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Heritage:J36-0021-0000

mok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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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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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kpo Si - sa
Jeollanam-do Momument No. 121
Area : Jeollanam - do Mokpo - si Jukgyo-dong

Mokposisa, built in 1890, is a wooden house with tiled roofs and it was designated to the Local Cultural Properties, No. 121, in 1976. It has four compartments on the front facade, and one and half compartments on each side. It also has a Paljak jibung, a style of roof with an angled rafter set on each corner of the eaves. Originally the right and left sides and the center of the backside were made of brick. However, in 1979 and in 1984, the bricks were removed and the roof was repaired. This building was dismantled and restored in 1995.

This place was founded in 1890 and originally called Yusanjeong by Ha Jeong and Yeo Gyn Hyang. A Literary writing contest was held in this place, and they gave lessons on poetry and prose. In 1920, Mu Jeong : Jeong Man Jo renamed it Yusansa. Then he repaired it in 1932 and started Mokposisa here in 1937

Mokposisa was a cultural organization of Confucian scholars more concerned about sharing the grief of the national ruin and patriotic sentiment than simply meeting to discuss poetry or calligraphy. According to the rules, whoever had a desire to study poetry could enter Mokposisa, but immoral or unethical men were prohibited from entering.

Jeong Man Jo reintroduced Confucian academic traditions. When the Empress Myeong seong was assassinated in 1896, he was exiled to Jindo because of Lee Wan Yong's false testimony. For 12 years in jindo, he educated the younger generations and wrote. It was said he made their pennames to his disciples like Uije : Heo Baek Ryeon and Namnong : Heo Geon.

Mokposisa is the only poetry office that preserves Chinese poetry, done by the essay contest that is still held with Confucian scholars every spring and fall. It has preserved winning works from essay contests: draft poems as well as the Collected Works of Mu 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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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kposisa Writer’s House
Jeollanam-do Monument No. 21

Poets Society is a gathering of classical scholars who sang praise of nature and recited poems according to the seasons. Mokpo Poets Society was not just a gathering of literary scholars, but also served as a literary association of Confucian scholars who expressed the deep sorrow and patriotism of the country.

Mokpo Poets Society is Korea’s representative poets society that has continued the tradition Chinese poetry. Mokpo Poets Society started from ‘Yusan Poets Society’ which was formed in 1920. The foundation of Yusan Poets Society was led by Kim Seong-gyu, who served as supervisor in Muan, and was participated by Mokpo Confucian scholars and literary scholars from Jindo and Gangjin. In 1933, the current Poets Society building, Yusanjeong, was completed. In 1961, it was renamed as Mokpo Poets Society by integrating with another Poets Society.’Boin Poets Society’, which was active in Mokpo. Mokpo Poets Society served as the spiritual pillar of Mokpo because there was no Hyanggyo or Seowon in Mokpo. Anyone who had an interest in poetry could join the society, but those who acted against ethics were not allowed to join.

Even now, Chinese poem contest is held here every spring and autumn as the only poets society in Korea that has continued the tradition of Chinese poetry. It preserves the anthology of Mujeong, the records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manuscripts of literary figures who won the poem contests held since its founding.

The building of Mokpo Poets Society is composed of four bays in the front, and one and a half bays in the side, and its roof has a gambrel shape when seen from the side.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해설문 - 영문

  • 국가지정문화재가 아니라 해당 사항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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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사 木浦詩社
전라남도기념물 제121호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목포시사는 1890년 건립된 지방문화재 제 121호인 목조기와로 된 집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4칸, 측면1칸 반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일단의 다듬은 돌기단 위에 정평의 주초를 놓고 민흘림의 원주를 세웠다. 이 건물은 본래 좌우로 후면의 중방이 벽돌로 된 것을 1979년과 1984년 2회에 걸쳐 벽돌을 제거하고 옥개부 보수하였으며 1995년 완전 해체 복원하였다.

이곳은 본래 1890년에 하정, 여규향 등이 건립하여 유산정이라 부르며 문인들에게 시문을 가르치고 백일장 등을 주도하던곳으로, 1920년에 무정 정만조 선생이 채 확장하여 유산사로 개칭하고, 1932년에 중수하였으며, 1937년 목포시사로 개명되어 현재에 이르고있다.

