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학생운동(木浦學生運動,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목포에서는 목포상업학교가 큰 역할을 하였다.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은 독서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붉은 천과 대나무로 만든 적기(赤旗), 종이 깃발, 전단을 제작하여 11월 19일 정오 학교와 송도공원(일본신사) 두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천만 피압박 민중 여러분」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이라는 제목의 전단에서 총독 폭압정치 절대 반대, 제국주의 전쟁 절대반대, 무산계급혁명 만세 등을 주장했다. 이날 현장에서 백여 무장경관에게 포위를 당해 40여명이 검거를 당하였고, 목포 신간지회, 목포청년동맹 중요간부 10여명이 검속을 당하여 엄중취조를 받았다. 사흘 뒤엔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목포정명여학교 학생들도 목포상업학교 학생의 지원을 받아 시위를 준비했으나 미국인 교장의 밀고로 실패하고 주모자들은 구속됐다. [1][2] 광주학생운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구호, 즉 '약소민족해방만세 제국주의타도만세 피압박민족해방만세 무산계급혁명만세' 등의 구호가 전면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또한 더욱 과학적이고 민중적인 운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반제동맹 운동, 당 재건 운동 등에 참가 하는 것은 물론 직접 청년•노동•농민운동에 뛰어들어 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전남에서는 '전남노농협의회', '전남운동협의회' 등에서 활약하며 전남지역 항일운동을 조직적으로 발전시켰다.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