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고보 설립운동(木浦高普 設立運動, 1935) 고보(고등보통학교)는 일제강점기 중등교육기관이다. 목포고보 설립운동 당시 목포의 각종 초등학교에서 해마다 배출되는 조선인졸업생은 340 내지 350명 정도였고, 무안군 20개소 보교 졸업생을 합하면 800여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목포의 중등학교 지원 학생들은 목포부와 무안군만이 아니라, 함평,영광,해남,영암,강진,진도,완도,장흥,제주까지 포함되었다. 이처럼 지역의 절박한 목포고보 설립운동은 1부 10군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학교 설립 및 운영에는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은 유지의 몫이었으므로 호남평론사를 비롯하여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매일신보 등 네 신문의 목포지국들의 노력으로 고보문제 유지좌담회가 1936년 2월 2일 국취관에서 열렸다. 좌담회는 학교의 종류, 실현 방법 등에 대한 심한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김철진 등 7인의 고보기성준비위원을 선출하였다. 이후 서병인 등 6인을 추가하여 13인의 위원으로 늘었으나, 부호유지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학교 설립비용 60만원의 기금모집 가망이 없음에 10만원 기금으로 잡종학교를 세워 장차 고보설립을 도모하자는 의견일치에 따라 실업학교 즉 중등학교 기성으로 재조직하였다. 유지좌담회에서 비롯된 목포고보설립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셈이었는데,1930년대 목포 부호유지들이 교육보다는 타락적 향략이 먼저여서 해방 이후 목포가 겪었던 정체, 낙후의 씨앗이 이때 뿌려졌다는 평가가 있다. [1]