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배화사건(木浦排華事件, 1931)은 1931년 만보산 사건의 영향으로 목포 거주 화교를 배척하고, 화교상점을 습격한 사건이다. 화교는 1893년 목포에 처음 도래한 후 포목점과 농업, 주물업 등을 영위하며 1930년에는 400명이 넘는 인구가 목포에 거주하고 있었다.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은 1931년 7월 2일 만주에 있는 만보산 지역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일어난 충돌사건에 대해 일제당국의 허위 정보와 국내언론의 오보로 한국인 다수가 살상되었다는 소식에 접한 국내 한국인들이 당시 한국 내에 거류하는 중국인을 적대시하여 일으킨 일련의 폭동이라 할 수 있다. 배화사건은 1931년 7월 3일부터 1 주일 가량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국제연맹이 의뢰하여 조사된 리튼(Lytton)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거주 화교 사망 127명, 부상 393명을 기록할 정도로 피해가 심각한 분쟁이었다.특히 피해가 가장 컸던 평양은 사망자가 94명을 넘었고, 화교가 밀집된 인천은 경제적 피해가 가장 컸다.전국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던 목포에서도 배화운동이 발발하였다. 7월 6일 부터 본격적으로 무안통에 있었던 화교상점에 대한 습격을 시작으로 7월 7일에는 5-6백명의 군중이 德箕號, 文致德, 德成興, 永和利 등 4곳의 포목상을 습격하고 투석하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결국 일제 경찰의 제지로 해산하였고 배화시위와 습격은 잦아들었으나 7월 10일까지 간헐적으로 호떡집과 야채행상에 대한 투석과 폭행이 이어졌다.배화사건과 관련하여 검거된 목포주민은 14명이었으나 대부분 풀려나왔다. 목포에서 발생한 배화사건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규모나 빈도수도 작았고 인명 및 재산상의 피해도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그러나 7월 8일 중국인 노동자 30여 명의 철수를 시작으로 목포화교의 귀국이 늘어나 화교인구가 전년대비 35%가 급감하였다.이는 외형적인 피해에 비해 심리적 타격이 컸던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목포배화사건은 상호존중과 공존을 가치로 하는 다문화사회를 지향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잊지 말아야할 교훈을 주고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