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스토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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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천 참여자의 마음을 헤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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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천을 통해 백성을 생각하다 ==
 
== 준천을 통해 백성을 생각하다 ==
  
조선의 도읍인 한양은 한반도의 중심지에 자리를 잡았고, 조세의 운송에도 매우 유리했다. 여기에 동, 서, 남, 북 4대 산으로 둘러싸인 형국은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도 명당이었다. 그러나 한양은 홍수에 취약한 도시 구조였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지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모인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을 통해 한강으로 나가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청계천이 넘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도성 안의 백성들은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한 태종은 1405년 한양의 도성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하천인 개천(開川)의 준설을 명했다. 이것이 현재 청계천의 원형이다.(한양도 - 위백규(1727~1798)가 1770년 저술한 『환영지』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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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도읍인 한양은 한반도의 중심지에 자리를 잡았고, 조세의 운송에도 매우 유리했다. 여기에 동, 서, 남, 북 4대 산으로 둘러싸인 형국은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도 명당이었다. 그러나 한양은 홍수에 취약한 도시 구조였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지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모인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을 통해 한강으로 나가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청계천이 넘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도성 안의 백성들은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한 태종은 1405년 한양의 도성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하천인 개천(開川)의 준설을 명했다. 이때 준설한 개천(開川)이 현재 청계천의 원형이다. (한양도 - 위백규(1727~1798)가 1770년 저술한 『환영지』에 수록)
  
15세기 세종 대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개천은 비가 오면 쉽게 범람하여 도선 안의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조선 후기, 한양은 상업도시로 변모하여 많은 상인과 평민이 생계를 목적으로 상경하였고, 이들은 주로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며 개천 주변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 증가(호구총수에 기술)과 개천 주변 거류민 증가, 하류지역 경각지 개간, 도성 사산에서의 벌목(지봉유설에 기술), 시체 유기(박지원, 『연암집』 「방경각외전」 광문자전, 1754년) 등은 개천에 각종 퇴적물이 쌓이는 원인이 되었고, 개천 주변은 불안정한 거주공간이 되었다. (숙종실록 1710년 9월 5일) :「조선왕조실록」 숙종 36년(1710) 9월 5일자 기록에는 이날 한성이 호된 물난리를 겪었음을 전하면서 가장 주된 원인으로 무차별한 산림 남벌을 다음과 같이 지목하고 있다. "무릇 네 산에 나무가 없어 민둥산이 된 뒤로 사석(沙石·모래와 돌)이 흘러내려 봇도랑이 메워지고 물길이 막힘으로써, 가뭄에는 물이 고여 흐르지 않아 악취가  진동하는가 하면, 큰비가 내리면 평지까지 물이 범람해 부근 인가가 피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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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세종 대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개천은 비가 오면 쉽게 범람하여 도선 안의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조선 후기, 한양은 상업도시로 변모하여 많은 상인과 평민이 생계를 목적으로 상경하였고, 이들은 주로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며 개천 주변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 증가(호구총수)과 개천 주변 거류민 증가, 하류지역 경각지 개간, 도성 사산에서의 벌목(지봉유설), 시체 유기(박지원, 『연암집』 「방경각외전」 광문자전, 1754년) 등으로 개천에 각종 퇴적물이 쌓여서 개천 주변은 불안정한 거주공간이 되었다. 숙종 36년(1710)에는 한성이 호된 물난리를 겪었는데, "무릇 네 산에 나무가 없어 민둥산이 된 뒤로 사석(沙石·모래와 돌)이 흘러내려 봇도랑이 메워지고 물길이 막힘으로써, 가뭄에는 물이 고여 흐르지 않아 악취가  진동하는가 하면, 큰비가 내리면 평지까지 물이 범람해 부근 인가가 피해를 보았다"며 가장 주된 원인으로 무차별한 산림 남벌을 다음과 같이 지목하고 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 1710년 09월 05일)
  
 
이에 영조는 1760년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개천 준설, 즉 준천(개천의 바닥을 파내어 물길이 원활히 흐르게 하는 것)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에 영조는 1760년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개천 준설, 즉 준천(개천의 바닥을 파내어 물길이 원활히 흐르게 하는 것)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영조는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에 있다"(승정원일기 1760 2월 23일), "개천의 준설은 첫째도 백성을 위함이요, 둘째도 백성을 위함이니..."라고 하였는데(『준천사실』)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준천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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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신하들의 반대와 염려에도 불구하고(『영조실록』 영조 36년 3월 16일, 영조 36년 04월 10일, 영조 36년 4월 17일, 영조 36년 04월 19일, )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에 있다"(승정원일기 1760 2월 23일), "도랑을 파내는 한 가지는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니..."라고 하였는데(『영조실록』 영조 35년 10월 15일)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준천을 단행하였다.
  
