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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효창원의 공간수난사== ===일제에 의한 효창원 수난=== 조선시대 정조 10년(1786) 5월 22일, 다섯 살의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창덕궁 별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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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의 공간수난사==
 
==효창원의 공간수난사==
 
===일제에 의한 효창원 수난===
 
===일제에 의한 효창원 수난===
조선시대 정조 10년(1786) 5월 22일, 다섯 살의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창덕궁 별당에서 숨졌다. 이 어린 왕세자가 묻힌 곳이 효창묘이다. 문효세자가 세상을 뜬 직후 생모인 의빈성씨 마저 숨지자 넉 달 후 의빈묘가 효창원 왼쪽 언덕에 조성되었고, 그 이후에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와 그 소생인 영온옹주의 묘도 모두 이곳에 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그리고 고종 7년(1870)에 이르러 효창묘는 원으로 승격하여 ‘효창원’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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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조 10년(1786) 5월 22일, 다섯 살의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창덕궁 별당에서 숨졌다. 이 어린 왕세자가 묻힌 곳이 효창묘이다. 문효세자가 세상을 뜬 직후 생모인 의빈성씨 마저 숨지자 넉 달 후 의빈묘가 효창원 왼쪽 언덕에 조성되었고, 그 이후에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와 그 소생인 영온옹주의 묘도 모두 이곳에 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그리고 고종 7년(1870)에 이르러 효창묘는 원으로 승격하여 ‘효창원’이라고 부른다.
청일전쟁 때 이곳이 일본군의 주둔지로 전락하면서 이곳이 본격적으로 훼손된다. 1894년 6월 당시 서울지역에 들어온 일본군대의 사령부가 포진한 곳이 효창원 구역에 속한 만리창(효창동 199번지)일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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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산, 성환전투 후 8월 5일 용산 벌판에 마련된 개선문을 통과하여 만리창 숙영지에 일본군은 주둔하였다. 이에 따라 효창원 구역은 일본에 의해 일종의 성지로 부각되었으며 러일전쟁 직후 용산역 앞쪽과 도화동에 바라크를 세워 임시 숙사를 활용한데 이어 1906년 5월에 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되고 그 배후지역에 일본인 밀집거주지역이 형성되면서 효창원 구역을 자기네 휴양지로 삼으려는 시도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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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때 이곳이 일본군의 주둔지로 전락하면서 이곳이 본격적으로 훼손된다. 1894년 6월 당시 서울지역에 들어온 일본군대의 사령부가 포진한 곳이 효창원 구역에 속한 만리창(효창동 199번지)일대였다. 이후 아산, 성환전투 후 8월 5일 용산 벌판에 마련된 개선문을 통과하여 만리창 숙영지에 일본군은 주둔하였다. 이에 따라 효창원 구역은 일본에 의해 일종의 성지로 부각되었으며 러일전쟁 직후 용산역 앞쪽과 도화동에 바라크를 세워 임시 숙사를 활용한데 이어 1906년 5월에 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되고 그 배후지역에 일본인 밀집거주지역이 형성되면서 효창원 구역을 자기네 휴양지로 삼으려는 시도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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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에 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은 1921년 12월에 와서 사직단공원 및 훈련원공원의 개설문제와 더불어 본격 거론되었고 1925년 이후 청파동 쪽에서 효창원공원에 이르는 간선도로를 비롯한 부대시설공사가 진행되었다.
 
