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광산김씨 김해 스토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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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my9univ/wiki/index.php/안동_광산김씨_김해_영문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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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my9univ/wiki/index.php/안동_광산김씨_김해_영문 영문 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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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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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cgi-bin/wikiGraph2.py?account=my9univ&script=김해_스토리.lst "자신보다는 나라와 사회를 생각하는 군자의 삶" 스토리별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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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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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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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와 함께 제향된 김해는 누구인가===
===입향조와 함께 제향된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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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광산김씨재사및사당.jpg|광산김씨 재사(사진상 왼쪽) 및 사당(사진상 오른쪽).([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700270000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파일:광산김씨재사및사당.jpg|광산김씨 재사(사진상 왼쪽) 및 사당(사진상 오른쪽).([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700270000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파일:재사및사당2.jpg|신문[神門]과 사당([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80600190001 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
 
파일:재사및사당2.jpg|신문[神門]과 사당([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80600190001 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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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난중잡록김해.jpg|난중잡록에 쓰인 김해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2A_V006_067A_IMG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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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광산김씨_재사_및_사당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은 [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안동_후조당_종택 후조당 종택]에 부속된 재사(齋舍, 제사 지내는 집)와 광산 김씨 중 오천리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김효로(金孝盧,1445∼1534)와 증손자 김해(金垓,1555∼1593)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광산김씨_재사_및_사당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은 [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안동_후조당_종택 후조당 종택]에 부속된 재사(齋舍, 제사 지내는 집)와 광산 김씨 중 오천리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김효로(金孝盧,1445∼1534)와 증손자 김해(金垓,1555∼1593)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광산김씨 사당은 안동 예안 오천리 입향조인 김효로를 제향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김해가 임진왜란 시 영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여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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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광산김씨 사당은 안동 예안 오천리 입향조인 김효로를 제향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김해가 임진왜란 시 영남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여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안동 광산김씨는 수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음에도 입향조가 모셔진 신성한 사당에 함께 불천위로 모셔진 인물인 김해와 그의 대표적인 저술서 『향병일기』는 무엇일까.
 
안동 광산김씨는 수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음에도 입향조가 모셔진 신성한 사당에 함께 불천위로 모셔진 인물인 김해와 그의 대표적인 저술서 『향병일기』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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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지내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는 안동지방과 영남 북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진중일기인 『향병일기』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고향에서 지내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는 안동지방과 영남 북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진중일기인 『향병일기』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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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亂中雜錄)<ref>임진왜란 시 남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이 쓴 야사집으로 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차례의 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ref>에는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고,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썼다고 되어있다.<ref>亂中雜錄[二] 壬辰下</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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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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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 Hae who was enshrined with the first to step fo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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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ual House and Shrine of the Gwangsan Kim Clan, is designated as Heritage, consists of the Ritual House attached to the Hujodang Head House and the shrine of Kim Hyo-ro (1445-1534) and his great-grandson, Kim Hae (1555-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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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ly, the shrine was built to commemorate Kim Hyo-ro, who was the first to step foot in Ocheon-ri, Yean-ri, Andong. However, after Kim hae's passing away while serving as leader of civilian army in the Japanese invasions(1592-1598), Kimhae was enshrined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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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ng many great men of the Andong Gwangsan Kim clan, I would like to find out about Kim Hae, who was enshrined with Kim Hyo-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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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o is Kim 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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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f the world is at peace, a gentleman should devote himself to his studies. However, when there is a hardship in the country, a gentleman must pick up his sword and stand up." This is truly something that can be said about Kim 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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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Ha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When the Japanese invasions(1592-1598) broke out while he was living in his hometown, Kim Hae served as leader of civilian army. And he wrote ''Hyangbyeong diary'' that recorded the battle situation in detail, and ''Haengkunsuzi'', a guide book for unit commanders.
  