 
또한 영조는 준천이 시작되자 개천에 나가 곡식과 무명을 나눠주는 등 백성을 위로하였고, 백성에 대한 자신의 뜻을 표현한 『어제균역준천여사업』(1773,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을 지었다.
 
또한 영조는 준천이 시작되자 개천에 나가 곡식과 무명을 나눠주는 등 백성을 위로하였고, 백성에 대한 자신의 뜻을 표현한 『어제균역준천여사업』(1773,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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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준천으로 백성들이 불편함이 있는 지를 살피었고(『영조실록』 영조 36년 3월 11일) 개천 주변의 일부 백성이 거주지를 잃게 되었는데, 영조는 도성의 빈집을 준천소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제공 (『영조실록』 영조 36년 4월 1일)하거나 뱀 장사를 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는 등 민생을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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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재임 기간 중 200여 차례의 순문을 진행했는데, 그 중 준천과 관련해서는 9차례를 진행하였다. 즉, 준천이 중요한 국책사업인 만큼 백성과 신하들과 소통하면서 준천에 대한 민심과 의견을 파악한 것이다.
 
영조는 재임 기간 중 200여 차례의 순문을 진행했는데, 그 중 준천과 관련해서는 9차례를 진행하였다. 즉, 준천이 중요한 국책사업인 만큼 백성과 신하들과 소통하면서 준천에 대한 민심과 의견을 파악한 것이다.
  
영조는 1752년 친히 광통교에 행차하여 주민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고, 1758년 5월 2일에는 숭문당에서 준천의 실시여부를 신하들과 토론하였다. 영조가 “청계천 다리 중 광충교가 작년에 비해 더욱 흙이 빠져 막혀 있다”고 하자, 홍봉한은 “홍수를 만나면 천변(川邊)의 인가는 표류하거나 없어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하며 준설의 시급함을 주장하였다. 일부 관리들이 백성을 동원하면 민원(民怨)이 생길 것임을 제기했으나, 영조는 장기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하면서 공사를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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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1752년 광통교에 행차하여 주민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고, 1758년 5월 2일에는 숭문당에서 준천의 실시여부를 신하들과 토론하였다. 영조가 “청계천 다리 중 광충교가 작년에 비해 더욱 흙이 빠져 막혀 있다”고 하자, 홍봉한은 “홍수를 만나면 천변(川邊)의 인가는 표류하거나 없어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하며 준설의 시급함을 주장하였다. 일부 관리들이 백성을 동원하면 민원(民怨)이 생길 것임을 제기했으나, 영조는 장기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하면서 공사를 추진하였다.
  
1759년 10월 준천을 담당할 임시 관청인 준천소(浚川所)를 설치하고, 홍봉한(洪鳳漢, 1713~1778), 홍계희(洪啓禧, 1703~1771), 이창의(李昌誼, 1704~1772)를 준천당상으로 임명하였다. 본격적인 준천사업은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어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이 57일간의 공사 기간 동안에 21만 5천 여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는데, 도성의 방민(坊民)을 비롯하여 각 시전의 상인 등,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僧軍), 모군(募軍)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참여하였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 3천 여 명은 품삯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략 공사 기간 동안 3만 5천 냥의 돈과 쌀 2천 3백여 석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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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 10월 준천을 담당할 임시 관청인 준천소(浚川所)를 설치하고, 홍봉한(洪鳳漢, 1713~1778), 홍계희(洪啓禧, 1703~1771), 이창의(李昌誼, 1704~1772)를 준천당상으로 임명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5년 10월 06일) 한달 후인 11월 20일 자원하여 성책(成冊)된 인원이 1만명을 넘자 명정전(明政殿) 월대에서 시민(市民)들을 직접 면대하여 위로하는 등 (『영조실록』, 영조 35년 11월 20일)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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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준천사업은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어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이 57일간의 공사 기간 동안에 21만 5천 여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는데, 도성의 방민(坊民)을 비롯하여 각 시전의 상인 등,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僧軍), 모군(募軍)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참여하였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 3천 여 명은 품삯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략 공사 기간 동안 3만 5천 냥의 돈과 쌀 2천 3백여 석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조선전기에는 국가적 토목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는 경우 강제로 부역시켰지만, 영조는 지방의 백성에 대해서는 강제로 동원하지 않았고, 동원된 백성들에게는 품삯을 지급했다. 이것은 정조대에도 계승되어 정조는 화성 건축 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면서 품삯을 지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조선전기에는 국가적 토목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는 경우 강제로 부역시켰지만, 영조는 지방의 백성에 대해서는 강제로 동원하지 않았고, 동원된 백성들에게는 품삯을 지급했다. 이것은 정조대에도 계승되어 정조는 화성 건축 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면서 품삯을 지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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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천 참여자의 마음을 헤아리다 ==
 
