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양동교회(木浦陽洞敎會, 1898~ )는 1898년 5월 15일 미국 남장로교 유진벨 선교사가 한국인 조사 변창연과 함께 협력하여 설립한 목포와 전라남도의 최초 교회이다. 초기 오웬과 스트래퍼 선교사가 합류하여 교회와 지역 선교를 시작하였으며, 1900년 유진벨과 오웬으로 첫 당회를 구성하고 그해 여름엔 첫 성례전을 치렀다. 양동교회 초창기 세례자요 교인으로는 지원근, 마서규, 노학주, 김만실, 김현수, 임성옥, 김치도, 김윤수 등이었다. 목포양동교회는 유진벨(1,4대) 목사에 이어 오웬(2대), 레이놀즈(3대), 프레스톤(5대), 해리슨(6대) 선교사가 담임목회하였으며, 1909년 윤식명 목사가 7대 담임이며 동시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시무하였다. 이후 담임 사역자 가운데는 일제말기 순교한 박연세 목사, 해방정국과 이후 전라남도 교회를 지도하였던 이남규 목사 등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평신도 대표라 할 장로는 1906년 임성옥을 최초로 장립하였으며, 이후 유내춘, 곽우영 등이 이었다. 예배당 건물은 당시 양동 127번지 864평 대지위에 106평짜리 600명 수용가능한 정방형 석조 건물로 지었는데, 정문 출입문과 함께 좌우에도 출입문이 있는 게 특징이다. 왼쪽 출입문 위에는 '대한융희4년'이라는 대한제국 연호와 태극기 문양이, 오른쪽 출입문 위에는 '주강생일천구백십년'이라는 문양이 각각 새겨져 있다. 건축 당시에는 1910년 완공을 목표로 하였는데, 실제는 해를 넘겨 1911년에 공사를 마쳤고, 헌당하였다. 양동교회 예배당 건물은 국가등록문화재 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목포양동교회는 교회가 부훙하고 성장하여 분립도 여럿 하였으니, 1911년 구정교회(무안군 일로면)를 시작으로 1914년 온금동교회(경동교회, 2001년 영암군 삼호면으로 이전), 1923년 목포중앙교회(2007년 옥암동으로 이전), 1927년 죽교리교회(우리예닮교회, 석현동으로 이전), 1928년 연동교회(상동으로 이전), 1934년 서부교회(새서부교회) 등이 현재까지도 각기 활동하고 있다. 목포양동교회는 1919년 3,1운동 당시 정명여학교와 함께 목포 4.8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일제 말기 신사참배와 교회 통폐합과정에서 갖은 수난을 겪으며 박연세 목사 등 교회 일군들이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해방이후 이남규 목사 등에 의해 교회가 회복되고 목포 일대의 교회도 재건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한국의 장로교단 분열과 함께 목포연동교회도 갈라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목포양동교회는 기독교장로회 소속으로 남고 여기서 나온 성도들이 따로 목포양동제일교회(예수교장로회 통합)와 목포새한교회(예수교장로회 합동)로 각기 나뉘어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포와 전라남도의 어머니교회인 목포양동교회는 120년을 훨씬 넘는 역사 속에 2021년 현재 목포에만도 400여개 넘는 교회가 생겼으며, 전라남도 일대에도 숱한 기독교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