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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2일 (화) 21:24 판
김구(金九) | |
대표명칭 |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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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金九 |
생몰년 | 1876년-1949년 |
본관 | 안동 |
호 | 백범 |
시대 | 근대 |
대표직함 | 임시정부 주석 |
대표경력 | 상해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중경 임시정부 주석 비상 국민회의 부총재 |
상훈 | 건국공로훈장 중장(1962) |
능묘 | 효창공원 |
생가 | 황해도 해주 |
성격 | 독립운동가 |
목차
정의
김구(金九,1876~1949)는 상해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중경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업적 요약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1·8 이봉창 의거(사쿠라다문 의거)와 4·29 윤봉길 의거(훙커우 의거)를 주도하고, 한국 광복군 조직 및 신탁통치반대 등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이다.
“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 김구, 백범일지 민족국가 편 중
생애
상세내용
일본인을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다
1895년은 일제가 궁궐을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등으로 한민족의 분노가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된 상황이었다. 김구는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였고, 집에서 은신 중 체포되어 수감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졌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이후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었다.
교육 구국운동에 진력하다
이후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하는 등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진남포 예수교 교회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함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의 총감으로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우고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등 교육 구국운동에 힘썼다.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1908년 비밀 항일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맹렬히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1909년 안중근의 거사(이토 포살 의거)에 연루되어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5년간 옥고를 치뤘다. 김구는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는 천한 백정(白)과 무식한 범부(凡)까지 전부가 적어도 자신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임시정부 활동에 뛰어들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직후 상해로 망명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30년에는 이동녕·이시영(李始榮)·차리석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도모한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고, 몸을 나라에 바칠 애국투사를 선정하여 적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거나 중요기관을 파괴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한인애국단의 1932년 1·8 이봉창 의거(사쿠라다문 의거)와 4·29 윤봉길 의거(훙커우 의거)를 주도하였다.
또한 1933년 중국 주석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의 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하였고, 이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대일항전에 준비하다
1940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국사특파단을 섬서성에 상주하게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주력하였다.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또한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여 대일항전에 진력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어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미 육군 전략처와의 합의를 체결하여 서안[西安] 등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광복 후에도 자주독립의 염원을 멈추지 않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힘썼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의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반대하며,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1948년 4월 19일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이후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하던 가운데,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생가지와 추모
김구는 황해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1949년 6월 26일 서거, 7월 5일 효창원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백범 김구 (KBS역사저널 그날,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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