 
=='''내용'''==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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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의 구국정신을 일깨운 김성일의 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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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성일격문.jpg|김성일 문집인 『학봉집』제3권 초유문[招諭文]의 격문([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040_040_0010_2004_001_X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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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해격문답편.jpg|김해 문집인 『근시재집』제3권에 실린 김성일 격문에 답하는 편지([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730A_0050_010_0360_2010_B009_X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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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1592년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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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으며, 이를 통해 군사적 환경이 열세임에도 나라를 걱정하며 적에 대해 분개하여 의병대장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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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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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국운이 막혀 오랑캐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종묘사직이 병화(兵火)에 휩싸이고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니, 백성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지가 오래입니다. 누추하고 협소한 지방이라서 예전에도 이 지역 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유학만을 숭상했을 뿐 무예를 익히지 않았습니다. (중략) <br/> 의병을 불러 모으니 모두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활을 잡아 본 사람은 열에 한둘도 되지 않아 떨쳐 일어나 진격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만, 요해처에 복병을 설치할 수는 있으니, 격분한 마음을 떨쳐 임금을 위해 죽고자 하는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군대는 근본이 갖춰지지 않았고, 통솔하는 자의 재주가 부족하여 병세(兵勢)가 열악합니다. 게다가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병기는 탕진되어 모두가 나무를 잘라 만든 병기를 쥐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거사를 한다면 뜻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br/> '''그러나 충의로운 마음이 천성으로부터 나오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도리도 예전에 대략이나마 익혔습니다. 불끈 마음을 먹고 저 더러운 오랑캐를 소탕하고자 하며, 하늘에 맹세컨대 이 도적들과는 세상을 함께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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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근시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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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김성일은 왜 격문을 썼을까''</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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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각 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 김성일은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은“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ref>국조보감 제30권 선조 24년(159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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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성일은 격문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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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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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ifesto that awakened the his spirit of national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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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Seong-il(1538-1593) from Andong went down to Gyeongsang-do to check the situation of the Japanese invasions. He wrote a manifesto of concern for the country and sent it to various regions, and many people were moved by this and joined civilian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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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as in this context that Kim Hae became a civilian army. Despite the inferior military environment, Kim Hae answered Kim Seong-il's manifesto, "When the king fled from the outbreak of barbarians from the island, the people mourned very much, and living is considered worse than death" and served as the leader of the civilian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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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병일기』와 『행군수지』'''===
 
==='''『향병일기』와 『행군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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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향병일기와행군수지.jpg|향병일기와 행군수지([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80600190001 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
 
파일:향병일기와행군수지.jpg|향병일기와 행군수지([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80600190001 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
파일:향병일기2.jpg|향병일기([https://blog.naver.com/il0202/220905419921 오늘(il0202)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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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향병일기.jpg|향병일기([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418985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체육관광부])
파일:향병일기7.jpg|향병일기([https://blog.naver.com/il0202/220905419921 오늘(il0202)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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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산집의김해저서.jpg|대산집 제49권<ref>대산집 제 49권 행장(行狀)의 예문관 검열 증 홍문관 수찬 근시재 김 선생 행장(贈弘文館修撰近始齋金先生行狀)</ref>에 기술된 김해의 저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531A_A227_453L_IMG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파일:향병일기4.jpg|향병일기([https://blog.naver.com/il0202/220905419921 오늘(il0202)의 블로그])
 
파일:향병일기5.jpg|향병일기([https://blog.naver.com/il0202/220905419921 오늘(il0202)의 블로그])
 
파일:향병일기6.jpg|향병일기([https://blog.naver.com/il0202/220905419921 오늘(il0202)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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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병일기(鄕兵日記)』는 서문과 발문 없이 1592년 4월 14일 왜적에 의한 동래성 침공 소식으로부터 그 다음해인 1593년 6월 19일 계림전투까지의 의병 활동 경과를 날짜 별로 기록하고 있다. 즉, 김해가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1593년 왜군에게 포위되어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장렬히 순국하기 바로 직전까지의 전투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향병일기』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83호에 지정되어 있다.
 