== 준천 참여자의 마음을 헤아리다 ==
영조는 준천을 자신의 대표 업적 중 하나로 꼽으며, 세손(정조)과 신하들에게 명심하라고 당부하였다. (어제준천명병소서, 1773) 실제로 영조는 비바람으로 신하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준천 현장에 방문하거나 공사가 끝난 뒤 준천에 참여한 참여자들에게 대대적인 포상과 잔치를 베풀어 참여자를 위로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버클리대학교가 소장한 『준천계첩』에 실린 4점의 그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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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준천을 자신의 대표 업적 중 하나로 꼽으며(영조실록 49년 12월 20일), 세손(정조)과 신하들에게 명심하라고 당부하였다. (어제준천명병소서, 1773) 실제로 영조는 비바람으로 신하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준천 현장에 방문하거나 공사가 끝난 뒤 준천에 참여한 참여자들에게 대대적인 포상과 잔치를 베풀어 참여자를 위로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버클리대학교가 소장한 『준천계첩』에 실린 4점의 그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준천계첩』은 영조가 시를 지어 준천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내린 「어제어필」와 「어제사언시」, 영조가 준천을 격려하는 내용을 그린 그림 4점, 준천소의 관원 명단과 동원된 연인원을 5장에 기록한 「준천소좌목」, 이 해 4월에 홍봉한(1713-1778)이 영조의 명을 받고서 지은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점의 그림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이 『준천계첩』은 영조가 시를 지어 준천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내린 「어제어필」와 「어제사언시」, 영조가 준천을 격려하는 내용을 그린 그림 4점, 준천소의 관원 명단과 동원된 연인원을 5장에 기록한 「준천소좌목」, 이 해 4월에 홍봉한(1713-1778)이 영조의 명을 받고서 지은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점의 그림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영조(英祖)가 오간수문(五間水門)에 행차하여 준천의 현장을 관람한 것을 그린 것으로 준천 당시 오간수문의 모습과 공사 현장의 생생함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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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영조가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오간수문(五間水門)에 행차하여 준천의 현장을 관람한 것을 그린 것으로 준천 당시 오간수문의 모습과 공사 현장의 생생함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09일)
* 영화당친림사선도 (暎花堂親臨賜膳圖): 공식적으로 준천이 완료된 후 영화당(暎花堂)에 나가 활쏘기 시합에 참석하고 준천(濬川) 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담은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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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당친림사선도 (暎花堂親臨賜膳圖): 공식적으로 준천이 완료된 후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서 준천소의 당상과 낭청에게 시사(試射, 무장들의 활쏘기 시합)를 행한 후 영화당(暎花堂)에서 사선(賜膳,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림)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16일)
* 모화관친림시재도 (慕華館親臨試才圖): 영조(英祖)가 모화관(慕華館)에서 각 군문(軍門)과 준천소 군병(軍兵)들의 훈련 모습을 시찰하고 준천(濬川) 사업에 참여한 군병을 격려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후 누락된 장교(將校)와 군졸(軍卒), 지원한 백성과 승려들까지 참여하여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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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화관친림시재도 (慕華館親臨試才圖): 영조(英祖)가 모화관(慕華館)에서 각 군문(軍門)과 준천소 군병(軍兵)들의 훈련 모습을 시찰하고 준천(濬川) 사업에 참여한 군병을 격려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후 누락된 장교(將校)와 군졸(軍卒), 지원한 백성과 승려들까지 참여하여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23일)
* 연융대사연도(鍊戎臺賜宴圖): 영조가 준천소 당상(堂上)부터 하급 예속(隸屬)에 이르기 까지 준천의 참여자를 모두 연융대(鍊戎臺)에 모이게 한 후 잔치를 베푼 것을 그린 것이다. 이 날은 준천(濬川)에 관한 모든 일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음을 기념(記念)하는 자리로 준천(濬川)에 참여한 군민(軍民)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없애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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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융대사연도(鍊戎臺賜宴圖): 영조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영조가 준천소 당상(堂上)부터 하급 예속(隸屬)에 이르기까지 준천의 참여자를 모두 연융대(鍊戎臺)에 모이게 한 후 잔치를 베푼 것을 그린 것이다. 이 날은 준천(濬川)에 관한 모든 일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음을 기념(記念)하여 세초연(洗草宴)을 하는 자리로 준천(濬川)에 참여한 군민(軍民)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없애 버렸다. (『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16일 참고)
  
