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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 =='''상세내용'''== | ||
+ | === 민족적 위기감을 느끼고 망명하다 === | ||
+ |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민족적 위기감을 느끼며 해외 망명을 결심하고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중근은 산동(山東)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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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다 === | ||
+ |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해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안중근은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남포(南浦)에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평양에 삼합의(三合義)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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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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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의회를 조직하다=== | ||
+ | 1907년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며 한국의 식민지화가 진행되자 안중근은 상경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꾼 것으로 파악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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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년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또한 안중근은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崔在亨)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4월 노령 연추(煙秋)에서 동의회(同義會)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어 동의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 경흥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그러나 제3차 회령전투에서는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고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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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단지로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다 === | ||
+ | 안중근은 1909년 러시아 노브키에프스크에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단지(斷指, 손가락을 끊음)를 하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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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년 9월 안중근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의 하얼빈을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덕순(禹德淳, 일명 禹連後)·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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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토를 포살하다=== | ||
+ |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탄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 이후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쐈다. 이에 이토는 3번의 총탄을 명중 당해 사망하였고, 비서관과 만주철도 이사, 하얼빈 총영사는 중경상을 입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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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안중근은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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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해서는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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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판과 옥중 생활=== | ||
+ | 안중근은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일본 관동도독부지방법원에서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고 사형을 언도 받았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은 안중근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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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중근은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의 자서전이며,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인데 사형으로 『동양평화론』은 완결되지 못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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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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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지나도 돌아올 수 없는 유해=== | ===100년이 지나도 돌아올 수 없는 유해=== | ||
− | 안중근은 사형 집행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 + | 안중근은 사형 집행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 (중략)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사형집행 보고서에는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매장 위치에 대해선 기록이 없고, 감옥 담장 바깥의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
순국 당시 여순 감옥 형무소장인 일본인 구리하라 사다기치(栗原貞吉)는 사형 집행 뒤 “아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면서 집안에 안중근 의사의 사당을 만들어 놓고 평생 숭모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ref>그의 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는 아버지의 증언과 남긴 사진을 제공했다고 한다.</ref> | 순국 당시 여순 감옥 형무소장인 일본인 구리하라 사다기치(栗原貞吉)는 사형 집행 뒤 “아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면서 집안에 안중근 의사의 사당을 만들어 놓고 평생 숭모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ref>그의 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는 아버지의 증언과 남긴 사진을 제공했다고 한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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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은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은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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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지와 추모'''== | =='''생가지와 추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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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파일:순국직전안중근.jpg|400px]] || 순국 5분 전 어머니가 지어 보낸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 (독립기념관 | + | | [[파일:순국직전안중근.jpg|400px]] || 순국 5분 전 어머니가 지어 보낸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 (독립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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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안중근국가.jpg|200px]] || 안중근의사 유묵 - 국가안위노심초사(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속을 태움). 여순감옥에서 자신을 취조한 검찰관에게 써서 준 것으로 안중근의 장인(손바닥 도장)이 찍혀있음. (보물 제569-22호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파일:안중근국가.jpg|200px]] || 안중근의사 유묵 - 국가안위노심초사(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속을 태움). 여순감옥에서 자신을 취조한 검찰관에게 써서 준 것으로 안중근의 장인(손바닥 도장)이 찍혀있음. (보물 제569-22호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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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안중근의사기념관.jpg|400px]] || 서울 중구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중근의사기념관) | | [[파일:안중근의사기념관.jpg|400px]] || 서울 중구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중근의사기념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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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효창_삼의사묘_안중근.jpg|400px]] || 삼의사 묘역의 안중근 묘 (가묘) | | [[파일:효창_삼의사묘_안중근.jpg|400px]] || 삼의사 묘역의 안중근 묘 (가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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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3일 (수) 02:07 기준 최신판
안중근(安重根) | |
대표명칭 | 안중근 |
---|---|
한자표기 | 安重根 |
생몰년 | 1879년-1910년 |
본관 | 순흥 (경상북도 영주) |
시대 | 근대 |
대표직함 | 임시정부 군무부장 |
대표경력 | 임시정부 군무부차장 북로군정서 군사부장 대원수부 군사부장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
능묘 | 효창공원 |
생가 | 황해도 해주 |
성격 | 독립운동가 |
목차
정의
안중근(安重根,1879~1910)은 이토포살의거를 한 독립운동가이다.
업적 요약
안중근은 1909년 만주의 하얼빈(哈爾賓)에서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하였다.
“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 — 안중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생애
상세내용
민족적 위기감을 느끼고 망명하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민족적 위기감을 느끼며 해외 망명을 결심하고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중근은 산동(山東)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다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해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안중근은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남포(南浦)에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평양에 삼합의(三合義)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다.
또한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동의회를 조직하다
1907년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며 한국의 식민지화가 진행되자 안중근은 상경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꾼 것으로 파악된다.
1907년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또한 안중근은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崔在亨)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4월 노령 연추(煙秋)에서 동의회(同義會)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어 동의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 경흥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그러나 제3차 회령전투에서는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고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게 된다.