『향병일기(鄕兵日記)』는 서문과 발문 없이 1592년 4월 14일 왜적에 의한 동래성 침공 소식으로부터 그 다음해인 1593년 6월 19일 계림전투까지의 의병 활동 경과를 날짜 별로 기록하고 있다. 즉, 김해가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1593년 왜군에게 포위되어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장렬히 순국하기 바로 직전까지의 전투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향병일기』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83호에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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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북부 지역의 의병장으로서 여러 고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예천, 용궁, 함창 등지 등지에서 벌인 왜군과의 전투 과정과 각종 내역 뿐 아니라 임진왜란 초기 영남 북부 지방의 의병 활동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영남 북부 지역의 의병장으로서 여러 고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예천, 용궁, 함창 등지 등지에서 벌인 왜군과의 전투 과정과 각종 내역 뿐 아니라 임진왜란 초기 영남 북부 지방의 의병 활동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행군수지(行軍須知)』는 부대 지휘관의 정신자세를 논하고 군령을 세우는 방법과 병사를 선발하는 요령, 군마를 얻는 법, 보급문제, 부대훈령 등에 걸쳐서 차례로 기술 했다. 또한 진을 치는 법, 성을 지키는 요령, 간첩 색출, 항복을 받는 요령 등을 차례로 밝혀서 부대 지휘관이 반드시 읽고 익혀야 할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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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수지(行軍須知)』는 부대 지휘관으로의 장군의 도리를 논하고 금령을 세우는 방법과 병사와 병마를 선발하는 요령, 군량 보급, 무예 강습 등에 대하여 기술했다. 믿음과 사랑으로 인심을 단단히 결속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또한 진을 치는 법, 성을 지키는 요령, 간첩 색출, 항복을 받는 요령 등을 차례로 밝혀서 부대 지휘관이 반드시 읽고 익혀야 할 책이었다.
  
『향병일기』와 『행군수지』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처한 군자의 의식과 대응 자세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 의병사를 고찰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기록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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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병일기』와 『행군수지』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처한 군자의 의식과 대응 자세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 의병사를 고찰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기록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상정의 문집인 대산집(大山集)에 따르면 김해는 이외에도 『서행일기(西行日記)』등을 저술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서 전해지지 않는다.
  
==='''군자의 구국정신을 일깨운 김성일의 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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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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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angbyeong diary'' and ''Haengkunsuzi''
파일:김성일격문.jpg|김성일 문집인 『학봉집』제3권 초유문[招諭文]의 격문([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040_040_0010_2004_001_X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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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angbyeong diary records the battle situation in the form of a diary from the day Kim Hae heard the news of the invasion of the Japanese enemy in 1592 until just before he was martyred in the camp of Gyeongju, 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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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1592년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답하길,“섬 오랑캐가 창궐(猖獗)하여 임금이 피난가자 신민(臣民)들이 매우 애통하여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여기 궁벽한 고장에는 필묵(筆墨)만 일삼고 궁마(弓馬)는 익히지 못하여 빈주먹만 불끈 쥐고 있으니, 자신을 구제하기에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충의(忠義)의 근성으로 복수의 뜻이 간절하여 천지에 맹세하고 왜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펼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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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recorded in detail the battle process and various details of the battles with the Japanese army, as well as the civilian army activities.
  
<big>''김성일은 왜 격문을 썼을까''</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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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ngkunsuzi'' discusses the mental attitude of the unit commander, and describes in turn, methods of establishing military command, selecting soldiers, obtaining horses, solving supply problems, and commanding the unit. It was also a book that unit commanders must read and learn by revealing how to set up a camp, how to protect a castle, how to search for spies, and how to receive surrender.
  
김성일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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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angbyeong diary'' and ''Haengkunsuzi'' can not only give a glimpse of the consciousness and attitude of Confucian scholar facing the national crisis of the Japanese invasions(1592-1598), but also examine the history of local civilian army.
  