 
『준천계첩』과 같이 계첩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들은 임금에게 바쳐서 관청이나 궁중에서 보관하기 위한 책(유일본)과 참석한 고위관료들이 나누어 가지기 위한 여러 책(부본, 副本)을 함께 만들었다. 유일본은 당대 최고 수준의 화가가 아주 정교하고 채색한 것이고, 이에 비해 부본은 실무적으로 활용하도록 만든 작품이다. 『준천계첩』도 여러 본이 전해지는데,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 리움미술관에 《준천첩濬川帖》, 부산시립박물관에 《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가 소장되어 있다. 당시 몇 부가 완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일본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준천계첩』이라 추정된다. 이 책에 수록된 그림은 여타의 전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채색성과 정교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수문상친임관역」에서 네 개의 오간수문 다리 기둥 중에서 첫째와 넷째 기둥에는 거북문양을 새겨 놓은 것이 보이며, 「연융대사연」에서 앉아있는 관료들을 위해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간 분주해 보이지 않는데 다른 전본은 이들을 생략해 버렸다. 또한 다른 전본에는 모든 그림이 실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림의 완성도, 호화 장정, 그림의 여부 등을 보아 버클리대학교에서 소장한 책이 영조에게 바친 유일본 『준천계첩』으로 추정된다.
 
『준천계첩』과 같이 계첩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들은 임금에게 바쳐서 관청이나 궁중에서 보관하기 위한 책(유일본)과 참석한 고위관료들이 나누어 가지기 위한 여러 책(부본, 副本)을 함께 만들었다. 유일본은 당대 최고 수준의 화가가 아주 정교하고 채색한 것이고, 이에 비해 부본은 실무적으로 활용하도록 만든 작품이다. 『준천계첩』도 여러 본이 전해지는데,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 리움미술관에 《준천첩濬川帖》, 부산시립박물관에 《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가 소장되어 있다. 당시 몇 부가 완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일본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준천계첩』이라 추정된다. 이 책에 수록된 그림은 여타의 전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채색성과 정교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수문상친임관역」에서 네 개의 오간수문 다리 기둥 중에서 첫째와 넷째 기둥에는 거북문양을 새겨 놓은 것이 보이며, 「연융대사연」에서 앉아있는 관료들을 위해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간 분주해 보이지 않는데 다른 전본은 이들을 생략해 버렸다. 또한 다른 전본에는 모든 그림이 실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림의 완성도, 호화 장정, 그림의 여부 등을 보아 버클리대학교에서 소장한 책이 영조에게 바친 유일본 『준천계첩』으로 추정된다.
  
 
==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영조 ==
 
==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영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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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백년은 갈 것입니다’라고 대답 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3월 16일)
  
개천 준천은 경진준천(1760년), 계사준천(1773년) 두번 진행되었는데, 두번째 공사는 개천의 양쪽 기슭에 석축을 쌓는 것으로 경진준천에서 목책으로 임시 가설한 것을 보완한 것으로 이는 준천 효과를 지속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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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조는 준천의 효과를 지속하고자 하였다. 영조대에 개천 준천은 경진준천(1760년), 계사준천(1773년) 두번 진행되었는데, 1773년 공사는 개천의 양쪽 기슭에 석축을 쌓는 것으로 경진준천에서 목책으로 임시 가설한 것을 보완한 것으로 이 역시 준천 효과를 지속하기 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조는 준천을 시작한 지 근 한 달이 되어가던 3월 16일에 “준천을 위한 대책은 역시 찾기 어렵다. 이제는 그 실마리를 알 수 있겠다.”라며 준천의 전 과정을 준천당상 홍계희에게 기록하도록 하여 후대에 계승시키고자 하였다. 홍계희는 경진준천의 의미와 준천 배경 및 경과 등 제반 사항을 기록하여 1760년에 『준천사실』을 간행하였다. 영조는 서문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 지금의 일을 생각할 것이니 후일 누구라도 개천이 막히지 않고 물이 잘 흐르도록 해야 한다”며 준천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즉, 『준천계첩』이 군신간의 기념비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준천사실』 은 후대에 준천 시행에 대한 전범을 제공하고자 준천의 전 과정과 결과를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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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영조는 준천을 시작한 지 근 한 달이 되어가던 때에 “준천을 위한 대책은 역시 찾기 어렵다. 이제는 그 실마리를 알 수 있겠다.”라며 준천의 전 과정을 준천당상 홍계희에게 기록하도록 하여 후대에 계승시키고자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36년 03월 16일) 홍계희는 경진준천의 의미와 준천 배경 및 경과 등 제반 사항을 기록하여 1760년에 『준천사실』을 간행하였다. 영조는 서문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 지금의 일을 생각할 것이니 후일 누구라도 개천이 막히지 않고 물이 잘 흐르도록 해야 한다”며 준천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즉, 『준천계첩』이 군신간의 기념비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준천사실』 은 후대에 준천 시행에 대한 전범을 제공하고자 준천의 전 과정과 결과를 남긴 것이다.
  
