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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27일 (화) 13:48 기준 최신판


시간을 넘어 진실을 찾아서 》 시위 확산 및 도심 충돌

스토리 내러티브

1980년 5월, 광주는 뜨거운 항쟁의 중심에 있었다. 5.18민주화운동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시위 진압으로 불타올랐다. 이는 시민들의 저항과 참여를 촉발시켰고, 바로 다음 날인 5월 19일에는 시민들의 참여가 더욱 확산되면서 광주공원금남로 등지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이날, 김영찬이라는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의 3학년 학생은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김안부라는 또 다른 시민도 그날 목숨을 잃었다. 그는 전남대학교병원 안치실에 안치되었고,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은 시민들의 저항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5월 20일, 광주 시민들은 차량 시위를 벌이며 금남로를 달렸다. 택시 200여 대가 전조등을 켜고 경력을 울리며 시위에 참여했고, 이는 곧바로 MBC 방화로 이어졌다. 방송이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항의의 의미였다. 이 사건은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과의 또 다른 충돌로 이어졌고, 최초의 집단 발포 사건이 발생했으며, 계엄군도 최초로 사망했다.

광주의 거리와 공원, 그리고 옛 전남도청까지, 모든 곳이 저항과 희생의 현장이었다. 계엄군 1,000여명은 조선대학교에도 주둔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무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광주 시민들은 굴하지 않고 민주화를 향한 길을 열어갔다. 이 모든 사건들은 민주화 운동의 큰 획을 그으며 대한민국 역사에 깊이 각인되었다.

참고자료

type resource title/index URL
하상호(조선대병원 진료부장. 당시 조선대병원 정형외과 레지던트 4년차), 대검에 찔린 환자, 5.18 의료 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5.18기념문화관 『오월길』 http://518road.518.org/sub.php?PID=0101&action=Read&idx=20
참고 전북일보 5.18때 생명의 恩人 찾아서 기뻐요(2006-05-12 승인, 장세용 기자) https://www.jjan.kr/186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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