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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0일 (일) 17:50 판


조성환(曺成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조성환
한자표기 曺成煥
생몰년 1875년-1948년
본관 창녕
시대 근대
대표직함 임시정부 군무부장
대표경력 임시정부 군무부차장
북로군정서 군사부장
대원수부 군사부장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능묘 효창공원
생가 여주 보통리 고택(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보통1길 98)
성격 독립운동가



정의

조성환(曺成煥,1875~1948)은 북로군정서 군사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업적 요약

조성환은 1920년 북로군정서 군사부장으로 청산리 전투를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의 숙원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독립운동가이다.

단결은 약자의 무기다라는 말은 자명의 진리인 것이다. 그 단결의 길은 일시적 권모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대한 정의와 광명뇌락(光明磊落)의 정신을 근거로 한 당적결합에 있는 것으로 믿는다.
— 조성환,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선언문 중

생애

상세내용

군부의 부패함을 숙청하고자 하다

25세가 되던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당시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한 무관들이 주요 요직에서 일제와 친일 정치인과 결탁하여 군부를 부패 시키고 있는 현실에 격분하였다. 이에 “썩은 군대는 곧 나라를 망치게 합니다. 속히 썩은 자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시켜야 합니다.”라고 외치고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 발각되어 사형(死刑)을 선고 받았으며,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칙령으로 특사되어 참위(參尉)로 임관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신민회를 조직하다

1906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조성환은 무관학교 출신으로서 이동휘․이갑․유동열․노백린 등과 15명의 최고간부(군인)중의 1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신민회 동지들과 구국방략을 협의하고 일단 북경으로 망명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간도, 노령 등지를 다니면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지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07년 1월 연해주로 망명해 헤이그특사 파견 때 이상설(李相卨)을 원조하였다.

일본 총리 암살 계획을 세우다 체포되다

1910년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북경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혁명의 원로인 진기미(陳其美)를 알게 되어 한중공동전선을 형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창하였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郎]가 중국동북지방[만주]을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해 암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체포되어 거제도에 1년간 유형(流刑)되었다. 석방된 뒤 또다시 항일독립운동의 진원지인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하였다.

러시아에서 독립을 꿈꾸다

1917년 지린성 당국과 교섭해 흑룡강성(黑龍江省) 오운현(烏雲縣)에 약 5,000호가 거주할 수 있는 농지를 마련하고 항일독립운동의 기지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고자 했으나 러시아혁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우리 동포들은 언론, 결사의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1917년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결성되어 대부분의 단체가 이에 통합되었다. 1919년 2월 한인(韓人)의 자치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하여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는 대한국민의회로 개칭되었다.

임시정부에 참여하다

1918년 길림성(吉林省)에서 민족 대표 39명이 「대한독립선언서」(이칭: 「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할 때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고, 상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노령(露領) 대표의원으로 당선되고 군무부위원이 되었다. 또한, 4월 23일 국내에서 13도대표로 구성된 국민대회에서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가 조직되자 평정관(評政官)으로 피선되었다.

무장 독립운동을 이끌다

1919년 8월 다시 만주로 가서 서일·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 등과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12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해 군사부장에 취임하였다. 군사훈련에 전력투구하여 청산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청산리 전쟁 이후 밀산(密山)에서 10개의 독립군 부대를 통일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해 부총재를 역임하고, 당시 러시아의 극동당국·동북군벌당국과 군사문제·재만한인문제를 교섭하였다.

군사교육에 힘쓰다

1925년 대종교의 민족의식과 북로군정서의 정신을 계승해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신민부가 무장군인 양성 사관학교인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이 학교의 고문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1924년 자치정부의 성격을 띤 정의부를 조직하고, 재만한인의 군사력 증강을 위하여 주요지역에 청년훈련소를 설치 운영하였으며 농촌마다 군사보급회를 설치하여 청년 장교들로 하여금 순회 파견단을 조직하여 청․장년 및 군사 경험자들을 대상으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1925년과 1926년 두 차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무장활동의 본거지인 동삼성을 떠날 수 없다며 취임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다

1926년 북경의 독립운동계에서는 분열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대동단결 시키기 위한 새로운 방략이 모색되었다.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조성환은 원세훈과 함께 대 독립당을 결성하고자 시도한 끝에 <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促成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회지인 촉성보(促成報)를 간행하여 단체의 단결과 단일투쟁을 호소하였다. 선생의 이런 노력이 기폭제가 되어 1927년 4월에는 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조직되고 이어서 광동, 남경, 무한 등지에도 파급되었다. 그러나 조직방법론의 차이와 사상의 대립으로 민족 유일당 운동은 실패하였다.

이후 만주사변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새로운 활기를 띠게 되자 조성환은 또 다시 좌우익 연합 전선을 추구하였으며, 그 결과 1932년 10월 12일 상해에서 한독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혁명당 등의 대표가 회합을 갖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였다.

한국 광복군 창설에 이바지하다

1936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으로 봉직하였다. 1937년에는 주석 이동녕을 도와 군사정책을 강화하였으며, 이동녕․이시영․김구․차리석․엄항섭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임시정부의 외곽 연합단체인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1938년 군사학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군사학을 편수하였다. 1939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고,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선전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중국정부와 협의하는 등 한국광복군 설립의 기초를 닦았다.

1940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겨왔을 당시 조성환은 민족진영의 정당인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을 통합하여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창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군무부장직을 수행하면서 임시정부의 최우선 과제인 광복군 창설에 주력하여 1940년 9월 17일 마침내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1941년 대원수부(大元帥府)의 막료로 군무부장에 임명되고, 이어 최고원수부의 판공처장(辦公處長)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과 같이 환국한 뒤 한국장교단장·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성균관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생가지와 추모

조성환은 경기도 여주[1]에서 태어났으며, 생가지는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보통리에 위치한 여주 보통리 고택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1948년 10월 7일 서거, 효창원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사진 설명
400px 조성환 선생 생가지인 여주 보통리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126호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png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 조성환 선생은 맨 앞줄 정중앙. (국사편찬위원회)
조성환 안창호.jpg 1912년 조성환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중국 신해혁명 당시 중국의 현황과 우리나라와의 관계, 북경 상해 등지의 독립운동 현황 등이 적혀져 있다. (독립기념관)
임정요인과가족.jpg 1936년 저장성(浙江省)에 피난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의 사진. 조성환 선생은 둘째줄 맨 우측. (국사편찬위원회)
임정묘역 조성환.jpg 효창공원 임정묘역의 조성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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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박영석, "조성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조성환" 『독립운동가』online, 국가보훈처.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보훈처 공적조사에는 서울로 되어있으나, 2019년 여주박물관은 「청사 조성환과 보통리 고택의 역사성」학술조사를 통해 여주에 위치한 생가지(보통리 고택)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입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