『준천사실』이 완성된 후 영조는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백년은 갈 것입니다’라고 대답 하였다. 영조는 금번의 준천 사업 후에 청계천이 다시는 막히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신신당부하였고, 홍봉한은 “백년 내에는 반드시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고 자신감을 피력하였다. 홍봉한은 “차후에 한성부의 장관과 삼군문 대장이 주관하여 군문(軍門)에서 각기 약간의 재력을 각출하여 사후 준천의 비용으로 하면 일이 잘 될 것입니다.”라면서 사후 보완대책까지 설명하였다. 이어 준천 사업을 기념하는 표석(標石)을 세웠다. 영조는 “표석(標石)은 경진년(1760년)을 지평(地平)으로 새기고 침수되지 않게 해야 유효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경진지평’ 네 글자를 새기고 이 글자들이 모두 보이도록 늘 토사 관리에 만전을 가할 것을 지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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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 채제공(蔡濟恭)은 조선 개국부터 준천까지의 개천 역사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며 준천을 시행한 영조를 칭송하는 준천가(濬川歌)를 남겼다. (『번암집』 9권 - 詩, 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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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영조는 준천 사업을 기념하는 표석(標石)을 세워 기준점으로 삼도록 했다. 영조는 “표석(標石)은 경진년(1760년)을 지평(地平)으로 새기고 침수되지 않게 해야 유효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경진지평’ 네 글자를 새기고 이 글자들이 모두 보이도록 늘 토사 관리에 만전을 가할 것을 지시한 것이었다.
  
  
 
== 백성이 사랑하는 수문을 만들다 ==
 
== 백성이 사랑하는 수문을 만들다 ==
 
 
* 한양도(18세기)에는 18세기 한양 모습을 묘사한 지도로 송기교(松杞橋)부터 영도교(永渡橋)까지 개천 본류의 준천 공사 구간에 있던 10개의 다리 명칭이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중 오간수문을 살펴보자.
 
* 한양도(18세기)에는 18세기 한양 모습을 묘사한 지도로 송기교(松杞橋)부터 영도교(永渡橋)까지 개천 본류의 준천 공사 구간에 있던 10개의 다리 명칭이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중 오간수문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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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천 이후, 준천(濬川) 과정에서 둑을 튼튼하게 하고자 개천 양쪽 언덕에 심은 버드나무(『증보문헌비고』 권21 「여지고」 산천, 1908)와 수양버들로 오간수문은 한양의 상춘장소로 사랑받았다. (유본학, 『문암집』,「오간수문유제」,1812~181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준천 이후, 준천(濬川) 과정에서 둑을 튼튼하게 하고자 개천 양쪽 언덕에 심은 버드나무(『증보문헌비고』 권21 「여지고」 산천, 1908)와 수양버들로 오간수문은 한양의 상춘장소로 사랑받았다. (유본학, 『문암집』,「오간수문유제」,1812~181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준천으로 개천 주변의 일부 백성이 거주지를 잃게 되었는데, 영조는 도성의 빈집을 준천소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제공 (영조실록 1760년 4월 1일)하거나 뱀 장사를 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는 등 민생을 돌보았다.
 
  
 
* 준천때 퍼낸 흙은 동대문 일대 개천의 양 둑에 쌓아두고 이를 가산으로 불렀으며(『광여도』,「도성도」,18세기,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사산금표도』,1765), 훈련원과 동대문 밖의 땅을 메우는 데 사용하였다.
 
* 준천때 퍼낸 흙은 동대문 일대 개천의 양 둑에 쌓아두고 이를 가산으로 불렀으며(『광여도』,「도성도」,18세기,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사산금표도』,1765), 훈련원과 동대문 밖의 땅을 메우는 데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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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천소좌목: 경진준천에 동원된 준천소 관원의 구성과 명단, 참여한 백성들의 구성을 자세히 기록한 『준천소좌목』(1760,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이 있다.
 
* 준천소좌목: 경진준천에 동원된 준천소 관원의 구성과 명단, 참여한 백성들의 구성을 자세히 기록한 『준천소좌목』(1760,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이 있다.
  