효창원에 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은 1921년 12월에 와서 사직단공원 및 훈련원공원의 개설문제와 더불어 본격 거론되었고 1925년 이후 청파동 쪽에서 효창원공원에 이르는 간선도로를 비롯한 부대시설공사가 진행되었다.
또한 효창원에는 ‘골프장’이 들어선 시절도 있었다. 조선호텔의 부속골프장 건설계획에 따라 1919년 5월에 착공하여 1921년 6월 1일 9홀 규모로 개장되었는데, 이것이 서울지역 최초의 골프장 건립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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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효창원에는 ‘골프장’이 들어선 시절도 있었다. 조선호텔의 부속골프장 건설계획에 따라 1919년 5월에 착공하여 1921년 6월 1일 9홀 규모로 개장되었는데, 이것이 서울지역 최초의 골프장 건립 사례였다.
이 시기에 효창원 일대가 곧잘 기념식수행사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을축대홍수 때는 한강변 이촌동에 사는 이재민을 수용하기 위해 다섯 채의 임시막사 건물을 효창원 숲속에 건설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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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제는 자신들만의 기념물을 건립하는 공간으로 애용하였다. ‘오시마혼성여단막영지적 기념비’와 ‘합리비행기발상지지 기념비’이다. 여기에 더하여 1940년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일본군 전사자의 유골과 유품을 봉안하기 위한 충령탑 건설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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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효창원 일대가 곧잘 기념식수행사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을축대홍수 때는 한강변 이촌동에 사는 이재민을 수용하기 위해 다섯 채의 임시막사 건물을 효창원 숲속에 건설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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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제는 자신들만의 기념물을 건립하는 공간으로 애용하였다. ‘오시마혼성여단막영지적 기념비’와 ‘합리비행기발상지지 기념비’이다. 여기에 더하여 1940년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일본군 전사자의 유골과 유품을 봉안하기 위한 충령탑 건설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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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1944년 10월 9일 효창원 묘역군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결국 1944년 10월 9일 효창원 묘역군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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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효창원의 변화===
 
===해방 후 효창원의 변화===
1946년 6월 15일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이날 아침 부산을 떠난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의 유해가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로 옮겨졌다. 이로부터 20여일이 지난 7월 6일 삼의사의 국민장이 거행되어 이들 유해는 옛 효창원 묘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운명이었을까, 이봉창 의사의 출생지가 ‘원효로 2가’였다. 해방직후 유휴공간을 묘역으로 재활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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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15일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이날 아침 부산을 떠난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의 유해가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로 옮겨졌다. 이로부터 20여일이 지난 7월 6일 삼의사의 국민장이 거행되어 이들 유해는 옛 효창원 묘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운명이었을까, 이봉창 의사의 출생지가 ‘원효로 2가’였다. 해방직후 유휴공간을 묘역으로 재활용하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나 이번에는 옛 의빈묘 터에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이 안정되면서 임정요인묘역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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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2년이 지나 이번에는 옛 의빈묘 터에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이 안정되면서 임정요인묘역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해방후 효창공원은 순국애국열사의 묘역군으로 탈바꿈하게 이르렀다. 그런데 이곳이 또 한번의 수난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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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와중에 9.28수복 직후 희생자들이 임시 매장되거나 암장된 무덤들이 늘어나는 통에 약 200여 기의 봉분이 효창공원 내에 어지러이 잔존하였고, 판자집들도 이곳저곳 무단 점거하였다. 여기에 공간 훼손을 가속화시킨 것은 ‘효창운동장’의 건설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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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방후 효창공원은 순국애국열사의 묘역군으로 탈바꿈하게 이르렀다. 그런데 이곳이 또 한번의 수난을 겪는다.
1956년 5월 무렵에 육군 209공병대대에 의해 운동장 건설공사가 착수되었다. 임정요인묘역의 이장 방침을 유족들에게 통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삼의사묘와 김구묘의 경우에도 운동장 스탠드가 턱밑에 놓이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ref>서울에서의 정부통령 선거의 참패가 역연하게 보이게 되자 어느 고위관리가 이승만 박사에게 “각하 이거 큰일입니다. 효창공원의 백범 묘지에 해마다 참배자가 늘어가고 있어 민심을 모으는데 지장이 많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조치가 있어야 될 줄 아뢰오”했다는 것. 그러자 이 박사도 비서에게 선열묘지 이장을 뜻하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1960년 6월 11일 경향신문)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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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와중에 9.28수복 직후 희생자들이 임시 매장되거나 암장된 무덤들이 늘어나는 통에 약 200여 기의 봉분이 효창공원 내에 어지러이 잔존하였고, 판자집들도 이곳저곳 무단 점거하였다. 여기에 공간 훼손을 가속화시킨 것은 ‘효창운동장’의 건설계획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효창공원의 수난은 지속되었다. 1969년 여름과 가을에 잇따라 ‘원효대사 동상<ref>‘원효로’라는 것은 해방 직후 일제강점기의 왜색 지명인 원정을 대체하기 위해 그저 역대 위인의 이름을 무작위로 뭍인 것이다.</ref>)’과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을 만들었다. 1972년에는 효창공원의 서쪽 언덕에 들어선 ‘새마을노인회관’과 그 아래 쪽 평지에 터를 잡은 ‘효창도서관’이 들어선다. 특히 ‘새마을노인회관’은 단층건물이었으나 한보주택 정태수 회장이 지상 3층으로 증축하여 기부함에 따라 ‘대한노인회 중앙회관’으로 전환되었다. 이곳에 1975년 10월 20일에 ‘고육영수여사경로송덕비’와 더불어 ‘박정희 대통령각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새마을노인회관 개관기념식수’라고 쓴 표석 하나가 건물의 측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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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5월 무렵에 육군 209공병대대에 의해 운동장 건설공사가 착수되었다. 임정요인묘역의 이장 방침을 유족들에게 통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삼의사묘와 김구묘의 경우에도 운동장 스탠드가 턱밑에 놓이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ref>서울에서의 정부통령 선거의 참패가 역연하게 보이게 되자 어느 고위관리가 이승만 박사에게 “각하 이거 큰일입니다. 효창공원의 백범 묘지에 해마다 참배자가 늘어가고 있어 민심을 모으는데 지장이 많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조치가 있어야 될 줄 아뢰오”했다는 것. 그러자 이 박사도 비서에게 선열묘지 이장을 뜻하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1960년 6월 11일 경향신문)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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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효창공원의 수난은 지속되었다. 1969년 여름과 가을에 잇따라 ‘원효대사 동상<ref>‘원효로’라는 것은 해방 직후 일제강점기의 왜색 지명인 원정을 대체하기 위해 그저 역대 위인의 이름을 무작위로 뭍인 것이다.</ref>)’과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을 만들었다. 1972년에는 효창공원의 서쪽 언덕에 들어선 ‘새마을노인회관’과 그 아래 쪽 평지에 터를 잡은 ‘효창도서관’이 들어선다. 특히 ‘새마을노인회관’은 단층건물이었으나 한보주택 정태수 회장이 지상 3층으로 증축하여 기부함에 따라 ‘대한노인회 중앙회관’으로 전환되었다. 이곳에 1975년 10월 20일에 ‘고육영수여사경로송덕비’와 더불어 ‘박정희 대통령각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새마을노인회관 개관기념식수’라고 쓴 표석 하나가 건물의 측면에 있다.