단지로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다
안중근은 1909년 러시아 노브키에프스크에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단지(斷指, 손가락을 끊음)를 하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1909년 9월 안중근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의 하얼빈을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덕순(禹德淳, 일명 禹連後)·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이토를 포살하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탄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 이후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쐈다. 이에 이토는 3번의 총탄을 명중 당해 사망하였고, 비서관과 만주철도 이사, 하얼빈 총영사는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안중근은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해서는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재판과 옥중 생활
안중근은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일본 관동도독부지방법원에서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고 사형을 언도 받았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은 안중근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중근은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의 자서전이며,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인데 사형으로 『동양평화론』은 완결되지 못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100년이 지나도 돌아올 수 없는 유해
안중근은 사형 집행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 (중략)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사형집행 보고서에는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매장 위치에 대해선 기록이 없고, 감옥 담장 바깥의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순국 당시 여순 감옥 형무소장인 일본인 구리하라 사다기치(栗原貞吉)는 사형 집행 뒤 “아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면서 집안에 안중근 의사의 사당을 만들어 놓고 평생 숭모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1]
한국의 답사팀이 수차례 답사와 측량을 통해 사진에 나타난 지형을 찾아 2008년 한·중 공동 발굴을 실시하였으나 아파트 부지 조성 공사로 당초 목표로 삼은 지역의 40%가량은 발굴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발굴이 불가능한 상태다. 그 이후 중국이 고려인 묘지가 있었다는 인근 야산을 발굴하고, 북한도 공동묘지를 발굴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은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생가지와 추모
안중근은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당해 순국, 유해를 찾지 못해 효창원에 있는 것은 가묘이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일본에서 상영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영상 (역사한방, KBS역사저널 그날)
- 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국방TV)
- 일본과 맞 싸운 안중근의사와 그의 마지막 간수 (울산MBC프로그램_플러스)
지식 관계망
노드
ID | Class | Label | 비고 |
---|---|---|---|
서울_효창공원 | Place | 서울_효창공원 | |
김구 | Actor | 김구(金九,1876~1949) | |
삼의사_묘역 | Place | 삼의사_묘역 | |
안중근 | Actor | 안중근(安重根,1879~1910) | |
이토_히로부미 | Concept | 이토_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 |
이토_포살의거 | Event | 이토_포살의거(1909) | |
동의회 | Organization | 동의회 | |
단지동맹 | Organization | 단지동맹 | |
하얼빈_안중근_의사_기념관 | Place | 하얼빈_안중근_의사_기념관 | |
한국_안중근_의사_기념관 | Place | 한국_안중근_의사_기념관 | |
장흥_해동사 | Place | 장흥_해동사 | |
대한의군_참모중장 | Career | 대한의군_참모중장 | |
삼흥학교 | Place | 삼흥학교(三興學校) | |
특파독립대장 | Career | 특파독립대장 | |
B00-0569-2300 | Heritage | (보물_제569-23호)_안중근의사_유묵23 | |
B00-0569-2200 | Heritage | (보물_제569-22호)_안중근의사_유묵22 | |
안중근의사_유묵23 | Object | 안중근의사_유묵23 | |
안중근의사_유묵22 | Object | 안중근의사_유묵22 | |
L36-0291-0000 | Heritage | (전라남도_문화재자료_제291호)_장흥_해동사 | |
(WebResource)이토_포살의거 | WebResource | (WebResource)이토_포살의거 |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삼흥학교 | 안중근 | founder | |
안중근 | 대한의군_참모중장 | servesAs | |
안중근 | 특파독립대장 | servesAs | |
안중근 | 동의회 | member | |
안중근 | 단지동맹 | founder | |
이토_포살의거 | 단지동맹 | isRelatedTo | |
하얼빈_안중근_의사_기념관 | 안중근 | isRelatedTo | |
한국_안중근_의사_기념관 | 안중근 | isRelatedTo | |
안중근 | 이토_포살의거 | performed | |
이토_포살의거 | 이토_히로부미 | isRelatedTo | |
김구 | 이토_포살의거 | isRelatedTo | |
삼의사_묘역 | 안중근 | isTombOf | |
서울_효창공원 | 삼의사_묘역 | hasPart | |
안중근의사_유묵23 | B00-0569-2300 | isDesignatedAs | |
안중근의사_유묵22 | B00-0569-2200 | isDesignatedAs | |
장흥_해동사 | L36-0291-0000 | isDesignatedAs | |
안중근의사_유묵23 | 안중근 | isRelatedTo | |
안중근의사_유묵22 | 안중근 | isRelatedTo | |
장흥_해동사 | 안중근 | isRelatedTo | |
이토_포살의거 | (WebResource)이토_포살의거 | isViewOn |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오세창, "안중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중근"
『독립운동가』online , 국가보훈처. - 오세창, "이토포살의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중근 의거"
『독립전쟁, 그 위대한 여정』online , 전쟁기념관. - 김인영, "효창공원에 쓸쓸히 세워진 안중근 의사 가묘"
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오세창, "안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