* 영조와 함께 준천에 힘을 쏟은 번암 채제공(蔡濟恭)도 준천가(濬川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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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봉한은 “차후에 한성부의 장관과 삼군문 대장이 주관하여 군문(軍門)에서 각기 약간의 재력을 각출하여 사후 준천의 비용으로 하면 일이 잘 될 것입니다.”라면서 사후 보완대책까지 설명하였다.

2022년 6월 21일 (화) 06:44 판

백성을 생각한 개천, 청계천

그래프


준천을 통해 백성을 생각하다

조선의 도읍인 한양은 한반도의 중심지에 자리를 잡았고, 조세의 운송에도 매우 유리했다. 여기에 동, 서, 남, 북 4대 산으로 둘러싸인 형국은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도 명당이었다. 그러나 한양은 홍수에 취약한 도시 구조였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지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모인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을 통해 한강으로 나가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청계천이 넘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도성 안의 백성들은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한 태종은 1405년 한양의 도성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하천인 개천(開川)의 준설을 명했다. 이때 준설한 개천(開川)이 현재 청계천의 원형이다. (한양도 - 위백규(1727~1798)가 1770년 저술한 『환영지』에 수록)

15세기 세종 대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개천은 비가 오면 쉽게 범람하여 도선 안의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조선 후기, 한양은 상업도시로 변모하여 많은 상인과 평민이 생계를 목적으로 상경하였고, 이들은 주로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며 개천 주변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 증가(호구총수)과 개천 주변 거류민 증가, 하류지역 경각지 개간, 도성 사산에서의 벌목(지봉유설), 시체 유기(박지원, 『연암집』 「방경각외전」 광문자전, 1754년) 등으로 개천에 각종 퇴적물이 쌓여서 개천 주변은 불안정한 거주공간이 되었다. 숙종 36년(1710)에는 한성이 호된 물난리를 겪었는데, "무릇 네 산에 나무가 없어 민둥산이 된 뒤로 사석(沙石·모래와 돌)이 흘러내려 봇도랑이 메워지고 물길이 막힘으로써, 가뭄에는 물이 고여 흐르지 않아 악취가 진동하는가 하면, 큰비가 내리면 평지까지 물이 범람해 부근 인가가 피해를 보았다"며 가장 주된 원인으로 무차별한 산림 남벌을 다음과 같이 지목하고 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 1710년 09월 05일)

이에 영조는 1760년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개천 준설, 즉 준천(개천의 바닥을 파내어 물길이 원활히 흐르게 하는 것)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영조는 신하들의 반대와 염려에도 불구하고(『영조실록』 영조 36년 3월 16일, 영조 36년 04월 10일, 영조 36년 4월 17일, 영조 36년 04월 19일, )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에 있다"(승정원일기 1760 2월 23일), "도랑을 파내는 한 가지는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니..."라고 하였는데(『영조실록』 영조 35년 10월 15일)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준천을 단행하였다.

또한 영조는 준천이 시작되자 개천에 나가 곡식과 무명을 나눠주는 등 백성을 위로하였고, 백성에 대한 자신의 뜻을 표현한 『어제균역준천여사업』(1773,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을 지었다.

또한 준천으로 백성들이 불편함이 있는 지를 살피었고(『영조실록』 영조 36년 3월 11일) 개천 주변의 일부 백성이 거주지를 잃게 되었는데, 영조는 도성의 빈집을 준천소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제공 (『영조실록』 영조 36년 4월 1일)하거나 뱀 장사를 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는 등 민생을 돌보았다.


백성들이 적극 참여하여 준천이 57일만에 끝나다

영조는 재임 기간 중 200여 차례의 순문을 진행했는데, 그 중 준천과 관련해서는 9차례를 진행하였다. 즉, 준천이 중요한 국책사업인 만큼 백성과 신하들과 소통하면서 준천에 대한 민심과 의견을 파악한 것이다.

영조는 1752년 광통교에 행차하여 주민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고, 1758년 5월 2일에는 숭문당에서 준천의 실시여부를 신하들과 토론하였다. 영조가 “청계천 다리 중 광충교가 작년에 비해 더욱 흙이 빠져 막혀 있다”고 하자, 홍봉한은 “홍수를 만나면 천변(川邊)의 인가는 표류하거나 없어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하며 준설의 시급함을 주장하였다. 일부 관리들이 백성을 동원하면 민원(民怨)이 생길 것임을 제기했으나, 영조는 장기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하면서 공사를 추진하였다.

