술
    • 사실적인 관계와 사실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 추정 등
    • 처음 그렸던 지식 관계망과의 비교(크게 어떠한 점이 달라졌는지), 시맨틱 데이터 구축 시 중점적으로 고려한 사항 등

  • 내용 오류: 광산김씨_재사 안동_후조당_종택 부분_~를_갖고있다
  • 논리 오류 수정: 김해 의병 ~으로_활동하다 의병장 + 의병 김성일_격문 ~의_영향을_받다
  • 논리 구조 수정: 행군수지 지침서 ~의_유형이다 부대지휘관 (원: 행군수지 - 부대지휘관 지침서 - ~의 유형이다 => 추후 노드 활용성 고려)
  • 릴레이션 구체화: ~가_썼다 (원 계획: ~가_만들었다)
  • 노드 생성: 일기 ~ 공통점이 보이고, 콘텐츠화 가능
  • 릴레이션 일관화: 김광계(부) - 김염(아들) : 아들 ~가 있다 로 수정(원: ~의 아들이다. 였는데, 둘다 있음 => 아버지에서 아들로 화살표가 뻗어져나가는 것이 의미상 적합하겠다는 판단)




주석

  1.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2. 어떤 마을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이나 조상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입향조"
  3. 임진왜란 시 남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이 쓴 야사집으로 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차례의 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4. 亂中雜錄[二] 壬辰下
  5. 국조보감 제30권 선조 24년(1591)
  6. 대산집 제 49권 행장(行狀)의 예문관 검열 증 홍문관 수찬 근시재 김 선생 행장(贈弘文館修撰近始齋金先生行狀)
  7. 향병일기 1593년 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