 
==='''『향병일기』에 저술된 무기'''===
 
==='''『향병일기』에 저술된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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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비격진천뢰.jpg|비격진천뢰([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1108600000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파일:비격진천뢰.jpg|비격진천뢰([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1108600000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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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향병일기무기.png|향병일기에 쓰인 비격진천뢰([http://archive.history.go.kr/image/viewer.do?system_id=000000694023 전자사료관,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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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향병일기무기2.png|향병일기에 쓰인 비격진천뢰([http://archive.history.go.kr/image/viewer.do?system_id=000000694023 전자사료관,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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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승정원비격.jpg|승정원일기에 쓰인 비격진천뢰([https://kyudb.snu.ac.kr/ImageServlet.do?path=/data01/stream/SJW/IMG/GK12792_00/GK12792_00_0038/GK12792_00_IH_0038_037b.jpg 승정원일기,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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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선조실록무기.png|선조수정실록에 쓰인 비격진천뢰([http://sillok.history.go.kr/popup/viewer.do?id=WNB_12509001_009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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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병일기』에는 그가 1593년 2월 24일 반암의 야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전진천뢰를 운용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왜적을 토벌하는 방책으로 비격진천뢰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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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병일기』에는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는 비격진천뢰만한 것이 없으며,<ref>향병일기 1593년 2월 9일</ref> 1593년 2월 24일에는 반암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격진천뢰를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되어있다.
  
 
이 ‘비격진천뢰(飛格震天雷)’는 ‘날아올라 적을 치니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하여 이름이 붙은 인마살상용 시한폭탄의 일종로 선조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것이다.
 
이 ‘비격진천뢰(飛格震天雷)’는 ‘날아올라 적을 치니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하여 이름이 붙은 인마살상용 시한폭탄의 일종로 선조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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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임진왜란의 비밀병기''</big>
 
<big>''임진왜란의 비밀병기''</big>
  
비격진천뢰는 강력한 살상력을 갖고있어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탈환전, 진주성·남원성 싸움 등 실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는 기록들이 전해지며, 갑자기 날아와서 큰 소리를 내며 터지는 이 무기에 왜군이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감은 대단하였으며 왜적들은 이 무기를 가장 무서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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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격진천뢰는 강력한 살상력을 갖고있어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탈환전, 진주성·남원성 싸움 등 실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는 기록들이 전해진다. 갑자기 날아와서 큰 소리를 내며 터지는 이 무기에 왜군이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감은 대단하였으며, 승정원일기에는 왜적들이 신기(神器)라고 하면서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ref>승정원일기 고종 35년 11월 20일</ref>  
{{인용문|중앙
 
|내용= 비격진천뢰는 군기시의 화포장 이장손이 만든 무기다. 진천뢰를 대완구(대포)에 넣어 쏘면 500~600보를 날아가 땅에 떨어져 한참 있으면 불이 그 안에서 일어나 터진다. 왜적들은 이 무기를 가장 무서워했다
 
|출처= 유성룡,<징비록>}}
 
  
특히 박진이 경주성을 탈환한 승전의 전투에서 사용한 비격진천뢰에 대해서 한국와 일본 모두의 기록이 있다. 우리의‘선조수정실록’에는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울산)로 도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ref>‘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 9월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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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박진이 경주성을 탈환한 승전의 전투에서 사용한 비격진천뢰에 대해서 우리나라(『선조수정실록』)와 일본(『정한위략』) 모두의 기록이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이 비격진천뢰를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측 기록인 <정한위략>에서는“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 기이하고 놀라서 서생포로 돌아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일본이 이 무기를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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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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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중략)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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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선조수정실록><ref>‘선조수정실록 제26권’ 선조 25년(1592) 9월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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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 기이하고 놀라서 서생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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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한위략><ref>임진왜란에 대해 기록한 일본의 사료</ref>}}
  