목포시사는 시인묵객들의 단순한 모임을 넘어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을 토론하는 유림의 문학결사단체이기도 했다. 목포시사의 규약에는 시에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입사할 수 있으나, 윤리에 어긋난 패덕자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특히 구한말의 유학자 정만조 선생은 이 곳에 머물며 퇴폐한 유풍을 바로잡고 학풍을 진작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선생은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때 이완용의 모함으로 진도에 유배되어 12년간 후진교육과 문학활동을 하였으며, 의제 허백련과 남농 허건 등은 선생의 문하생으로 이들의 호 도 선생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매년 봄, 가을이면 전국 유생들이 이곳에 모아 한시 백일장을 개최하는 시사로서 현재까지 한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무정의 문집을 비롯하여 구한말의 전적과 창사이래 개최된 백일장에서 입선작 및 문인들의 시고가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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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사
木浦詩社
전라남도 기념물 제21호

시사(詩社)는 뜻이 서로 통하는 선비들이 모여서 계절에 따라 자연을 노래하고 시를 읊던 모임이다.

목포 시사는 문인들의 단순한 모임을 넘어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유림의 문학 결사 단체로도 활동하였다. 목포 시사는 한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사이며 1920년에 결성한 ‘유산 시사(儒山 詩社)’에서 출발하였다. 유산 시사의 창립은 무안 감리를 지낸 김성규가 주도하였고, 목포 유림들과 진도・ 강진 지역의 문인들이 참여하였다. 1933년에 현 시사 건물인 유산정(儒山亭)을 완공하였다.

1961년에 목포 지역에서 활동하던 또 다른 시사인 ‘보인 시사(輔仁 詩社)’ 와 통합하여 목포시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목포에는 향교나 서원이 없었기 때문에 목포 시사가 목포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시에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입사할 수 있으나,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들어올 수 없다.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이곳에서 한시 백일장을 개최하는데 한시의 명맥을 이어온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시사이다. 무정 문집과 구한말의 전적, 창사 이래 개최한 백일장의 입선 작품 문인들의 원고를 모두 보존하고 있다.

목포시사의 건물은 앞면 4칸・옆면 1칸 반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에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해설문 - 국문

목포시사 (木浦詩社)
분 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수량/면적 : 일원
지정(등록)일 : 1976.09.30
소 재 지 : 전남 목포시 유달로 165 (죽교동)
소유자(소유단체) :
관리자(관리단체) : 목포시

시사는 서로 뜻이 통하는 문학에 뛰어난 선비들이 계절에 따라 자연과 시를 융화시켰던 풍류의 장소이다. 목포시사는 한말의 대학자인 정만조가 1907년에 세운 건물로 전국 각처에서 200여명이 해마다 봄, 가을 2회에 걸쳐 백일장을 개최하여 한시(漢詩)의 명맥을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유래 깊은 시사이다.

정만조는 고종 26년(1889)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 승지를 거쳐 내부참의, 규장각부제학 등을 지냈다. 광무년간 정변시 진도에 유배되어 10여년 간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당시 문학, 서예 등을 가르쳐 많은 인사를 배출하였고, 목포시사를 세워 퇴폐한 학문의 기풍을 바로잡아 지방 문화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건물 규모는 앞면 4칸·옆면 1칸 반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시사 안에는 정만조의 문집을 비롯하여 한말의 전적, 한시 현판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문화유적총람

목포시사는 한말 대학자인 정만조가 1907년에 창건한 건물로서 전국 명승에서 200여 명이 매년 춘.추로 2회에 걸쳐 백일장을 개최하여 한시의 명맥을 오늘에까지 전수해 온 국내 유일의 시사이다. 건물의 모습을 보면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팔작지붕이다. 1단의 다듬은 돌 기단 위에 편평한 주초를 놓고 민흘림의 원주를 세웠다. 1980년 여규향, 허석제, 박만취 선생이 유달산에 유달정을 건립하여 이 고장 문인들에게 시문을 가르치고 백일장과 같은 문학 모임을 주도하였다. 목포시사의 규약에는 시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입사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으며 윤리에 어긋난 패덕자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매년 봄(3월)과 가을(9월)에 한시(漢詩)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보유 유물로는 <<무정전교(戊亭全橋)>>, <<무정보유편(戊亭補遺編)>>, <<사문유취(事文類聚)>>등 70책이 있다.

목포문화관광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 시도기념물 제21호 / 목포시사 (木浦詩社)
분 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역사사건/역사사건
수량/면적 : 317
지정(등록)일 : 1976.09.30
소 재 지 : 전남 목포시 유달로 165 (죽교동)
시 대 : 조선시대
관리자(관리단체) :목포시


국내 유일의 시사(詩社), 목포시사

유달산 정문에서 조각공원 쪽으로 약 2km 거리에 위치한다. 이곳은 본래 1890년에 하정 여규형(呂圭亨, 1849~1922) 등이 건립하여 유산정이라 부르며 문인들에게 시문을 가르치고 백일장 등을 주도하던 곳으로, 1920년에 무정 정만조(鄭萬朝, 1858~1936)가 재확장하여 유산사로 개명하고, 1932년에 중수하였으며, 1937년 목포시사를 발족하였다.

