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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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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신민회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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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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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으며, 이로 인해 이준(李儁)·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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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한 뒤 이종일(李鍾一)이 창간해 경영하는 『제국신문(帝國新聞)』의 논설위원으로 개화 논설 수십 편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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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회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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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전덕기·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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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면서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했다가 일본 헌병에 잡혀 2개월 간 고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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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전의숙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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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같이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하여 교포들의 민족 교육에 힘썼다.
  
 
===신민회 설립===
 
===신민회 설립===
1907년에 개화자강파들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신민회|신민회(新民會)]는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고, 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최광옥(崔光玉)·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강(李剛)·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ref>신용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974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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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 등 7인과 창건위원이 되어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신민회|신민회(新民會)] 를 설립한다.<ref>신용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974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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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이회영과 협력해,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발행을 지원하고,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에도 조력했으며,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설립·교사로 재직하여 민족교육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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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문관학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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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뒤 만주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망명하여,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해 교포들의 신분 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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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항일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21년 5월 10일 (월) 20:50 판


이동녕(李東寧)
대표명칭 이동녕
한자표기 李東寧
생몰년 1869년-1940년
본관 연안
석오(石吾), 암산(巖山)
시대 근대
대표직함 주석
대표경력 신흥무관학교 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한국국민당 이사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능묘 효창공원
생가 이동녕 선생 생가지(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72호)
성격 독립운동가, 정치인, 행정가



정의

이동녕(1869년~1940)은 한말의 독립운동가이고 정치가이며 행정가이다. 일제강점기 신흥무관학교 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한국국민당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업적 요약

1906년 북간도 용정촌에서 이상설, 여준 등과 서전의숙을 설립하였고,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양기탁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1년에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1918년에는「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으며,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으며, 1927년 주석이 되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여 당수가 되었다.

내용

독립협회 가입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으며, 이로 인해 이준(李儁)·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이종일(李鍾一)이 창간해 경영하는 『제국신문(帝國新聞)』의 논설위원으로 개화 논설 수십 편을 집필하였다.

청년회 조직

1904년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전덕기·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면서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했다가 일본 헌병에 잡혀 2개월 간 고문을 받았다.

서전의숙 설립

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같이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하여 교포들의 민족 교육에 힘썼다.

신민회 설립

1907년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 등 7인과 창건위원이 되어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1] 를 설립한다.[1]

안창호·이회영과 협력해,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발행을 지원하고,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에도 조력했으며,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설립·교사로 재직하여 민족교육을 전개하였다.

신흥문관학교 설립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뒤 만주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망명하여,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해 교포들의 신분 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곧이어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항일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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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신용하, "신민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신용하, "이동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