2022년 6월 2일 (목) 23:36 판

효창원의 공간수난사

일제에 의한 효창원 수난

조선시대 정조 10년(1786) 5월 22일, 다섯 살의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창덕궁 별당에서 숨졌다. 이 어린 왕세자가 묻힌 곳이 효창묘이다. 문효세자가 세상을 뜬 직후 생모인 의빈성씨 마저 숨지자 넉 달 후 의빈묘가 효창원 왼쪽 언덕에 조성되었고, 그 이후에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와 그 소생인 영온옹주의 묘도 모두 이곳에 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그리고 고종 7년(1870)에 이르러 효창묘는 원으로 승격하여 ‘효창원’이라고 부른다.

청일전쟁 때 이곳이 일본군의 주둔지로 전락하면서 이곳이 본격적으로 훼손된다. 1894년 6월 당시 서울지역에 들어온 일본군대의 사령부가 포진한 곳이 효창원 구역에 속한 만리창(효창동 199번지)일대였다. 이후 아산, 성환전투 후 8월 5일 용산 벌판에 마련된 개선문을 통과하여 만리창 숙영지에 일본군은 주둔하였다. 이에 따라 효창원 구역은 일본에 의해 일종의 성지로 부각되었으며 러일전쟁 직후 용산역 앞쪽과 도화동에 바라크를 세워 임시 숙사를 활용한데 이어 1906년 5월에 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되고 그 배후지역에 일본인 밀집거주지역이 형성되면서 효창원 구역을 자기네 휴양지로 삼으려는 시도가 실시되었다.