 
일본의 병기전문가인 아리마 세이호(有馬成甫)는 『조선역 수군사』에서 “비격진천뢰의 발화장치는 매우 교묘한 것으로 그것은 화공술로서의 획기적인 일대 진보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의 병기전문가인 아리마 세이호(有馬成甫)는 『조선역 수군사』에서 “비격진천뢰의 발화장치는 매우 교묘한 것으로 그것은 화공술로서의 획기적인 일대 진보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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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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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eapons written in ''Hyangbyeong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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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Hyangbyeong diary'', it is recorded that “This is the best way to defeat the Japanese enemy.” and on February 24, 1593, "the victory was achieved using the Bigyeokjincheonroe against the Japanese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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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at is Bigyeokjincheonr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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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yeokjincheonroe is a type of bomb for killing human beings, so named because it makes a sound that vibrates the sky when it explodes. It was invented by Lee Jang-son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jo and was us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1592-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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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y documents from Korea and Japan mention the Bigyeokjincheonroe, which suddenly flies and explodes with a loud sound, which has a powerful leth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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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ho Arima, a Japanese weapons expert, said in ''JoseonyeokSugunsa'', “The igniting device of the Bigyeokjincheonroe is very clever, and it can be said that it is a groundbreaking advance in chemical engineering.”
  
 
==='''『향병일기』, 가학(家學)이 되다'''===
 
==='''『향병일기』, 가학(家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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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4대에 걸쳐 약 120년간 총 39권의 일기를 기록했는데, 이 일기들에는 손님을 접객하거나 취미활동과 같은 일상생활, 관혼상제와 같은 가정의례 뿐 아니라 농사·노비·토지경영 등의 경제활동, 수령 및 아전 등의 관리 접촉이나 부세와 환곡, 지방정책과 같은 지방통치 관계, 질병 치료와 식생활 등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생생한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이나 당쟁 등 대내외적 격동기 사회를 살아가는 재지사족의 일상과 고민이 담겨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즉 4대에 걸쳐 약 120년간 총 39권의 일기를 기록했는데, 이 일기들에는 손님을 접객하거나 취미활동과 같은 일상생활, 관혼상제와 같은 가정의례 뿐 아니라 농사·노비·토지경영 등의 경제활동, 수령 및 아전 등의 관리 접촉이나 부세와 환곡, 지방정책과 같은 지방통치 관계, 질병 치료와 식생활 등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생생한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이나 당쟁 등 대내외적 격동기 사회를 살아가는 재지사족의 일상과 고민이 담겨 있어 그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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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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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angbyeong diary'', becoming a Family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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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ing with the writing of Hyangbyeong diary while Kim Hae, after that his son Kim Gwang-gye (1580-1646), who served as a civilian army during the time of Manchu invasions and second Manchu invasions, wrote a Diary for 28 years. And Kim Hae’s grandson Kim Yeom(1612–1659) wrote three books of a Diary for 5 years. Also, Kim Hae’s his great-grandson Kim Soon-Eui(1645-1714) wrote a Diary for 42 years. In addition, Kim Hae 's Lineage, Kim Ryeong(1577-1641) wrote a Diary for 39 years, and Kim Yeom 's younger brother Kim Yeom (1615-1670) wrote a Diary for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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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other words, he recorded a total of 39 diaries for about 120 years over four generations. These diaries included not only daily life such as but also economic activities such as farming, slavery, and land management. It records in detail the society, economy, and culture of Korea at the time, so you can know the vivid life of early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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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ddition, it contains the daily lives and worries of the local residents living in a turbulent society, both internally and externally, such as invasion and party conflicts.
  
 
=='''미디어 자료'''==
 
=='''미디어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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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조선시대 최악의 탐관오리는?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북스크린,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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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년 전의 오늘, 김령의 계암일록 (오래된 약속, 안동 MBC,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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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2021년 6월 23일 (수) 03:53 기준 최신판

영문 초안

개요

입향조와 함께 제향된 김해는 누구인가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후조당 종택에 부속된 재사(齋舍, 제사 지내는 집)와 광산 김씨 중 오천리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김효로(金孝盧,1445∼1534)와 증손자 김해(金垓,1555∼1593)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광산김씨 사당은 안동 예안 오천리 입향조인 김효로를 제향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김해가 임진왜란 시 영남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여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안동 광산김씨는 수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음에도 입향조가 모셔진 신성한 사당에 함께 불천위로 모셔진 인물인 김해와 그의 대표적인 저술서 『향병일기』는 무엇일까.