1759년 10월 준천을 담당할 임시 관청인 준천소(浚川所)를 설치하고, 홍봉한(洪鳳漢, 1713~1778), 홍계희(洪啓禧, 1703~1771), 이창의(李昌誼, 1704~1772)를 준천당상으로 임명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5년 10월 06일) 한달 후인 11월 20일 자원하여 성책(成冊)된 인원이 1만명을 넘자 명정전(明政殿) 월대에서 시민(市民)들을 직접 면대하여 위로하는 등 (『영조실록』, 영조 35년 11월 20일)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본격적인 준천사업은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어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이 57일간의 공사 기간 동안에 21만 5천 여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는데, 도성의 방민(坊民)을 비롯하여 각 시전의 상인 등,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僧軍), 모군(募軍)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참여하였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 3천 여 명은 품삯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략 공사 기간 동안 3만 5천 냥의 돈과 쌀 2천 3백여 석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조선전기에는 국가적 토목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는 경우 강제로 부역시켰지만, 영조는 지방의 백성에 대해서는 강제로 동원하지 않았고, 동원된 백성들에게는 품삯을 지급했다. 이것은 정조대에도 계승되어 정조는 화성 건축 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면서 품삯을 지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준천 참여자의 마음을 헤아리다

영조는 준천을 자신의 대표 업적 중 하나로 꼽으며(영조실록 49년 12월 20일), 세손(정조)과 신하들에게 명심하라고 당부하였다. (어제준천명병소서, 1773) 실제로 영조는 비바람으로 신하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준천 현장에 방문하거나 공사가 끝난 뒤 준천에 참여한 참여자들에게 대대적인 포상과 잔치를 베풀어 참여자를 위로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버클리대학교가 소장한 『준천계첩』에 실린 4점의 그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준천계첩』은 영조가 시를 지어 준천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내린 「어제어필」와 「어제사언시」, 영조가 준천을 격려하는 내용을 그린 그림 4점, 준천소의 관원 명단과 동원된 연인원을 5장에 기록한 「준천소좌목」, 이 해 4월에 홍봉한(1713-1778)이 영조의 명을 받고서 지은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점의 그림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영조가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오간수문(五間水門)에 행차하여 준천의 현장을 관람한 것을 그린 것으로 준천 당시 오간수문의 모습과 공사 현장의 생생함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09일)
  • 영화당친림사선도 (暎花堂親臨賜膳圖): 공식적으로 준천이 완료된 후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서 준천소의 당상과 낭청에게 시사(試射, 무장들의 활쏘기 시합)를 행한 후 영화당(暎花堂)에서 사선(賜膳,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림)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16일)
  • 모화관친림시재도 (慕華館親臨試才圖): 영조(英祖)가 모화관(慕華館)에서 각 군문(軍門)과 준천소 군병(軍兵)들의 훈련 모습을 시찰하고 준천(濬川) 사업에 참여한 군병을 격려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후 누락된 장교(將校)와 군졸(軍卒), 지원한 백성과 승려들까지 참여하여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23일)
  • 연융대사연도(鍊戎臺賜宴圖): 영조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영조가 준천소 당상(堂上)부터 하급 예속(隸屬)에 이르기까지 준천의 참여자를 모두 연융대(鍊戎臺)에 모이게 한 후 잔치를 베푼 것을 그린 것이다. 이 날은 준천(濬川)에 관한 모든 일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음을 기념(記念)하여 세초연(洗草宴)을 하는 자리로 준천(濬川)에 참여한 군민(軍民)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없애 버렸다. (『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16일 참고)

『준천계첩』과 같이 계첩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들은 임금에게 바쳐서 관청이나 궁중에서 보관하기 위한 책(유일본)과 참석한 고위관료들이 나누어 가지기 위한 여러 책(부본, 副本)을 함께 만들었다. 유일본은 당대 최고 수준의 화가가 아주 정교하고 채색한 것이고, 이에 비해 부본은 실무적으로 활용하도록 만든 작품이다. 『준천계첩』도 여러 본이 전해지는데,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 리움미술관에 《준천첩濬川帖》, 부산시립박물관에 《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가 소장되어 있다. 당시 몇 부가 완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일본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준천계첩』이라 추정된다. 이 책에 수록된 그림은 여타의 전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채색성과 정교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수문상친임관역」에서 네 개의 오간수문 다리 기둥 중에서 첫째와 넷째 기둥에는 거북문양을 새겨 놓은 것이 보이며, 「연융대사연」에서 앉아있는 관료들을 위해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간 분주해 보이지 않는데 다른 전본은 이들을 생략해 버렸다. 또한 다른 전본에는 모든 그림이 실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림의 완성도, 호화 장정, 그림의 여부 등을 보아 버클리대학교에서 소장한 책이 영조에게 바친 유일본 『준천계첩』으로 추정된다.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영조

영조는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백년은 갈 것입니다’라고 대답 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3월 16일)