효창원에 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은 1921년 12월에 와서 사직단공원 및 훈련원공원의 개설문제와 더불어 본격 거론되었고 1925년 이후 청파동 쪽에서 효창원공원에 이르는 간선도로를 비롯한 부대시설공사가 진행되었다. 또한 효창원에는 ‘골프장’이 들어선 시절도 있었다. 조선호텔의 부속골프장 건설계획에 따라 1919년 5월에 착공하여 1921년 6월 1일 9홀 규모로 개장되었는데, 이것이 서울지역 최초의 골프장 건립 사례였다.

이 시기에 효창원 일대가 곧잘 기념식수행사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을축대홍수 때는 한강변 이촌동에 사는 이재민을 수용하기 위해 다섯 채의 임시막사 건물을 효창원 숲속에 건설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제는 자신들만의 기념물을 건립하는 공간으로 애용하였다. ‘오시마혼성여단막영지적 기념비’와 ‘합리비행기발상지지 기념비’이다. 여기에 더하여 1940년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일본군 전사자의 유골과 유품을 봉안하기 위한 충령탑 건설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결국 1944년 10월 9일 효창원 묘역군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해방 후 효창원의 변화

1946년 6월 15일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이날 아침 부산을 떠난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의 유해가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로 옮겨졌다. 이로부터 20여일이 지난 7월 6일 삼의사의 국민장이 거행되어 이들 유해는 옛 효창원 묘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운명이었을까, 이봉창 의사의 출생지가 ‘원효로 2가’였다. 해방직후 유휴공간을 묘역으로 재활용하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나 이번에는 옛 의빈묘 터에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이 안정되면서 임정요인묘역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해방후 효창공원은 순국애국열사의 묘역군으로 탈바꿈하게 이르렀다. 그런데 이곳이 또 한번의 수난을 겪는다. 한국전쟁 와중에 9.28수복 직후 희생자들이 임시 매장되거나 암장된 무덤들이 늘어나는 통에 약 200여 기의 봉분이 효창공원 내에 어지러이 잔존하였고, 판자집들도 이곳저곳 무단 점거하였다. 여기에 공간 훼손을 가속화시킨 것은 ‘효창운동장’의 건설계획이었다.

1956년 5월 무렵에 육군 209공병대대에 의해 운동장 건설공사가 착수되었다. 임정요인묘역의 이장 방침을 유족들에게 통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삼의사묘와 김구묘의 경우에도 운동장 스탠드가 턱밑에 놓이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1])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효창공원의 수난은 지속되었다. 1969년 여름과 가을에 잇따라 ‘원효대사 동상[2])’과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을 만들었다. 1972년에는 효창공원의 서쪽 언덕에 들어선 ‘새마을노인회관’과 그 아래 쪽 평지에 터를 잡은 ‘효창도서관’이 들어선다. 특히 ‘새마을노인회관’은 단층건물이었으나 한보주택 정태수 회장이 지상 3층으로 증축하여 기부함에 따라 ‘대한노인회 중앙회관’으로 전환되었다. 이곳에 1975년 10월 20일에 ‘고육영수여사경로송덕비’와 더불어 ‘박정희 대통령각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새마을노인회관 개관기념식수’라고 쓴 표석 하나가 건물의 측면에 있다.

  1. 서울에서의 정부통령 선거의 참패가 역연하게 보이게 되자 어느 고위관리가 이승만 박사에게 “각하 이거 큰일입니다. 효창공원의 백범 묘지에 해마다 참배자가 늘어가고 있어 민심을 모으는데 지장이 많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조치가 있어야 될 줄 아뢰오”했다는 것. 그러자 이 박사도 비서에게 선열묘지 이장을 뜻하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1960년 6월 11일 경향신문)
  2. ‘원효로’라는 것은 해방 직후 일제강점기의 왜색 지명인 원정을 대체하기 위해 그저 역대 위인의 이름을 무작위로 뭍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