이것들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나라의 환란에 칼을 뽑아드는 진정한 군자, 김해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김해는 누구인가

세상이 평화로우면 도학에 전념하는 것이 군자이다. 그러나 나라에 변란이 있으면 칼을 집고 일어서서 구국의 길을 걷는 것이 군자이다.

이것은 가히 김해를 두고 할 수 있는 말이다.

김해는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원권지정자와 예문관검열을 지낸 문신 관료였다.

고향에서 지내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는 안동지방과 영남 북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진중일기인 『향병일기』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난중잡록(亂中雜錄)[1]에는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고,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썼다고 되어있다.[2]

영문

  • Kim Hae who was enshrined with the first to step foot

Ritual House and Shrine of the Gwangsan Kim Clan, is designated as Heritage, consists of the Ritual House attached to the Hujodang Head House and the shrine of Kim Hyo-ro (1445-1534) and his great-grandson, Kim Hae (1555-1592).

Originally, the shrine was built to commemorate Kim Hyo-ro, who was the first to step foot in Ocheon-ri, Yean-ri, Andong. However, after Kim hae's passing away while serving as leader of civilian army in the Japanese invasions(1592-1598), Kimhae was enshrined together.

Among many great men of the Andong Gwangsan Kim clan, I would like to find out about Kim Hae, who was enshrined with Kim Hyo-ro.

  • Who is Kim Hae?

" If the world is at peace, a gentleman should devote himself to his studies. However, when there is a hardship in the country, a gentleman must pick up his sword and stand up." This is truly something that can be said about Kim Hae.

Kim Ha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When the Japanese invasions(1592-1598) broke out while he was living in his hometown, Kim Hae served as leader of civilian army. And he wrote Hyangbyeong diary that recorded the battle situation in detail, and Haengkunsuzi, a guide book for unit commanders.

내용

군자의 구국정신을 일깨운 김성일의 격문

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1592년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으며, 이를 통해 군사적 환경이 열세임에도 나라를 걱정하며 적에 대해 분개하여 의병대장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국운이 막혀 오랑캐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종묘사직이 병화(兵火)에 휩싸이고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니, 백성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지가 오래입니다. 누추하고 협소한 지방이라서 예전에도 이 지역 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유학만을 숭상했을 뿐 무예를 익히지 않았습니다. (중략)
의병을 불러 모으니 모두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활을 잡아 본 사람은 열에 한둘도 되지 않아 떨쳐 일어나 진격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만, 요해처에 복병을 설치할 수는 있으니, 격분한 마음을 떨쳐 임금을 위해 죽고자 하는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군대는 근본이 갖춰지지 않았고, 통솔하는 자의 재주가 부족하여 병세(兵勢)가 열악합니다. 게다가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병기는 탕진되어 모두가 나무를 잘라 만든 병기를 쥐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거사를 한다면 뜻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충의로운 마음이 천성으로부터 나오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도리도 예전에 대략이나마 익혔습니다. 불끈 마음을 먹고 저 더러운 오랑캐를 소탕하고자 하며, 하늘에 맹세컨대 이 도적들과는 세상을 함께하지 않을 것입니다."

- 김해,<근시재집>


김성일은 왜 격문을 썼을까

1589년 각 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 김성일은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은“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3]

1592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성일은 격문을 작성하였다.

영문

  • Manifesto that awakened the his spirit of national salvation

Kim Seong-il(1538-1593) from Andong went down to Gyeongsang-do to check the situation of the Japanese invasions. He wrote a manifesto of concern for the country and sent it to various regions, and many people were moved by this and joined civilian army.

It was in this context that Kim Hae became a civilian army. Despite the inferior military environment, Kim Hae answered Kim Seong-il's manifesto, "When the king fled from the outbreak of barbarians from the island, the people mourned very much, and living is considered worse than death" and served as the leader of the civilian army.

『향병일기』와 『행군수지』

『향병일기(鄕兵日記)』는 서문과 발문 없이 1592년 4월 14일 왜적에 의한 동래성 침공 소식으로부터 그 다음해인 1593년 6월 19일 계림전투까지의 의병 활동 경과를 날짜 별로 기록하고 있다. 즉, 김해가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1593년 왜군에게 포위되어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장렬히 순국하기 바로 직전까지의 전투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향병일기』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83호에 지정되어 있다.