시사(詩社)란 문사들이 서로 시문을 독려하고 자연과 시를 노래했던 풍류의 장소로, 목포시사는 시인묵객들의 단순한 모임을 넘어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유림의 문학결사단체였다. 특히 한말의 유학자 정만조는 이곳에 머물며 퇴폐한 유풍을 바로잡고 학풍을 진작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매년 봄가을 2회에 걸쳐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는데, 전국 각처에서 200여 명의 문사들이 모여들어 한시의 명맥을 전수하고 있다. 국내 유일의 이 시사에는 정만조의 문집을 비롯하여 한말의 전적(典籍), 한시현판(漢詩懸板), 백일장에서의 입선작 및 문인들의 시고(詩槁)가 소장되어 있다.

건물의 규모를 보면 4칸, 측면 1칸반으로 팔작지붕이다. 일단의 다듬는 돌 기단위에 반 듯한 기초를 놓고 민흘림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가구는 기둥위에 전퇴의 보아지가 보이며 장혀와 도리로 결구한 민가형이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전면에는 마루를 깔았다.창호는 전면 2칸 4분합 띠살문이며 양툇칸은 2분합 띠살문으로 되었다. 원래는 좌우와 후면의 중방이 벽돌로 된 것을 1979년, 1984년 2회에 걸쳐 벽돌을 제거하고 지붕이상을 보수하였다.

보이지 않은 시로 가득찬 집 목포시사

봄을 지척에 두고 하필 겨울 날, 보이지 않는 시로 가득 채워진 집! 유달산에 자리하고 있는 목포시사!를 찾아 나섰다. 색깔을 잃은 풍경은 고요한 생각에 잠기게 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목포시가 품에 안기고 유달산이 시린 어깨를 감싼다.

시사(詩社)는 서로 뜻이 통하는 선비들이 모여서 자연을 노래하고, 시를읊고 풍유를 즐기던 곳이다. 목포시사의 모태는 1920년에 결성된 유산시사(儒山詩社)라고 할 수 있다. 유산시사는 1920년 4월 29일에 창립되었는데 초대 시사장 草亭 金星圭와 竹下 崔芳鉉, 雲河 金賢瑞 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유산시사의 활동은 1932년 시사건물인 유산정의 창건을 계기로 활발해 졌으며, 그 영향을 받아 1930년대 말에 목포지역에는 보인시사(輔仁詩社)라는 또 다른 문학결사가 구성되기도 하였다. 이후 각각 활동을 해 오던 유산시사와 보인시사는 1961년 통합되어 현재의 목포시사로 새롭게 발족하게 되었다.

목포시사는 중앙정계에서 목포 주위의 도서지방으로 유배당해 유배지로 가거나,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앙문인들이 유달산에 올라 서정과 자신의 뜻을 아름다운 자연과 비견해서 회포를 풀고자 했으며, 그들과 이 지방 문인 사이에 서로 시로서 화답하는 문학적 교류가 이루어졌던 곳이라고 하겠다. 또한 목포시사가 만들어진 시기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단순히 시인묵객들을 위한 모임이라기보다는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의 심정을 토로한 유림들의 문학적 결사체로서의 성향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목포시사는 창립이후 목포백전회(木浦白戰會) 등과 같은 이름의 시회(詩會)를 개최하여 이 지방의 한문학 활동의 명맥을 계승해 왔고,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목포시사의 건물은 1976년 9월 30일자로 전라남도 기념물 21호로 지정되었으며,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목포에 세워져 있는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띄고 있다. 현재 목포시사 건물 내부에는 유산정 상량문, 유산정 중수기 등 목포시사의 연혁과 관련된 글과, 문인들의 작품 등 36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현재 목포시사 건물에는 '목포시사'라는 제목의 현판이 걸려있는데, 목포시사는 이 단체의 이름이고 이 건물의 이름 즉, 당호는 '儒山亭'이다. 지금 걸려있는 '목포시사'라는 제목의 현판을 뒤집어 보면 원래 걸려 있었던 '유산정'이라는 제목의 당호가 나온다. 이 유산정 글씨는 초정 김성규의 자필로 새겨져 1932년 유산정 건립 당시 만들었던 중요한 유산인데, 나중에 유산시사가 목포시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후학들이 목포시사라는 간판을 내걸기 위해, 이 유산정 현판을 뒤집어서 거기에 목포시사라고 쓰고 현재 모습처럼 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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