이처럼 영조는 준천의 효과를 지속하고자 하였다. 영조대에 개천 준천은 경진준천(1760년), 계사준천(1773년) 두번 진행되었는데, 1773년 공사는 개천의 양쪽 기슭에 석축을 쌓는 것으로 경진준천에서 목책으로 임시 가설한 것을 보완한 것으로 이 역시 준천 효과를 지속하기 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조는 준천을 시작한 지 근 한 달이 되어가던 때에 “준천을 위한 대책은 역시 찾기 어렵다. 이제는 그 실마리를 알 수 있겠다.”라며 준천의 전 과정을 준천당상 홍계희에게 기록하도록 하여 후대에 계승시키고자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36년 03월 16일) 홍계희는 경진준천의 의미와 준천 배경 및 경과 등 제반 사항을 기록하여 1760년에 『준천사실』을 간행하였다. 영조는 서문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 지금의 일을 생각할 것이니 후일 누구라도 개천이 막히지 않고 물이 잘 흐르도록 해야 한다”며 준천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즉, 『준천계첩』이 군신간의 기념비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준천사실』 은 후대에 준천 시행에 대한 전범을 제공하고자 준천의 전 과정과 결과를 남긴 것이다.

번암 채제공(蔡濟恭)은 조선 개국부터 준천까지의 개천 역사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며 준천을 시행한 영조를 칭송하는 준천가(濬川歌)를 남겼다. (『번암집』 9권 - 詩, 1791)

또한 영조는 준천 사업을 기념하는 표석(標石)을 세워 기준점으로 삼도록 했다. 영조는 “표석(標石)은 경진년(1760년)을 지평(地平)으로 새기고 침수되지 않게 해야 유효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경진지평’ 네 글자를 새기고 이 글자들이 모두 보이도록 늘 토사 관리에 만전을 가할 것을 지시한 것이었다.


백성이 사랑하는 수문을 만들다

  • 한양도(18세기)에는 18세기 한양 모습을 묘사한 지도로 송기교(松杞橋)부터 영도교(永渡橋)까지 개천 본류의 준천 공사 구간에 있던 10개의 다리 명칭이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중 오간수문을 살펴보자.
  • 오간수문은 동대문 남쪽에 있던 개천의 배수구로 수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 기능도 하였다.
  • 준천 이후, 준천(濬川) 과정에서 둑을 튼튼하게 하고자 개천 양쪽 언덕에 심은 버드나무(『증보문헌비고』 권21 「여지고」 산천, 1908)와 수양버들로 오간수문은 한양의 상춘장소로 사랑받았다. (유본학, 『문암집』,「오간수문유제」,1812~181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준천때 퍼낸 흙은 동대문 일대 개천의 양 둑에 쌓아두고 이를 가산으로 불렀으며(『광여도』,「도성도」,18세기,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사산금표도』,1765), 훈련원과 동대문 밖의 땅을 메우는 데 사용하였다.


  • 오간수문(五間水門) 홍예(虹蜺) 기초석의 물가름석 위에 놓여있던 돌거북이 형상의 석조물이 놓여져 있는데, 이는 물흐름을 잘 관장하여 개천(開川)의 범람을 막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수문상친림관역도에도 그려짐)
    • 오간수문에는 외부인의 도성 출입을 막기 위해 오간수문(五間水門) 홍예 사이사이에 설치한 철책도 있었고, 이는 오간수문지(五間水門址)에서 발굴되었다.
    • 1907년(융희 1), 하천수와 토사가 쉽게 흘러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 문을 뜯었고, 1908년(융희 2)에는 교통을 원활하게 하고자 남아있던 오간수문과 성벽을 헐어내며 오간수교라는 다리를 설치하였다. 이후 오간수교는 청계천 복개공사 때 사라졌다.

해체 이전의 오간수문의 사진은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 1904년)에 실려있다.


기타

  • 춘첩첩은 영조가 경진준첩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종류는 '어제준천계첩', '어제갱진계첩' 두가지이나 각 종류마다 여러 첩이 존재하며, '영화당친림사선도'는 모든 준천첩에 실려있으나 이를 제외하고는 실린 그림에 차이가 있다.
  • 어제갱진계첩: 영조가 지은 시에 대해 신하들이 화답한 시들을 모아 제작한 것이다.
  • 준천소좌목: 경진준천에 동원된 준천소 관원의 구성과 명단, 참여한 백성들의 구성을 자세히 기록한 『준천소좌목』(1760,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이 있다.


  • 홍봉한은 “차후에 한성부의 장관과 삼군문 대장이 주관하여 군문(軍門)에서 각기 약간의 재력을 각출하여 사후 준천의 비용으로 하면 일이 잘 될 것입니다.”라면서 사후 보완대책까지 설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