영남 북부 지역의 의병장으로서 여러 고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예천, 용궁, 함창 등지 등지에서 벌인 왜군과의 전투 과정과 각종 내역 뿐 아니라 임진왜란 초기 영남 북부 지방의 의병 활동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행군수지(行軍須知)』는 부대 지휘관으로의 장군의 도리를 논하고 금령을 세우는 방법과 병사와 병마를 선발하는 요령, 군량 보급, 무예 강습 등에 대하여 기술했다. 믿음과 사랑으로 인심을 단단히 결속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또한 진을 치는 법, 성을 지키는 요령, 간첩 색출, 항복을 받는 요령 등을 차례로 밝혀서 부대 지휘관이 반드시 읽고 익혀야 할 책이었다.

『향병일기』와 『행군수지』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처한 군자의 의식과 대응 자세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 의병사를 고찰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기록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상정의 문집인 대산집(大山集)에 따르면 김해는 이외에도 『서행일기(西行日記)』등을 저술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서 전해지지 않는다.

영문

  • Hyangbyeong diary and Haengkunsuzi

Hyangbyeong diary records the battle situation in the form of a diary from the day Kim Hae heard the news of the invasion of the Japanese enemy in 1592 until just before he was martyred in the camp of Gyeongju, 1593.

He recorded in detail the battle process and various details of the battles with the Japanese army, as well as the civilian army activities.

Haengkunsuzi discusses the mental attitude of the unit commander, and describes in turn, methods of establishing military command, selecting soldiers, obtaining horses, solving supply problems, and commanding the unit. It was also a book that unit commanders must read and learn by revealing how to set up a camp, how to protect a castle, how to search for spies, and how to receive surrender.

Hyangbyeong diary and Haengkunsuzi can not only give a glimpse of the consciousness and attitude of Confucian scholar facing the national crisis of the Japanese invasions(1592-1598), but also examine the history of local civilian army.

『향병일기』에 저술된 무기

『향병일기』에는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는 비격진천뢰만한 것이 없으며,[5] 1593년 2월 24일에는 반암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격진천뢰를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되어있다.

이 ‘비격진천뢰(飛格震天雷)’는 ‘날아올라 적을 치니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하여 이름이 붙은 인마살상용 시한폭탄의 일종로 선조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것이다.

비격진천뢰는 내부에 화약과 빙철(憑鐵) 등을 장전하여 완구(碗口)라는 화포에 의하여 목표물에 발사하는 무기로, 발사 후 표적지에 날아간 뒤 시간이 지나서 터지는 일종의 작렬 시한폭탄으로 분류된다. 섬광, 굉음과 함께 수많은 철파편을 사방에 흩날리는게 특징이다.

그 시대 다른 포탄들은 발사되어 성벽이나 시설물을 우선 파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비격진천뢰는 날아간 뒤 적병들 사이에서 폭발하는 인마살상용 무기라는 점이 다르다.

임진왜란의 비밀병기

비격진천뢰는 강력한 살상력을 갖고있어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탈환전, 진주성·남원성 싸움 등 실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는 기록들이 전해진다. 갑자기 날아와서 큰 소리를 내며 터지는 이 무기에 왜군이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감은 대단하였으며, 승정원일기에는 왜적들이 신기(神器)라고 하면서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6]

특히 박진이 경주성을 탈환한 승전의 전투에서 사용한 비격진천뢰에 대해서 우리나라(『선조수정실록』)와 일본(『정한위략』) 모두의 기록이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이 비격진천뢰를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중략)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하였다"

- <선조수정실록>[7]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 기이하고 놀라서 서생포로 돌아왔다."

- <정한위략>[8]


일본의 병기전문가인 아리마 세이호(有馬成甫)는 『조선역 수군사』에서 “비격진천뢰의 발화장치는 매우 교묘한 것으로 그것은 화공술로서의 획기적인 일대 진보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영문

  • Weapons written in Hyangbyeong diary

In Hyangbyeong diary, it is recorded that “This is the best way to defeat the Japanese enemy.” and on February 24, 1593, "the victory was achieved using the Bigyeokjincheonroe against the Japanese army."

  • What is Bigyeokjincheonroe?

Bigyeokjincheonroe is a type of bomb for killing human beings, so named because it makes a sound that vibrates the sky when it explodes. It was invented by Lee Jang-son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jo and was us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1592-1598).

Many documents from Korea and Japan mention the Bigyeokjincheonroe, which suddenly flies and explodes with a loud sound, which has a powerful lethality.

Seiho Arima, a Japanese weapons expert, said in JoseonyeokSugunsa, “The igniting device of the Bigyeokjincheonroe is very clever, and it can be said that it is a groundbreaking advance in chemical engineering.”

『향병일기』, 가학(家學)이 되다

김해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면서 『향병일기』를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한 그의 아들 김광계(金光繼,1580~1646)가 28년간 매원일기 18책을, 손자 김염(1612~1659)이 5년간 묵재일기 3책을, 증손자 김순의(金純義,1645~1714)가 42년간 과헌일기 6책을 대대로 기록했다. 또한 김해의 종형제인 김령(金坽,1577~1641)이 39년간 계암일록 8책을, 김염의 동생인 김선(1615~1670)이 3년간 여온일기 2책을 썼다.


즉 4대에 걸쳐 약 120년간 총 39권의 일기를 기록했는데, 이 일기들에는 손님을 접객하거나 취미활동과 같은 일상생활, 관혼상제와 같은 가정의례 뿐 아니라 농사·노비·토지경영 등의 경제활동, 수령 및 아전 등의 관리 접촉이나 부세와 환곡, 지방정책과 같은 지방통치 관계, 질병 치료와 식생활 등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생생한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이나 당쟁 등 대내외적 격동기 사회를 살아가는 재지사족의 일상과 고민이 담겨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영문

  • Hyangbyeong diary, becoming a Family studies

Starting with the writing of Hyangbyeong diary while Kim Hae, after that his son Kim Gwang-gye (1580-1646), who served as a civilian army during the time of Manchu invasions and second Manchu invasions, wrote a Diary for 28 years. And Kim Hae’s grandson Kim Yeom(1612–1659) wrote three books of a Diary for 5 years. Also, Kim Hae’s his great-grandson Kim Soon-Eui(1645-1714) wrote a Diary for 42 years. In addition, Kim Hae 's Lineage, Kim Ryeong(1577-1641) wrote a Diary for 39 years, and Kim Yeom 's younger brother Kim Yeom (1615-1670) wrote a Diary for 3 years.

In other words, he recorded a total of 39 diaries for about 120 years over four generations. These diaries included not only daily life such as but also economic activities such as farming, slavery, and land management. It records in detail the society, economy, and culture of Korea at the time, so you can know the vivid life of early Joseon Dynasty.

In addition, it contains the daily lives and worries of the local residents living in a turbulent society, both internally and externally, such as invasion and party conflicts.

미디어 자료

  • ‘4대 120년’ 일기…사대부 고민·반성 ‘절절’(KBS News,2016)

  •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조선시대 최악의 탐관오리는?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북스크린, 2015)

  • 400년 전의 오늘, 김령의 계암일록 (오래된 약속, 안동 MBC,2018)

지식 관계망



주석

  1. 임진왜란 시 남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이 쓴 야사집으로 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차례의 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2. 亂中雜錄[二] 壬辰下
  3. 국조보감 제30권 선조 24년(1591)
  4. 대산집 제 49권 행장(行狀)의 예문관 검열 증 홍문관 수찬 근시재 김 선생 행장(贈弘文館修撰近始齋金先生行狀)
  5. 향병일기 1593년 2월 9일
  6. 승정원일기 고종 35년 11월 20일
  7. ‘선조수정실록 제26권’ 선조 25년(1592) 9월1일
  8. 임진왜란에 대해 기록한 일본의 사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